사십칠 장. 변학도 둘
“어찌 마음이 변했습니까?”
“그냥 변했습니다.”
학도는 물끄러미 춘향을 응시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춘향의 반문에 학도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랜 시간 그대와 같이 가고 싶었소. 그런데 내가 같이 가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있겠소?”
“제가 사또와 같이 가는 것이 사또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겁이 납니다.”
“아니.”
학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춘향은 그런 것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모두 다 그가 감당할 것이었다.
“누구도 그대를 천하게 보지 않고 다르게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전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니.”
“예?”
춘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하라니.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왜 그러는가?”
“아니.”
“전하가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춘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 사는 이들 중 왕이 두렵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
“모든 것을 다 행하시어 조선을 다스리는 분을 두렵지 아니하게 느낄 이가 누가 있단 말씀입니까?”
“나.”
“예?”
“나의 오랜 벗일세.”
학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춘향은 입술을 꾹 다물고 물끄러미 학도를 응시했다.
“그런데 사또는 왜 저와 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대가 좋으니.”
“사또!”
학도의 고백 아닌 고백에 춘향은 목소리를 키웠다. 학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살짝 내밀었다.
“왜 그러는가?”
“공연히 그런 말씀을 하시어 뉘가 오해라도 할까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 사또는 저와 엮여서는 아니 되는 분인 것을 모르십니까? 사또는 귀한 분이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
“그대가 더 귀하네.”
“사또.”
“진심이야.”
춘향의 눈을 보며 학도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여기에 올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사나운 사또가 되었을 걸세.”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학도는 물끄러미 춘향을 보며 싱긋 웃으면서 선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왜 남원 고을에 왔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여인을 희롱해서 왔소.”
“예?”
“여인을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소. 마음에 담은 일이 없기에 여인을 함부로 다루고 했지.”
“그런데 저는 왜?”
“가라니 가더군.”
“예? 그게 무슨?”
춘향은 그제야 첫날 그 시간이 생각이 났다. 자신은 학도가 가라고 해서 간 것이었는데 그게 시험이었던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스스로를 지켰소.”
“나를 지켰다.”
그저 학도의 명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학도가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소.”
“그렇군요.”
“그리고 그대는 놀라움으로 나를 다르게 했소. 여인이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 잊고 있던 것을 깨닫게 했지.”
“위험한 말씀입니다.”
춘향의 대답에 학도는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짧은 한숨을 토해낸 후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면 정녕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진심입니까?”
“물론이오.”
춘향은 학도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학도는 잠시 춘향의 눈을 피하다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소?”
“저는 다 보입니다.”
“무엇이요?”
“사또께서 불안해하시는 것이요.”
춘향의 대답에 학도는 침을 삼켰다.
“지금 모든 걱정을 하시는 것이 다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사또를 믿기에 그냥 가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을 합니다. 여태 저를 지켜주신 분이기에 앞으로도 저를 지키실 테지요.”
“당연하지.”
“그러시겠습니까?”
“물론.”
학도의 대답에 춘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도가 이리 말을 하는데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무엇이?”
“사또의 모든 가능성에 저를 넣어주셔서요.”
춘향이 싱긋 웃자 학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모든 가능성에 춘향이 들어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말리는 것인가?”
“그것이.”
학도의 물음에 무영은 답이 궁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정확할지 알고 있기에 더욱 답답한 그였다.
“이미 알고 있네. 내가 얼마나 무모한 사람인지.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지도.”
“아니요.”
무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춘향 말입니다.”
“춘향.”
학도는 한숨을 토해냈다. 무영의 대답이 옳았다.
“지키실 수 있습니까?”
“지켜야지.”
“사또.”
“여태 지켰네.”
“전혀 다를 겁니다.”
“그렇겠지.”
학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은 전혀 다른 무대라는 것은 그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너무나도 다른 곳에서 춘향 아가씨를 지키실 수가 있을지. 아니면 놓으실지. 그것이 걱정이 됩니다.”
“나도 걱정이 되네.”
학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가시는 겁니까?”
“응.”
춘향의 간단한 대답에 향단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가서 좋으면서도 어딘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니?”
“예?”
“표정이 말이다.”
“아닙니다.”
향단은 자신의 기분을 들킨 것 같아서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떠나자고 했는데 이러는 것은 우스웠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되었다.”
춘향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불편했다. 허나 몽룡을 위해서도 이 고을을 떠나는 일이 옳았다.
“생각을 해보니 도련님도 그리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이 아닌가 싶더구나.”
“아가씨.”
“그런데 내가 무작정 도련님을 밀어내기만 할 수가 있겠느냐? 아니 없을 게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 그리고 내가 없어야 도련님이 이곳에서 바르게 서실 수가 있다. 스승으로 그리 되실 거다.”
춘향은 숨을 크게 쉬었다. 자신이 없어야 몽룡은 오롯이 설 수 있었다. 허나 아무 곳이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남원.”
이곳만 가능했다.
“나를 따라가겠니?”
“물론입죠.”
“방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춘향의 말에 향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방자는 같이 갈 수 없는 이였다.
“그래도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향단은 혀를 내밀고 입술을 잠시 적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은 춘향을 따르는 몸이었다.
“가야지요.”
“네가 가기 싫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예?”
“가지 않아도 돼.”
“아가씨.”
“너를 위한 것이다.”
춘향의 대답에 향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지 않아도 된다는 가능성은 생각한 적이 없던 그녀였다.
“어찌 제가 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가씨를 생각을 한다면 당연히 그리 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니.”
춘향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의 선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혼례라도 치르련?”
“아가씨.”
“그러자꾸나.”
“싫습니다.”
향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은 먼저 춘향을 배신할 수 없었다. 버릴 수 없었다.
“그러기 싫습니다.”
“향단아.”
“언젠가 인연이면 다시 만나겠지요. 그러니 어차피 헤어지게 된 인연 헤어지게 되는 것도 좋습니다.”
“이리 만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향단의 덤덤한 대답에 춘향은 마음이 아렸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한 쌍이 이리 헤어진다는 것이 마음이 아렸다.
“아가씨께서 가시는 걸음 모든 곳에 있을 겁니다.”
“다행이구나.”
춘향의 힘없는 미소에 향단은 어색하게 침을 삼켰다.
“정말 보내실 겁니까?”
“그래야지.”
“도련님!”
몽룡의 힘없는 대답에 방자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절대로 이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는 거였다.
“후회하실 겁니다.”
“내 몫이다.”
“허나.”
“네가 원한다면 너는 보내주마.”
방자는 몽룡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어느 날과도 다르게 진지한 그의 눈빛에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었다. 몽룡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었고 여기에는 방자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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