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구 장. 남원으로
“준비할 것은 더 없습니까?”
“없습니다.”
배웅은 무영 하나였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학도는 자신을 마주할 마음이 없을 거였다.
“그 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해드린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오직 그대가 모든 것을 한 것이니. 오히려 더 많이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요.”
무영은 너무 많은 것을 해주었다. 춘향과 향단이 한양에서 버틴 것도 오롯이 무영이 해낸 것 덕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요?”
“그럼요.”
춘향은 잠시 머뭇거리다 무영을 꼭 안았다. 무영은 잠시 당황한 채로 있다가 팔을 올려 춘향의 등을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서역에서는.”
“그런 변명 안 해도 됩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를 뵐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 궐에 들어가셨습니다.”
“저를 피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무영은 웃음을 보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신이 머물던 집을 쳐다봤다.
“꿈같습니다.”
“꿈이지요.”
“그렇습니까?”
“지금 한양은 그대가 얼마나 귀한 사람이지 모를 겁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요?”
“춘향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한양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전과 얼마나 다른지 말입니다.”
“그럴까요?”
춘향은 가만히 기둥을 어루만졌다.
“모든 것이 저의 죄 같습니다.”
“죄는요. 무슨.”
“제가 이곳을 떠나면. 그때는 사또께 어떤 이들도 방해를 하지 않겠지요? 그 순간에는 사또께서 모든 것을 다 얻고. 모든 행복을 얻으시고. 이곳에서 혼인도 하고 그렇게 사실 수 있겠지요?”
“그럴 겁니다.”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이 사실은 무영도 그리고 춘향도 알고 있었다. 허나 두 사람 모두 그리 될 것을 모르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향단이 모든 채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와서 씩 웃었다.
“가시지요.”
“그래 가자.”
춘향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남원으로.”
“후회하는가?”
“예.”
학도의 대답에 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가서 잡지.”
“아니요.”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후회하는 것은 춘향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 한양으로 데리고 오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불행하기만 했습니다.”
학도는 한숨을 토해냈다.
“제가 굳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을 이곳에 와서 망가뜨렸습니다.”
“그리 말하지 말게.”
“전하. 저는 이제 전하의 사람입니다.”
학도는 고개를 숙였다. 혼은 그런 학도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자신이 뭔가 망가뜨린 기분이었다.
“도련님 들으셨습니까?”
“무얼?”
“도련님.”
방자가 한 번 더 채근하자 몽룡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다.”
“참말이죠?”
“그렇겠지.”
몽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이 남원으로 돌아올 것을 알았지만 너무 빠르게 돌아온 셈이었다.
“무슨 일일까요?”
“여러 일이 있겠지.”
“실패하신 걸까요?”
“글쎄다.”
실패라는 말을 하기에도 너무나도 미안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이 조금 더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춘향이 그런 문제를 겪거나 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다 내 잘못이지.”
“도련님.”
“되었다.”
몽룡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려야지.”
“기다리실 겁니까?”
“그래야지.”
몽룡의 대답에 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볼 수 있겠는가?”
“예?”
혼의 말에 학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만나고 싶네.”
“허나.”
“부탁이야.”
혼은 간절했다. 학도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과연 혼과 춘향이 만나는 것이 좋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는 전하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허나 아무리 백성이라고 해도 전하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가?”
“예. 그리고 궐에 오는 사람은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그럼 나가겠네.”
“예?”
갑작스러운 혼의 말에 학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혼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무엇이?”
“저를 동정하시는 겁니까?”
“동정이라.”
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도의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동정. 지금 자신은 혼자이면서 다른 이가 혼자가 된다고 동정하는 거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싫습니다.”
“싫다.”
혼은 가만히 학도의 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임금의 명을 거절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주십시오.”
“무엇을?”
“누가 명하는 것인지. 누가 부탁을 하는 것인지.”
학도의 시선은 혼에게 닿았다. 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군.”
“만일 전하께서 지금 춘향 그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면 고민이 됩니다.”
“벗일세.”
“벗입니까?”
“그래.”
“벗이라.”
학도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벗이라.”
“그저 보고 싶어 그러하네.”
“알겠소.”
학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이 이리 말을 한다면 한 번 만나게 해줘도 될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예?”
가마에 오르려는 두 사람을 누군가가 다급히 불렀다.
“잠시 기다리시오.”
“무슨 일입니까?”
춘향은 가마에 내려 미간을 모았다. 지금 가지 않으면 남원에 가는 길이 더욱 멀 것이었다. 날도 어두워질 것이었다.
“지금 급합니다.”
“그러니 보자는 것이오.”
“예?”
“전하가 오고 있소.”
“뭐라고요?”
춘향의 눈이 커다래졌다. 전하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
“목소리를 낮추시오.”
사내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궐에서 나오시면 아니 되는 분이오. 그런데 그대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다리시오.”
“이게 무슨.”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혼이 자신을 만날 이유가 없을 텐데. 허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예?”
혼의 물음에 춘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왜 가려고 하는 것인지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만일 그대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네. 그러니 말을 하시게.”
“아닙니다.”
춘향이 곧바로 고개를 흔들자 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참 신비한 사람이었다. 왕인 자신이 말을 하는데 이리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 누구도 이리 쉽지 않았다.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다시 없을 기회야.”
“알고 있습니다.”
춘향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찌 그런가?”
“예?”
춘향은 놀라서 혼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놀라서 시선을 내리려고 하는데 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여기 임금으로 온 것이 아니야. 바로 학도. 저 밖에 있는 미련한 이의 벗으로 있지.”
“사또의 벗이요.”
“그래.”
사또의 벗이라. 춘향은 마음이 편해졌다. 학도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좋은 이였다.
“다행입니다.”
“무엇이 다행인가?”
“제가 없어도 사또께 이리 좋은 벗이 있으니. 제가 없어도 아무 생각 없이 나라 일에 힘을 쓰실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한양에 있으면 결국 사또에게 해가 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도 없는 사내와 곁에 있는 여인을 보는 사내도 불편할 것이고요.”
“전혀 안 되는가?”
“예. 그렇습니다.”
춘향의 단호한 대답에 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춘향을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여인이군.”
그리고 혼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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