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창고/AM 7:42 [완]

AM 7:42 <열네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8. 1. 14. 20:00
 


AM 7:42




14화


슬픈 연인의 이야기




“도대체 어디에.”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한 겨울에도 주현의 등이 땀으로 가득 젖었다.


“휴우.”

그래도 젊었을 적에는 이리 힘들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주현은 자신의 나이를 인식했다.


“그래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그나저나 정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날씨도 많이 찬데, 안에 들어가 있을 거 같지만, 이런 날 혼자 있으면 얼마나 외로운데.


“하여간 사람도.”

그 순간 주현의 눈이 빛난다.


“설마 거기에 가 있을까?”

주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아.”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정수는 머리에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여보, 아스피린 좀.”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여보!”

정수는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어지러웠다. 그리고 순간 이곳이 집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나한테 아스피린이 있던가?”

가방을 뒤지니, 아스피린 두 알이 나왔다.


“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다소 맑아옴을 느꼈다.


“휴우.”

정수는 가슴이 답답했다.


“나도 참 멍청하지, 여기를 왜 와?”

정수가 낮게 웃는다. 이 장소, 주현과 함께 했던 장소.

“왜 오긴?”

“?”

정수가 고개를 돌렸다.


“다, 당신.”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주현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다. 그런데 그의 몸이 온통 땀투성이다.


“어디서 이렇게 땀을 흘린 거예요?”

“당신 찾느라.”

“뭐요?”

“당신 찾느라고.”

주현이 머리를 긁적인다.


“나도 참 멍청하지 말이야. 처음부터 여기를 생각했으면 됐는데.”

“돌아가요.”

“당신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주현이 미소를 짓는다.


“당신도 이곳을 잊지 못하는 가 보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가까운 곳이니까 온 것 뿐이에요.”

“그렇다면 아쉽고 말이야.”

주현이 자리에 앉는다.


“당장 일어나요!”

“여기까지 뛰어왔어.”

“!”

정수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당신 미쳤어요? 당신 혈압 있잖아!”

“당신이 어디 있는 지 모르는데, 그럼 어떡해?”

“하아.”

예나 지금이나 주현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도대체 사람이 언제나 철이 들래요?”

“당신이 그토록 똑똑한데, 내가 무슨 걱정이야.”

주현을 보니 정수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채경이 결혼을 반대하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찬성하는 건데?”

주현이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 나이 먹어도, 이렇게 낭만적인 남자 만나기 쉬울 거 같아?”

“낭만요?”

“그래.”

“웃기지 말아요.”

“웃겨?”

주현이 낮게 웃는다.


“그거 참 다행이군. 당신을 웃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요즘 당신 얼굴에 항상 인상이 찌푸려져 있어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농담하지 말아요.”

“진담이야.”

“도대체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당신이 걱정이 돼서 말이야.”

“걱정이 돼요?”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고. 그러는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처음 함께 밤을 지샌 이후로 말이야.”

“!”

정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 그만해요.”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군.”

“누가 지금 부끄러워 한다는 거예요? 헛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절대로 채경이 결혼 허락 못 해요.”

“일단 우리 이야기 좀 하자고.”

“할 이야기 없어요!”

“나는 있다니까.”

주현이 부드럽게 웃는다.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 좀 하지.”

“하아.”

주현의 끈질긴 부탁에 정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이야기인 지 들어보기나 하죠.”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야.”

“…….”

정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주현이 낮게 웃는다.


“우리가 서로 만난 지도 어느 덧, 35년이 다 되어가는 구만.”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우리 채경이가 스물 아홉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정수도 그 시절이 생각이 난다.


“나도 참 나쁜 놈이였어.”

“무슨 말이에요?”

“당신 같이 아름다운 사람을 꼬셨으니 말이야.”

“훗.”

정수의 미소를 보니 주현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당신은 그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던 거야?”

정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채경이를 허락하지 못 하는 거야.”

“지금의 나는 편하지 만은 않아요.”

“왜?”

“당신이 너무 무능력하니까요. 당신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채워줄 능력이 되지 않아요.”

“알아.”

“그런데, 채경이 편을 그렇게 들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네?”

“계속 이렇게 반대만 하고 있을 거야?”

“당연, 하잖아요.”

주현이 낮게 웃더니, 정수의 손을 잡는다.


“아직도 이 손이 이토록 따뜻하군.”

“뭐, 뭐하는 거예요?”

“내 심장도 이렇게 아직 따뜻해.”

주현이 정수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에 올린다.


“우리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어.”

“아니요. 당신은 변하지 않았을 지 몰라도,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어요.”

“아니.”

주현이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변했다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어.”

“!”


“아니, 이곳을 없앨 수 있었을 때, 없앴겠지.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며 이곳을 지키지는 않았을 거야.”

“그냥 이곳이 나중에 훌륭한 투자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남겨둔 거 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

정수가 주현의 눈을 피한다.


“정말?”

“그래요.”

“조금은 실망이군.”

주현이 낮게 웃는다.


“하지만 이곳이 최소한 나에게는 말이야, 아직은 소중한 공간이야.”

주현이 기둥을 매만진다. 오랜 세월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가 나이를 먹은 만큼, 이 집도 나이를 참 많이 먹었군. 그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니 대단해.”

“누가 나이를 먹어요?”

“그래, 당신 마음은 여전해.”

주현의 말에 정수가 얼굴을 붉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어?”

“채경이 얘기 아닌가요?”

“아니야.”

“!”

정수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럼 여기에는 왜 온 거에요?”

“그냥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네?”

“우리 너무 오랜 기간 말을 나누지 않았잖아.”

“다 당신 탓이죠.”

“그럴까?”

“뭐라고요?”

“당신이 나를 거부했잖아.”

“!”

갑자기 정수는 할 말이 없다. 모든 게 사실이다. 지금 주현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맞는 말이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그러니까 이야기를 나누자는 거야.”

“하.”

“채경이 핑계를 대서라도 말이야.”

“좋아요. 이야기 하죠.”

“이제 됐어.”

“?”

정수의 눈썹이 모아진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가, 이제 됐다니요?”

“모든 이야기는 충분히 나눴잖아.”

주현이 미소를 짓는다.


“안 그래?”

정수는 뜨끔한다.


“당신도 이제 조금은 당신의 마음을 알았을 거고 말이야.”

“내 마음이요?”

“당신도 나와 한 마음 아닌가? 어떻게든 채경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말이야. 그 방법이 다소 다를 뿐이지.”

“…….”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분간은 당신이 하는 데로 그냥 둘 거야. 분명 당신도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야.”


“웃기지 말아요.”

정수의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두 아이를 무조건 갈라놓을 거예요.”

“후후.”

주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겠군.”

“어디로요?”

“집으로 말이야.”

정수의 눈이 흔들린다.


“그럼 먼저 가지.”

주현이 외투를 걸친다.


“추우니까, 밤에 난로 꼭 피우고 자지.”

“가지, 말아요.”

“!”

주현이 고개를 돌린다.


“뭐라고?”

“오늘은 가지 말아요.”

정수의 눈이 가늘게 떨린다.


“나 너무 무서워요. 채경이가 나처럼 힘들까봐. 당신이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누리던 것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미안해.”

주현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정수의 손을 잡는다.


“손이 많이 늙었구려.”

주현이 손을 주무른다.


“이걸 누가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고 믿겠어?”

“놔요.”

“가만히 있어.”

주현이 정수의 손을 주물러 준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당신.”

“미안해.”

“!”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

“그러네요.”

“늦은 건가?”

정수가 고개를 젓는다.


“생각보다 일러서 놀랐어요.”

“채경이의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때?”

“사실은 이야기 해봤어요.”

“그래 어떤 사람이던가?”

정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보.”

“사람은 좋아 보이더군요.”

“그렇지?”

“그래도 안 돼요.”

“왜?”

“채경이는 나와 다른 아이에요.”

“그래.”

“네?”

주현이 미소를 짓는다.


“당신과 다르기 때문에 강한 아이야.”

“여보.”

“그러니까 좀 믿어주면 안 될까?”

“하아.”

“부탁이야.”

“모르겠어요.”

“아니면 우리가 도와주면 되는 거잖아.”

“나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알아.”

“나는 모든 걸 포기했었다고요.”

“채경이는 모든 걸 지키면서 사랑하게 해주면 되잖아.”

“하아.”

“부탁이야.”

정수는 대답이 없다.


“여보.”

“알았어요.”

“어?”

“알았다고요.”

“진짜?”

“그래요.”

주현이 미소를 짓는다.


“당신 그렇게 좋아하지는 말아요.”

“어?”

“그러면 내가 한 말 취소하고 싶으니까.”

“어유, 그러면 안 돼지.”

그리고 입을 가려버리는 주현이다.


“킥.”

“재밌지?”

“그러네요.”

주현이 정수의 허리에 손을 두른다.


“그 아이의 마음대로 인생을 즐기게 해주자고.”

“하아.”

“응?”

“그래도 너무 다른 걸요?”

“우리는 같았나?”

“당신은 번듯한 직장이라도 있었잖아요.”

“무슨.”

주현이 미소를 짓는다.


“분명 그 아이들은 더 잘해나갈 거야.”

“그런데요.”

“?”

정수가 주현을 올려다본다.


“나를 용서해줄 지 모르겠네요.”

“어?”

“내가 그렇게 몹쓸 짓을 했는데요.”

“당신이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지.”

“그러면 용서를 해줄까요?”

“받을 때까지 빌어야지.”

주현이 든든히 정수의 어깨를 붙든다.


“내가 옆에서 같이 있어 줄게.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다행이네요.”

“그렇지?”

달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