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7:42
13화
태균이와 채경 이야기
“태균 씨.”
“왜 또 왔어요?”
채경이 진호를 만나러 가기 한 시간 전, 채경은 태균에게로 다시 찾아갔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해요.”
“아까 이야기 다 끝났을 텐데요?”
“아니요.”
채경의 눈이 애절하다.
“부탁이에요. 나랑 이야기 좀 해줘요.”
“하아.”
태균은 장사핑계라도 대고 싶었지만, 지금은 손님도 있지 않다.
“알겠어요.”
“좀 오래 걸릴 거예요.”
“휴우.”
태균은 문을 잠그고 왔다.
“어디로 갈까요?”
“가까운 커피전문점이라도?”
“됐습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앞선다.
“뭐예요?”
“요즘에는 커피를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졌어요.”
태균이 미소를 짓더니 동전을 자판기에 넣었다.
“뭐 마실래요?”
“카페라떼요.”
지하철 자판기에도 카페라떼와, 카페모카 등 커피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 채경이다. 이런 건 본 적 없다.
“나나 진호는 이런 커피도 못 마셔요.”
“네?”
“가격을 봐요.”
“500원하고 700원?”
이게 어때서 커피도 못 마신다는 거지?
“채경 씨 하루에 구두 얼마나 닦을 거 같아요? 채 스무 켤레도 닦지 못해요.”
“아.”
“그런데 진호 녀석과 저는 둘이서 일하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수입 마저도 나눠야 하는 거잖아요.”
태균은 그나마도 일반형으로 뽑는다.
“채경 씨는 고급으로 뽑았어요.”
“아.”
채경은 한 모금 마신다, 정말 맛이 없다.
“맛 없죠?”
“아,”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먹을 형편도 안 되네요.”
“죄송해요.”
“아니요.”
태균이 자리에 앉는다.
“불편하지만 앉으세요.”
“네.”
“이곳은 이런 곳이에요.”
태균이 쓸쓸히 웃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다.
“강남, 잘 사는 곳이죠. 하지만 저 위나 그런 곳이에요.”
“네.”
“여기는, 지지리 궁상이죠.”
채경은 할 말이 없다.
“처음에 녀석이 채경 씨 만난다고 했을 때 엄청 말렸어요.”
“네.”
“보였으니까요.”
“뭐가요?”
“그 녀석이 힘들어 할게요.”
태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의외로 잘 사귀더라고요. 그래서 생각보다 좋은 사람을 만났나 했어요.”
태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너무 힘든데 그냥 녀석이 혼자서 잘 견디고, 버틸려고 하는 거더라고요. 저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제 말이 틀렸다는 것을 홀로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네.”
“녀석 이제 대학교 가는 거 아시죠?”
“네.”
“그 녀석 그 대학도 포기하려고 하고 있어요.”
“네?”
“기숙사 비만 한 학기에 백 만 원이 넘는다고 하네요.”
“그게 뭐.”
“커피.”
채경은 아차 싶다.
“게다가 진호 녀석이 진희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녀석이거든요. 진희를 두고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갈 리가 있나요?”
태균이 고개를 숙였다.
“등록금도 문제죠. 일단 어떻게 한 학기 등록금 낼 돈은 있어요. 조금 빠듯하게 생활하면 일 년도 보내겠죠. 하지만 그게 다예요.”
태균이 두 손으로 커피를 잡는다.
“4년을 다 다니려면,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 지 상상도 안 간데요. 그래서 녀석이 대학을 포기하겠데요.”
“제가 내주면 안 될까요?”
“훗.”
태균이 웃음을 짓는다.
“참 고마운 얘기죠.”
“그러니까.”
“그런데 녀석이 그 돈을 받을까요?”
“네?”
“그 녀석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녀석이에요.”
“이거랑 자존심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있는 사람들 눈에는 어설픈 객기로 보일 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절대 잃어서는 않될 것이죠.”
“하지만.”
“알아요. 미련한 거. 왜 그렇게 멍청한 지 모르겟어요. 일단 그냥 받으면 되는 거잖아요? 무슨 문제에요. 그런데요. 진호 녀석이라면 받지 않을 거예요. 거의 그럴 거예요. 채경 씨에게 말도 안 할 거예요.”
“그게 어떻게 연인이에요!”
“헤어진 거 단순히 진희 때문만은 아니에요.”
“네?”
“채경 씨와 식사를 하고 진호 녀석은 생각이 많아졌어요. 자신이 채경 씨에 어울리는 지 말이죠.”
“그게 무슨.”
“솔직히 어울리지는 않잖아요.”
“왜요?”
“잘 나가는 사람이니까.”
“말도 안 돼.”
“물론 채경 씨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아요.”
태균이 쓸쓸히 웃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이 그렇지 않다는 건, 채경 씨 어머니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거잖아요.”
“…….”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 분처럼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채경 씨에게 등록금까지 받아 봐요. 말도 안 되죠.”
“그런 게 아닌 걸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 다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 상관 없을 까요?”
태균은 채경을 바라본다.
“얘기 해보면서 느끼는 건데, 채경 씨는 참 예쁜 동화 속에 사는 공주님 같아요. 너무 아름답죠.”
태균은 살짝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게 다예요. 너무나도 아름답고 예쁜 동화 속에서만 살아서 현실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죠. 마치 100년 동안 잠만 잔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도 같을 지 몰라요. 현실을 전혀 모르니까요.”
“저도 알 건 알아요.”
“알 건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태균이 낮게 웃는다.
“못 그러죠.”
“내가 어떻게 해야 해요?”
“그냥 진호를 봐줘요.”
“어떻게 그래요?”
“그 녀석 하자는 데로 가만 놔두면 어떻게든 흘러 있을 거예요.”
“하아.”
채경은 커피를 들이켰다. 지독히도 쓰다.
“그나저나 정말 맛 없네요.”
“그게 고급이라니까요.”
“킥.”
“풋.”
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녀석도 채경 씨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어요.”
“알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 시간을 못 기다리겠어요.”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하아.”
“녀석은 생각이 그렇게 느린 놈이 아니거든요.”
태균이 싱긋 웃는다.
“나도 할 얘기가 있어요.”
“네?”
채경이 미소를 짓는다.
“내 얘기 좀 들어줄래요?”
“뭐 그러죠.”
“우리 아버지는 무지하게 가난한 분이셨어요.”
“네?”
“우리 어머니는 엄청난 부잣집의 따님이셨죠. 그런데 둘이 사랑에 빠져버린 거예요. 외가에서는 난리가 났죠.”
채경은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진심으로 아빠를 사랑했어요. 아니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으셨나봐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에게로 가셨죠. 그 순간이 저의 부모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거에요.”
“아.”
“그런데, 그 사랑이 생각보다 오래 가지가 않으시더라고요. 제가 조금 생각이라는 게 생길 때는 이미 부모님의 사이가 안 좋은 후였어요.”
채경의 미소가 쓸쓸해보인다.
“엄마는 지난 세월을 모두 잊고 싶어 하셨죠. 보상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 놈의 정이라면서 같이 살고는 계신데, 어머니는 제가 자신의 길을 걷지 않기를 원하세요.”
“자신 일 같으시겠군요.”
채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는 분명 제가 포기할 거라고 해요.‘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러시겠네요.“
”그런데 저는 아니거든요.“
채경이 미소를 짓는다.
“저는 정말 아니거든요.”
“네, 아닐 겁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걸 모르세요.”
“언젠가는 깨달게 되시겠죠.”
“엄마는 외가와는 또 다르세요. 더 독하신 분이죠, 자신의 딸을 위해서라면 더 한 일도 하실 분이에요. 그 사실이 두렵고, 무섭고 죄스러운 거예요. 더 이상 엄마를 죄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네.”
“좋습니다.”
“?”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제가 감히 충고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지금 바로 진호를 찾아가세요.”
“!”
“전화도 걸지 말고요.”
채경이 전화를 꺼내려고 하자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찾아가 보세요.”
“하지만 어디 있는 지 알고요?”
“장소요?”
태균의 입가에 미소가 띠워진다.
“분명히 거기 있을 겁니다.”
“거기요?”
“네.”
채경이 귀를 가져다댄다.
“!”
“분명해요.”
“고마워요.”
채경이 고개를 숙인다.
“우리 다시 사귄다면 모두 태균 씨 덕이에요.”
“무슨.”
“정말 고마워요.”
“어서 가보세요.”
채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멀어진다.
“휴.”
태균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두 사람 정말 잘 돼라.”
태균은 남은 커피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나저나 커피 정말 맛 없네.”
그리고 다시 일하러 가는 태균이다.
“정말 태균이 자식이 그랬어요?”
“응.”
“자식.”
진호가 미소를 짓는다.
“은인이네요.”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뭐가?”
채경이 진호를 바라본다.
“우리 말이에요.”
“잘 해봐야지.”
채경이 싱긋 웃는다.
“엄마는 분명히 설득할 수 있을 거야.”
“말로만?”
“함께 하면 될 거야. 결국엔 엄마도 이해할 거야.”
어느 새 서로를 진심으로 믿게 된 두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꾸 반말 써?”
“쳇, 그 쪽도 반말 쓰면서.”
“그쪽?”
채경이 살짝 흘겨본다.
“강진호 씨, 내가 그 쪽보다 연배가 위라고요.”
“그래서요?”
“어머.”
“이제 채경이라고 부를 거예요.”
“쳇.”
채경이 미소를 지으며 진호의 팔짱을 낀다.
“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허락해 준다.”
“킥.”
“킥.”
두 연인은 함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 하늘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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