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해! Season 4
- 쉰여덟 번째 이야기 -
“흐음.”
지연이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아버님이 오실 시각이 지났는데.”
대연이도 없고 너무나도 심심했다.
“무슨 일이지?”
평소에는 이렇게 늦지 않는 아버지였다. 항상 자신을 걱정하며 거의 자리를 비워두시지 않는 분인데.
“하암.”
지연은 하품을 했다.
“너무 졸리네.”
그리고 잠이 드는 지연이다.
“부탁해.”
“알았어요.”
화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정말로 치료를 받지는 않을 생각이신 거예요?”
“응.”
“후우.”
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그래,”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고마워.”
“오빠 정말 미운 거 알고 있죠?”
“응.”
태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 내 되게 나쁜 놈이고, 미운 놈인 거, 하지만 나만 미워하고 지연이는 미워하면 안 돼.”
“알았어요.”
화영이 미소를 짓는다.
“잘 알았어요.”
“그래, 고마워.”
“네, 들어가세요.”
“그래.”
태경이 지연의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화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추울 텐데.”
자신을 기다리다 잠이 든 모양인지, 자세도 바르게 하지 않고 자고 있는 지연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태경이다. 이런 지연을 보면 자신이 치료를 받아 건강해져서 지연이가 커가는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오롯이 보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으로써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태경이다. 지금 자신이 치료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야 말로 미친 짓이었다. 정말로 살아날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술을 하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참 우스울 정도의 확률로만 삶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수술, 그것도 수 억이라는 돈이 필요한 그 수술을 마치고 나서, 모든 치료가 끝나고 나서 태경이 살아날 확률은 0.3% 그리고, 그 치료를 끝 마친 후에 암이 재발하지 않을 확률은 40%, 그리고 만일 다시 그 암이 재발한다면 살아날 확률은 0.1%, 그리고 다시 나은 후에 암이 재발하지 않을 확률은 20%, 그리고 다시 치료를 할 수 있을 확률은 0%였다. 그야 말로 미친 게임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확률을 따진다는 것도 참 우스운 것이 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날 확률도 높지 않은 것을 담담하게 말하는 의사의 얼굴도 참 재미 있었다. 이런 일이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기에 의사가 그렇게 담담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태경의 마음에는 그 의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는 하더라도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치료비를 낼 형편이 되는 가, 되지 않는가만 생각하는 걸로 보여서 태경은 마음이 쓸쓸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의사가 좋은 것은, 자신이 돈을 낼 형편이 되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말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경이 살아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너무나도 냉정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해 주었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이 의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살아날 확률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을 해보기라도 하겠지만, 이 의사는 너무나도 단호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를 가지고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태경에게 증명했었다. 이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태경은 더욱 차분해질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이 의사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사의 너무나도 차분한 말에 태경은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하더라도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은 죽는다. 그 사실은 어떻게 변화할 수도 변화하지도 않는 사실이었다. 다만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
“그래.”
태경이 지연을 들여다 보았다.
“음냐.”
“허, 녀석.”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연아.”
태경이 지연의 머리를 쓸어 넘긴다.
“미안해.”
바로 지연, 지연이 태경이 죽을 수 없는 바로 그 이유였다. 이 아이를 두고, 자신을 닮은 자신의 죽은 부인을 닮은 이 아이를 두고 혼자 죽을 수 없는 태경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이 험한 세상에 이 아이를 지켜줄 사람이 더 이상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태경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고집과 잘못된 우둔하고 고루한 사고 방식이 이 아이를 살아 남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마다 태경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는 듯도 하지만 자신을 너무나도 닮은 이 아이를 보면서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아니 자신이 떠나야만 했다. 이 아이를 두고는 죽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경이 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아이 때문이기도 했다. 만일, 정말 만에 하나라도 지연이 없었더라면, 태경 자신의 몸이 혼자였더라면 아무런 고민이 없이 수술을 결정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큰 돈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한 번은 수술을 받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연이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큰 빚을 지고, 큰 돈을 쓰고 간다면 지연은 어떻게 살아나갈 방도가 더더욱 없었다. 지연이라는 존재는 태경에게,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게 만드는 아이였다.
“지연아.”
하지만 이 아이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이였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아빠가 미안해, 미안해.”
태경이 연신 지연의 손을 주무른다.
“미안해.”
더 이상은 이것도 해주지 못할 게 분명했다.
“후우.”
태경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화영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있다.
“나쁜 사람.”
한 참을 울고 났는데도 불구하고 이 눈물이 멈추지는 않았다. 같은 부모라는 입장에서 태경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고, 한 때 사모했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써 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정말 원망스러운 하늘이었다.
“하아.”
너무나도, 너무나도 원망스러운 하늘이었다.
“여보.”
태경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가 그리도 보고 싶었소?”
태경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아무리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조금 늦게 불러주면 더 좋았을 것을, 아무리 우리의 연이 깊고 또 끊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리 빨리 나를 데려간다면 우리 지연이는 어떻게 한단 말이오.”
태경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여린 아이 말이오.”
태경의 눈이 하나의 별을 바라본다.
“당신을 쏙 빼닮아 너무나도 여리고 여린 아이요, 눈물이 많고, 웃음이 헤픈 아이였는데, 내가 그만 그 아이를 다치게 해버리고 말았소, 지금은 그 아이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고, 요즘 들어서 겨우 그 가면을 벗으려고 하는데, 이제 겨우, 겨우 그 상처들을 모두 벗어나고 드디어 자신을 찾으려는 그 아이에게 당신은 다시 가면을 씌우려고 하고 있구려, 정말 너무 합니다.”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알고 있습니다.”
태경이 아래 입술을 꼭 깨문다.
“우리가 비록 혼인을 맺고 10년도 채 되지 못하여 당신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못 이룬 많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그렇기는 한데.”
태경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그래도 이건 너무 이르지 않소?”
태경이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당신 곁에 가기 싫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하지만 우리 지연이가, 그 여리디 여린 아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른이 되고 나서 나를 데리고 가기로 하면 안 되었던 겁니까? 그랬던 거요? 조금만, 아주 조금의 시간이면 되었을 텐데,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래도, 그래도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은 보고 싶었는데, 그 소소한 것까지 누릴 수 없게 하는 구려. 물론.”
태경이 침을 삼킨다.
“당신도 그 곳에서 홀로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너무나도 외롭고 춥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태경의 발 앞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렇게 나를 데려가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독선적인 그런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아무리 부부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태경이 아래 입술을 꼭 문다.
“너무합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너무 합니다. 나와 지연이만 두고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더 잔인한 사람입니다. 이제 겨우, 이제 겨우 우리 두 사람, 이렇게 둘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겨우 이런 생활에 적응을 했는데, 얼마 전에 나의 고집 때문에 지연이에게 힘든 일을 또 겪게 했었는데, 그랬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오. 그런 거 아니오.”
하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후우.”
태경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아무리 원망을 하고, 또 원망을 해도 아무런 대답을 얻어 낼 수 없는 그런 하늘이었다. 그런 곳이 하늘이었다.
“당신.”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내 말이 들린다면, 그렇다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나에게 시간을 더 주면 안 되겠소?”
여전히 하늘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일이 하늘의 규칙에 위배가 된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나도 잘 알고 있소만, 그래도, 그래도 한 달이라는 시각은 너무나도 빠르지 않소? 이 나이에, 이 많은 나이에 급성 종양이라니, 그건 나 같은 늙은이는 걸리지 않는 거 아니오? 도대체,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죄를 내리는 겁니까?”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혹시나 다른 여인을 마음에 잠시나마 품었다고 이러는 거라면 당신 역시 질투가 많은 게 참 신기하구려. 화영이, 그래, 화영이 그 아이는 내가 어린 시절 잠시 마음에 품었던 아이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지연이를 따뜻하게 감싸주려고 하는 착한 사람일 뿐이오, 그러니 부인.”
태경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제발, 잠시만. 잠시만.”
태경의 눈에서 비가 흐른다.
“아주 잠시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소?”
태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아주 잠시만.”
태경의 어깨가 흔들린다.
“더 이상 바라지는 않겠소, 제발, 제발 그 아이를 조금만 더 지켜볼 수 있게 해주오, 제발 부탁이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오, 당신의 전 남편이,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신의 전 남편이었던 자의 부탁인데, 어떻게, 어떻게 안 되겠소?”
태경은 무릎을 꿇는다.
“후우.”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태경이 슬픈 미소를 짓는다.
“그래, 안 되는 일이겠지, 그런 일이겠지, 그렇겠지요.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요. 그렇지요.”
태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보.”
태경이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면 자그마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소?”
순간 별이 하나 반짝인다.
“여보.”
태경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 말 모두 듣고 있었던 거구려.”
태경이 울먹거린다.
“당신 정말 고마워요. 내 말을 듣고 있었구려, 그랬구려, 그런 거였구려.”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면 내 부탁 좀 들어주오.”
태경이 간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오.”
하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냥. 그냥.”
태경이 머뭇 거린다.
“내가 죽을 때 말이오.”
태경이 싱긋 웃는다.
“아프지 않게.”
태경이 왼쪽 주먹을 쥔다.
“그냥 아프지 않게 죽게 해주오.”
태경이 씩 웃는다.
“내가 아프면 분명 신음 소리를 낼 것이고 그러면 지연이가 알게 될 것이 아니오, 그냥, 그냥 자는 것처럼 그렇게 죽게 해주오, 지연이에게는, 지연이에게는 아무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아요.”
태경이 미소를 짓는다.
“그 정도는 가능하지요?”
하늘에서 별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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