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 창고/시 읽는 하루

여백

권정선재 2009. 12. 6. 05:18
 

여백



권순재




어릴 적,

나는 여백을 너무나도 싫어했다.

도화지의 하얀 부분,

그 부분은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크레파스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붓을 들었다.

남은 곳 하나 없이,

나는 점점 그곳을 차례대로 메꾸어 나갔다.


어릴 적 나는,

그 빈 부분이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부분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금 머리가 굵어진 요즘.

그 빈틈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숨을 쉴 공간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오늘.

나에게 그 모든 것은 지옥으로 닿아온다.


그 빈틈 없는 공간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다.


어릴 적 죄악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그 부분이,

이 시절 나에게,

하나의 숨통이 될 줄 왜 몰랐던가?


알았더라면,

그 시절 그것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나를 살려둘 것을.

조금만 더 나에게 여유를 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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