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비평 따라잡기]
1~5번은 단답형
1. 참선비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과 그 내용을 세 가지 말하라.
1. 정심솔성 : 정심솔성은 마음이 바르지 않아 사악한 기운이 생겨 악념을 따르는 일을 막기 위해 마음을 바르게 요지하고 본래의 선한 성품을 따라야 한다.
2. 정관위좌 :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로 몸가짐을 바르게 유지함으로써 이어서 마음까지 순일하게 만드는 수신을 이르는 말이다.
3. 질욕정분 : 욕망과 유혹, 그리고 분노와 원망을 다스려 남을 탓하기보다는 참된 인격을 이루는 성찰의 계기를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조건이다.
2. 순자의 네 가지 용기는?
‘개, 돼지의 용기’, ‘장사치와 도둑의 용기’, ‘소인배의 용기’, ‘군자의 용기’로. 첫 번째는 제 것만을 탐하는 무도한 자를 가리키고, 두 번째는 재물을 놓고 다투며 탐욕으로 남을 울리고 지독한 이기심을 가진 자들을 이야기 한다. 세 번째는 단기적은 이익만을 좇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군자의 용기’는 도의를 위해 권세를 굽히지 않는 ‘참된 용기’를 말한다.
3. 재도론이 바탕으로 하는 것은?
이기론으로, 이, 기의 관계가 문, 도의 관계에 적용된 것으로, 이는 도에 기는 문에 해당된다. 이선기후이듯 도선문후만 현상적으로 문과 도 또한 불상리하여, 기가 있은 후에 이가 갖추어지듯 문이 있어야 도를 담아낼 수 있음을 뜻한다.
4.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는?
후기로 가게 되면서, 재산 상속에서도 차별을 받게 되었고, 제사 역시 조선 초에는 아들과 딸의 구분이 없이 돌아가면서 모셨으나, 후기로 오게 되면 모두 장자가 도맡게 된다. 또한 족보에서 여성을 지우면서, 그녀들을 출가외인이라는 단어로 폄하하였다.
5. 묘당유와 산림유는 무엇인가?
묘당유는 정계에 뛰어들어 현실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펴보려는 학자를 의미하고, 반대로 산림유는 산림과 농천에서 은거를 하면서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고, 또한 후학을 길러내는 학자를 이야기 한다.
6~20번은 서술형
6. 선비의 이중성을 이야기 하시오.
조선시대는 직분의 층차 뿐 아니라, 신분의 층차도 컸다. 어두운 측면에서 선비들의 사고와 행동은 엄격히 구분되었다. 다양한 층차는 곧 그 시대의 전근대적 봉건성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의 선비들은 노비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명문화된 문서로 매매하였다. 이이에 이르러야 양민화가 공식적으로 제안되었으나, 이 역시 병역 의미를 조건화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나마도 정책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한 같은 양반으로서, 겉으로는 인격 존중의 언행을 보였던 부인에게 칠거지악을 적용하였음에도 분명히 드러나고, 적, 서자 차별 역시 같은 폐풍이다. 또한 조선시대 실정의 악폐로,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 농민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제 배만 불리는 악독한 모습도 보였다.
7. 조선후기의 혼란이 일어난 이유는?
후기로 올수록 사정이 악화되었으나, 지배층은 실학자를 따르지 않고 고식적으로 일관하였다. 정치가 세도로 흘러 민중의 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서구 근대과학과 천주교의 전파로 기존의 성리학과 통하였던 우주관, 세계관, 신관, 사회관 등이 변이되었다.
세도가로 불리던 권력층은 과거를 요식 행위만 갖춘 부정장으로 만들어 매관매직에 혈안 되었고, 실세한 양반의 처지도 이와 통하였다.
민심은 지배층으로부터 이반되었고, 각종 민중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도의 급격한 성장은 실학 등의 성장과 성리학의 폭이 좁아지는 것에서도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음성적으로 존재를 하던 무속과 불교는, ‘정감록’과 ‘미륵도래설’ 등을 말하며 더욱 더 민중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조선후기의 혼란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중이 지지를 하던 동학의 창시자인 ‘최재우’를 국가가 두려워하여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민중들의 불만은 하늘로 솟구쳤다.
8. 선비에 대해서 평가하시오.
양반사회를 도덕적으로 한 것도 선비이고 모순과 폐단에 대한 시정책을 내놓은 것도 선비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회 해체를 지향하는 혁명에 앞장선 것도 선비였다. 양반이든 중인이든 선비만을 살필 경우, 그들은 봉공정신에 입각, 대중의 공익 추구에 헌신한 것을 높이 살 수 있다. 사실 진정한 선비가 되기 위해 노력한 선비들에게 사생활의 폭은 좁았다. 관리가 아니라도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로 예의와 덕망을 가진 의로운 공인으로 처신했다. 이기적인 ‘이욕’을 버리고 ‘공익’이라는 큰 가치를 위해 봉사를 했다.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던진 의병장을 비롯, 청백리, 지사, 학사, 열사가 수없이 나오고 조선조 500년을 지속시킨 비결 역시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식과 통치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선비의 상은 오늘날 우리가 닮아야 할 소중한 것을 담고 있다.
9. 사단칠정론이 이기론과 심성론에게 미친 영향.
주자학의 인식론, 존재론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당칠정론, 인성물성론 등을 논하며 진리를 추구했다. 1559년부터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8년여에 걸쳐 전개됐고, 1572년 성혼과 이이 사이에서 다시 재연되었던 사단칠정논쟁의 쟁점은 인간의 정신, 심리 작용이 리와 기의 결합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리와 기의 관계, 상호작용의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사단이 칠정에 포함되는 가 아니면 본래부터 사단과 칠정은 구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단칠정논쟁은 장기간의 논의로 이기론과 심성론을 심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단칠정론은 이기론과 심성론의 중심이 되었다.
10. 조선시대의 진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진리는 일상적인 진리이다.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유학의 목표이니, 이 유학의 진리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삶의 지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진시를 추구하는 학문과 수양은 이런 삶의 지혜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하는 과정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진리는 도, 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고, 자연과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서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도덕규범 둘 다, 도와 리였다. 이에 따라 존재론, 우주론의 탐구도 도덕률의 근거를 자연에서 찾기 위한 것이었다.
선비들은 도덕적 실천의 이론적 타당성을 탐구하였는데, 궁극적인 목적은 도덕규범에 대한 확신과 그 실천이었다. 사단칠정론논쟁과 인성물성론논쟁 모두 이 인간의 자발적인 도덕적 실천을 어떻게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히 설득시키는 방법에 둘러싼 논쟁이었다.
11. 조선시대 선비의 역할은?
전통시대에 학문과 교육을 담당했던 선비계층은 소지를 전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대지를 배양하는 일에 궁극적은 목표를 두었다. 조선 초 대지에 목표를 두고, 사설 교육 기관을 창설한 사람은 길재였다. 그의 학문의 특징은 인간됨의 완성과 실천을 중시하는 데 있었다. 그는 직접 몸으로 실천하며 사표가 되고자 하는 교육방식인 신교를 강조하였다.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임무는 군왕에게 정치 윤리를 가르쳐 선정을 베풀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광조’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을 이상정치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임금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이욕을 경계하는 말을 많이 진언하였다.
선비는 또한 지역 사회의 지식인으로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고, 지역 사회의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후기로 가게 되면 각종 사회 문제 등에도 참여를 하게 됨으로, 사회의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립시켰다.
12.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 계기와 그 결과는?
고려 말, 조선 초부터 크게 자각되고 실천 된 성리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둔 ‘사림파’가 형성되면서, 기존의 세력을 가진 훈구파와 대립을 한다. ‘사림파’가 수양대군 왕위 찬탈을 불의로 간주하며, ‘김종직’이 훈구파를 역사에 고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세력을 지니고 있던 ‘훈구파’가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며 새롭게 자리에 떠오르는 ‘사림파’를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였고, 이들을 모함하여서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세를 키우지 못하게, 그들의 세를 없애버리고자 마음을 먹고, 그렇게 행한 것이 바로 ‘무호사화’이다.
이로 인해 ‘사림파’의 세력은 극도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훈구파’의 세력 역시 ‘사림파’를 없애는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후 ‘훈구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13. 한글의 독립이 가능케 되기까지의 과정은?
15세기 중엽 한글이 창제될 때만 하더라도 한글이 한문의대체물이 되기를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8, 19세기로 이르면서, 각 종의 한글 작품 외에 한글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들까지 많이 나타남으로써 한글은 한문으로서 완전히 독립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글이 가지고 있는 유용함 등이 알려지게 되면서, 여성이나 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한글이라는 것을 사용을 하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로 다가오게 되면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한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글, 우리말을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번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기존의 한문이 줄어들게 되고 한글이 독립적인 역할과 그 자리를 찾게 되었다.
14. 전통적 가정과 여성의 삶을 혼인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사회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족이 되어 가정을 이루는 혼인은 인륜지대사라고 불리며 중시되었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결합에 비기고 있다.
그러하기에 혼인의 파기 즉, 이혼은 신중해질 수 밖에 없는데 흔히 조선시대의 이혼과 관련해 칠거지악의 조항을 들어 남성에 의한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혼인관계의 파기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조항에 따른 이혼은 극히 드물었을 뿐 아니라, 삼불거라는 세 가지 제한 조건은 한 번 맺어진 혼인의 자의적인 파기에 대한 견제 장치로서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비해서 여성들의 권리가 낮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바로 단어의 사용에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장가를 들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장가를 들다’라는 말 대신에, ‘시집을 가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혼인에 대해서 여성이 가지고 있는 권위나 그 위치, 자리가 그 전에 비해서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5. 음양에 따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부부간 내외의 법도는 음양론에 근거하여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 역할을 달리 규정함으로써 각종의 제도와 관습으로 나타났다. 음양론은 음과 양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각기 서로 다른 고유의 기능과 특징을 통해서 교감을 하고 상호보완 하여 생명의 화육을 이루어냄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남펴과 아내의 역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 내외오의 분리를 정당하게 하였다.
즉 전통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서로의 역할을 구분하여, 서로가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노력하며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16. 산수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오.
산수관은 산수화의 구도와 기법에서도 반영이 되는 것으로, 직접 자연에 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곽희의 산수의 자연세계와 통하는 것이다.
곽희는 큰 산 = 천자, 작은 산 = 제후, 장송 = 군자, 나무 = 소인으로 보고 산봉우리를 둘러싼 풍경으로 군신상하관계를 반영하였다.
또, 물 = 혈맥, 초목 = 모발, 안개구름 = 신체에 해당된다고 보아 산수화를 인간 생명의 유기체로도 삼았다. 이처럼 산수화에 현실을 반영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성리학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를 나누는 학문이다 보니, 이러한 것을 통해서 그 자연과 인간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7. 진경예술과 실학사상을 설명하시오.
‘진경’은 실학적 의미도 포함하는데, 성리학과 실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실제성의 추구로 이익은 성리학에 지나친 몰입은 사변적으로 흘러 실천력을 잃게 하므로 경전을 해석할 때 수기치인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회화를 보는 시각에도 반영되어 중국의 것을 답습하는 당시의 풍토를 비판했다. 그는 관념화된 회화, 현실을 등한시한 지식인의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이익이 말하는 진경은 눈에 보이는 설경을 의미하고, 당시의 회화가 관념에만 치중해서 실경의 재현을 멀리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이다.
이익의 예술관은 형신론에 기인하는데, 그는 서양근대과학을 접하고 자연을 객관화 시켜 감각의 대상으로 사용하였다. 자연, 규범 영역을 분리하여 전통계승과 합리적 과학 수용의 균형을 이루려고 하였다. EH 서양화의 사실성에 감탄하여 명암, 원근법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태도는 탈사대주의와 함께 조선의 산수에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주체의식으로 발전했다.
18. 기자는 누구인가?
기자는 본래 기원전 1100년 경 은나라 말엽의 이른바 ‘삼인’가운데 한 사라믕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시대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 자체로 유교적 의리의 한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유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당대인들에게 기자는 사대주의적 상징물이기보다는 문화적 자존의식의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16세기 후반 성리학이 발달하고 중화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기자가 단군을 압도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19. 천하도와 세계지도가 미친 영향.
서세동점을 통한 ‘세계’의 확장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세계지도의 출현이었다. 세계지도는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담아내는 그릇과도 같아서 거기에는 세계에 관한 자연적, 인문적 지리정보가 이해된 대로 실려 있기 마련이다.
‘곤여만국전도’는 조선에 충격을 주었고,. 조선 지식인들의 비판과 부정을 가장 적게 받았다. 이것은 이어서 ‘이익’ ‘홍대용’등에 의해서, ‘중화’와 ‘오랑캐’는 같은 것이고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모두 하나의 나라는 인식을 만들게 되었다.
20. 전통시대 선비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위에서도 이야기를 한 것처럼, 조선시대의 선비는 여러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중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거기서 제해야 할 모습 역시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일단 몸을 바르게 닦는 일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부로 언행을 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천천히 그리고 제대로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관리에 올라있지 않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실제로 지역에서도 자신들의 위치와 지식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권력층의 모습과는 다르게 나라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먼저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민중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나라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과거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비라는 존재가 과거에 대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많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것에 대해서 무조건 비판적인 태도만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취할 것은 적당히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전통시대 선비의 모습은 우리의 현대와 그리 맞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그들의 솔선수범이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욕구,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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