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이기주의
[라쇼몽] 영화 원작과 비교하기
20세기 최고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빠지지 않고 늘 이야기가 되는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기적인 모습과,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라쇼몽]이 바로 그것입니다.
[라쇼몽]은 동명의 단편 소설 [라쇼몽]과 또 하나의 단편 소설 [덤불 속]을 합쳐 각색한 것으로 1950년 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영화로 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그림자를 이용해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대비, 선과 악을 대비하는 것은 흑백 영화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라쇼몽]은 원작과 다른 모습을 여럿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것은 두 개의 단편 소설을 하나의 영화처럼 매끄럽게 연결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 작가는 [라쇼몽]이라는 단편 소설의 배경 속에서 [덤불 속]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 구도로 변형을 시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주제 역시 약간 다르게 됩니다.
[라쇼몽]이라는 단편 소설이 가지고 있는 주제는 인간이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몸을 뒤져서 나오는 물건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노파를 보게 된 주인공은 경악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에게 노파는, 애초에 이 사람들도 악행을 저지르다 죽었으니 이 정도 일은 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라며 반문합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인공은 그렇다면 나 역시 그대에게 부정한 짓을 하겠다며 노파가 모아놓은 모든 물건을 가지고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인간이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인간이 정말로 선한 존재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에는 노파를 욕하며 그의 행동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을 하던 주인공이, 노파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하여서 자신을 타락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동물이 극한의 상황, 혹은 유혹에 빠지는 상황에서 어떻게까지 잔인해지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덤불 속]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릅니다. [덤불 속]은 영화 [라쇼몽]처럼 여러 사람들이 증언을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증언을 하는 사람들의 말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 같은 사건을 보고 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보는 것이 다르고, 또한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불리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하면 그것을 왜곡을 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증언이란 법의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주장은 다르며 모두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은 너무나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아주 조금이나마 사건과 관련이 될까봐 모든 일을 덮어 놓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이런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이러한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신선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세계대전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진실이란 한 가지 시선으로만 봐서 맞출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동안 믿던 진실이라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깨닫게 됩니다.
[덤불 속] 속의 주인공들은 이왕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이 명예롭기를 바라는 모습 역시 보입니다. ‘다조마루’는 죽은 사내가 23합까지 자신과 겨루었다며 그를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모습 역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원작에서나 영화에서나 동시에 보이고 있습니다.
여자의 참회나 무당의 몸에 깃든 사내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욕보인 사내와 지켜주지 못 한 사내에 대해서 원망을 가진 한 여자가 자신의 남편의 눈을 잊지 못하는 모습은 한 여인의 아픔을 넘어선 씁쓸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지 못한 남편의 후회가 묻어있는 남자의 자백 부분 역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싶은 궁금증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원작 소설은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 모두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지만, 결국 인간들이 배신을 한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영화 [라쇼몽]의 경우 그렇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데리고 가서 잘 키우려는 나무꾼의 모습을 통해서, 아무리 인간이 타락했다고 보이더라도 결국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선한 마음이다라는 것을 그리고자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이미지화 시키는 부분이 강렬한 것 역시 소설과 영화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입니다. 소설에서는 그저 자신을 ‘증오하는 눈’이라는 구절로 끝이 나는 부분 역시 영화에서는 자세하고 정말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눈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이 머리에서 상상만 하던 것을 이미지화 시키면서 조금 더 강렬한 이미지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을 한 것처럼 심문을 한 후 사람들을 그림자가 아닌 빛에 놓는 것도 특별한 상황입니다. 그림자 속에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으로 아직 증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명확한 구분이 가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이 증언을 마치고 나면, 그의 증언은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 다시 밝은 곳으로 옮겨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색이 화려한 영화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제대로 통용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 이상 흑백의 명확한 대비만으로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흑백 영화의 시대이던 당시에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흑과 백의 명확한 대립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들의 캐릭터의 극명함 역시 영화와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입니다. [덤불 속]의 경우 아무래도 단편 소설이다보니, 단편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증언이 상세하게 이야기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언을 할 뿐, 그것이 캐릭터의 평소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독자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캐릭터를 연기시키고 어디까지가 이 캐릭터의 영역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그들의 몸짓이라던가 얼굴 표정 등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이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할 여지를 더 많이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이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독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영화와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이것과 이어서 영화가 소설에 비해서 훨씬 더 친절하다는 것 역시 영화가 소설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요소입니다. 소설의 경우 다소 딱딱한 문체와 함께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둠으로 더 많은 것을 독자에게 넘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비록 소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불친절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영화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열 수 있는 여지는 누가 범인일까를 맞추는데 오롯이 맞추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모두 감독의 손을 통해서 넘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관객들은 조금 더 친절하게 영화를 즐길 수가 있는 겁니다.
또한 영화에서 말을 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극명한 것 역시 특징입니다. 영화 [라쇼몽]은 소설 [덤불 속]이 말을 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 중에서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말은 모두 다를 수 있고, 그들의 입장에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로 변할 수가 있다가 바로 영화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영화는 사람들의 증언을 재현을 함으로 인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 사건을 더욱 더 추리를 하게 만들고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감독의 놀이에서 놀며 감독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본인의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감독이 깔아놓은,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다와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와 소설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욕망의 이기주의 탓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자신의 영광이나 더 이상 욕을 보고 싶지 않다는 그러한 욕망 탓에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방식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행동이지만 그러한 행동은 인간 모두들이 하는 행동이기에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고 어쩌면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에 모든 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은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영화 [라쇼몽]을 즐기는 이유는 과연 영화 속에서 누가 범인일까?를 찾는 것도 어쩌면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과연 진실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과연 진실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디에도 진실이 없기에 모든 것이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라쇼몽]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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