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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노]를 보고

권정선재 2010. 11. 25. 13:11

새로운 사랑에 이끌림

 

 

- 영화 [피아노] -

 

 

 

 

 

맨 처음, 말을 하지 못 하지만 속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영화 혹시나 [블랙]과 같은 류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 어느 날 말도 배우게 되고, 사회에 천천히 적응을 하게 되는 그러한 이야기로.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나의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그녀는 말을 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에 의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헬렌 켈러와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훌륭한 집안을 가지고 있으며, 아이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여성이었다. 단지, 여자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라고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가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은 아닌데, 자신의 딸과는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녀의 딸은 주인공이 하는 수화를 누군가에게 전달을 해주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데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피아노가 있다. 누군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녀는 피아노라는 물체를 통해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피아노는 그녀의 입이며 목소리다. 그녀는 피아노가 있기에 굳이 말을 할 필요성을 가지지 못하며, 피아노가 있기에 누군가와 이미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이라는 것은 그저 부가적인 부분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 남편이 있는 곳을 향해 갔을 때, 피아노를 가지고 가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떤 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두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남편이라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내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더 없이 필요한 물건이 바로 피아노였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그녀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오던 그녀에게 남편이 있는 곳은 너무나도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일단 그녀가 가지고 간 피아노는 너무나도 무겁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지고 오지도 못 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경계하고 어딘지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딱히 그 시선을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는 것을 그저 불편하고, 낯설게 느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름대로 적응을 하려는 새로운 삶에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이 나타난다. 그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을 하는, 원주민과 어울려 지내는 사내의 등장이다.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미개한 사내는 피아노를 가지고 싶다며, 그녀의 남편에게 많은 땅을 제안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 땅이라는 것에 눈이 혹해서, 피아노도 흔쾌히 줄뿐더러, 자신의 아내를 통해서 피아노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한 여인의 치명적인 사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사랑은 그저 역겹거나 불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너무나도 아름답고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는 사랑이다.

 

1993년도 영화이니 만큼 오늘날의 감성과 많이 달라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는 오늘날의 영화들과 비교를 해보았을 때도 그렇게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여인이 새로운 상황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반려자가 아닌,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어떤 여인이 그런 매력적인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저 단조로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떤 매력적인 사내가 걸어 들어온다면, 십중팔구 그 매력이 넘어가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일탈이며 짜릿한 소통이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영화에서도 주로 보이고 있다. 가장 최근에 개봉을 한 영화로는 [페스티발]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심혜진은 딸을 키우는 미망인으로 동네에서 가장 고상한 척을 하는 여인이지만, 철물점 성동일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는 SM이라는 것에 빠지게 되며,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탈을 꿈꾸기는 하지만 그녀의 일탈은 무조건 손가락질을 하고 싶다기 보다는 안쓰러운 부분이고 안아주고 싶은 부분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녀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여주인공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이유도 위와 같은 것이다.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을 한 적 없고,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그녀에게는 감옥보다도 더 한 일이었으며, 그녀는 스스로 그 평범한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많은 일탈을 꿈꾸고 있었는 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말도 하지 못 하는 그녀가 감히 그러한 것을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도 예측하지 못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도와주거나, 그녀와 함께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하나의 제대로 된,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와줘야 할, 그저 그녀의 주위에 붙어 있어서 시중을 들어줘야 하는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장애인이라는, 말을 못 하는 부잣집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에도 충분히 적용이 될 수 있는 문제다. 스스로 일어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는 등의 행위로 사회적 약자들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 하게 하는 모습과도 어렴풋이 닿아있는 느낌이다.

물론 그녀 역시도 그것이 어떠한 문제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자신이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사내가 그녀를 유혹을 하면서, 그제야 겨우 그녀는 자신이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욕망이라는 것이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고,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딸이라는 인물에 시선이 저절로 가게 된다. 그녀는 주인공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며, 주인공의 수화를 직접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하을 하고 있다. 그녀로 인해서 주인공은 더 이상 사람들과 소외를 받지 않고 어울릴 수 있으며,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공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소녀가 알고 있는 데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돌아가거나 변환이 되어서 전달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말을 하고자 하는 순수한 내용 그대로 남들에게 전달이 되지 못 하는, 일종의 방해물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주인공에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서 편지를 가져다주라고 할 때도, 그녀는 그것을 주인공과 바람을 피우는 사내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아버지에게 가져다주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손가락이 잘리게 만든다.

그 과정을 보면서 절규를 하는 소녀는 어린 소녀의 모습 그대로지만, 어쩌면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양아버지에게 진실을 알려주면 자신의 어머니가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임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자신이 생각을 하는 데로 행동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소녀에 대해서 공포심이 들었다. 만약 이 영화의 장르가 드라마와 멜로가 아니었다면, [피아노]는 호러물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어미를 타락시키는 딸, 그녀를 관찰하는 딸의 모습은 여느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들보다도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소녀이기에 가장 빛이 나지만,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느낌이 있다. 그녀는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의 모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른들과 어울려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순수함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고, 그 순수함을 잃어버린 탓에, 그녀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변해 버렸다.

소녀는 자신의 행동이 잔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그녀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을 어머니가 잃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심술궂게 행동을 하며, 어머니가 조금 더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을 한다면 소녀의 행동은 잔인한 행동이 아닌, 그저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하는 어린 소녀의 치기 어린 질투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질투가 불러온 상황은 너무나도 잔인한 상황이며, 어린 소녀가 감히 상상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어른의 길로 나가서게 된다. 잘려진 손가락을 들고 엄마의 정부에게 달려가는 소녀는, 만나지 말래요! 라고 악을 쓰면서 모든 울분을 사내에게 토해낸다. 결국 자신에게 화가 난 상황이지만, 소녀는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 하며, 그저 모든 것을 받아줄,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을 나누는 사내에게 진짜 아버지의 감정을 느끼며 모든 것을 토로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딸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의 남편이다. 그는 모든 영화에 나오는,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을 하는 영국 신사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을 배려를 하고 있지만 상상력이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는, 그러한 사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피아노를 가지고 오지 못 하자, 집에 있는 탁자에 피아노 건반을 세기고, 피아노 소리가 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절대로 그러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 한다. 그의 눈에 자신의 아내는 미친 사람이고, 남의 물건에 흠집을 내는 기이한 사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아내를 그저 의무적으로 곁에 두고 있었더라면, 자신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기보다는, 아내를 내쫓고 온 천하에 그 소문을 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영국 신사라는 점을 들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다시 친정으로 보내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의 손가락만을 잘라서 겁을 줄 뿐이고, 다시 사내를 만나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누워서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안타까운 사랑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제대로 손을 내밀지도 못 하는 한심한 그는, 결국 자르고 싶은 것은 아내의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일 지도 몰랐다.

그는 그의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감히 이야기를 할 용기도 내지 못 한다. 자신의 아내는 그렇게 사랑을 하기에 말을 할 줄도 모르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사랑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우지 못 한, 그저 평범한 영국 신사일 뿐이다.

이 평범한 영국 신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큰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상 그는 나아가지 못한다. 주인공에게 어떠한 미래도 보여주지 못하며, 어떠한 믿음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집착일 뿐이며,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 집착은 자신을 타락시킴은 물론,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타락시킬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아내를 다시 한 번 자신의 곁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부정을 저지르는 사내는 그녀의 잍탈을 꿈꾸게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이다. 현실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분명히 잘못된 행위이다. 이미 가정이 있는 집의 사내를 유혹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가진 그는 영화에 있어서 전혀 그러한 것이 느껴지지 않게 보인다.

그가 저지르고 있는 부정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부정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것이 부정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주인공을 사랑해서이며, 오히려 주인공의 남편보다도 더욱 그녀를 배려하며, 그녀의 곁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마음은 영화에서 나오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순수하며 순결한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주인공은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비록 부정을 저지르는 사내가 원하는 결말은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과 상관 없게, 그의 선택으로 인해서 주인공은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불륜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이야기다. 내가 지금 이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면?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소울 메이트라고도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은 결혼과 무관한 일이다.

사회적인 서약이 아닌, 진짜 마음으로 이끌리는 사람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그 마음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늘 겁을 내면서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고, 지금 자신이 만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슬픔은 바로 그러한 데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멍청한 현대인들의 모습과 주인공은 닿아 있다. 그녀가 만일 정말로 사랑을 원했다면, 정말로 정부를 사랑한 것이라면 조금 더 적극적이여야 했던 것이다. 울부짖으면서 사내에게 손가락을 잘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도끼를 들고 남편의 머리를 내리 찍었어야 했다.

만일 이 영화가 1993년도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은 스스로 남편의 머리에 도끼를 박아 넣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소통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될 것이다.

 

영화의 소재와는 상관 없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화가 [피아노]. 그 소재에 있어서는 절대 좋을 수 없는 이 영화는, 아직까지도 명작이라고 이야기가 되고 있으며,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영화다.

우리들이 이 영화를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해서 환희를 내지르는, 우리의 모습이 영화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기에 우리는 더욱더 환호를 내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마치 한 편의 음악회를 본 것처럼 온 몸에는 희망으로 가득 찬 전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잔인하다. 그녀가 벌이는 일탈은 말 그대로 일탈일 뿐이며, 그녀가 벌이는 사랑은 마치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름답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무뚝뚝한 여인만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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