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볼펜
그의 손에 쥐어있는 볼펜은 싸구려였다. 한 지하철역에 있는 천 원이 가치가 있다는 곳에서 산, 12개에 천 원 밖에 하지 않는 그의 볼펜은 진짜로 싸구려였다. 하지만 그의 볼펜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싸구려가 아니었다. 싸구려라고 하기에는 꽤나 고급스럽기도 한,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에게는 웃음을 주고, 눈물을 주곤 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탄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싸구려 볼펜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정말로 싸구려가 아닌지 명백하게 확인을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의 싸구려 볼펜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은, 글을 직접 쓴 그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오랜 여자친구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 그들은 싸구려 볼펜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늘 좌절을 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매번 글을 쓰기 시작하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싸구려 볼펜에서 나오는 그의 글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싸구려 볼펜으로 글을 쓰는 그 역시도 자신의 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과연 누가 그의 소설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의 소설을 그토록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그의 소설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소설을 좋아해주는 그녀는, 바로 싸구려 볼펜을 파는 한 지하철 역에 있는 천 원이 가치가 있다는 곳에서 12개에 천 원 밖에 하지 않는 볼펜을 예쁘게 포장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주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여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개그 프로그램 같은 곳에 나오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박수와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외모에 가까운 말 그대로 싸구려 볼펜을 팔 것 같이 생긴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명백히 싸구려 볼펜과는 다른 여인이었다. 싸구려 볼펜에서 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조악하고 조잡하며, 추악하고 추잡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오밀조밀하기까지 한 것이 예ㅃ 보이기도 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너스레를 떨면서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와 마주치는 사람 중에 그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볼펜을 자주 사시네요.”
“아, 네.”
“진짜로 자주 사시네. 얼마 전에도 사가셨잖아요. 이게 가격은 저렴해도, 의외로 오래 쓸 수 있는 볼펜이거든요.”
“다 쓰게 되더군요.”
“저기 혹시, 글을 쓰시나요?”
“아, 네.”
거기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값을 치르고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정말로 사람다운 상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당하고 말았다.
“우와.”
“왜요?”
“신기해서요.”
“신기하다고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어렵다고요?”
“그럼요.”
그 동안 정말로 많은 글을 썼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단 한 번도 글을 쓰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손을 움직이면서 부지런히 글자들을 만들고, 그 글자들은 알아서 문장을 만들었다. 그것이 재미가 있건, 아니면 재미가 없건 글은 이미 만들어져 있ᄋᅠᆻ다.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누구도 타박할 수 없는 글이었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읽어볼 수 있나요?”
“아니오.”
“왜요?”
“책을 내지 못 했으니까요.”
“그래도 쓰신 게 있지 않나요?”
“그렇기야 하죠.”
“읽고 싶어요.”
“읽고 싶다라.”
“다로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가지고 있죠.”
“그러니까요. 보고 싶어요.”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예쁘게 포장까지 한 싸구려 볼펜을 건넸다. 그녀의 손 끝에 담긴 봉투는 너무나도 예뻤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그의 경제사정상 어쩔 수 없이 살 수 밖에 없는 싸구려 볼펜이었다.
“안녕히 가시고, 다음에 오실 때는 꼭 보여주셔야 해요.”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그녀의 손에서 낚아채듯 봉투를 받아서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내 글을 읽고 싶다. 이런 사람을 만나본 것이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내가 먼저 글을 보여주기 전에 나의 글을 먼저 읽어보고 싶다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었다. 나의 소설을 읽고 싶다고 했다.
“신기하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마구 쿵쾅거렸다. 누군가에게 소설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내가 가지고 있는 속내를 한꺼풀씩 벗겨내지 않으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설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재미있게 나의 소설을 읽어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타박을 하지도 않았고, 이 부분이 잘못이 되었네, 여기서 대사가 이상하네 따위의 소리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소설을 진심으로 읽어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독자가 되어주었다.
“재밌어요.”
“정말로?”
“네.”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그녀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내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그 동안 한 짓이, 써왔던 글들이 모두 헛고생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건 더 없어요?”
“당연히 있지.”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하면서, 혹시나 해서 가방에 억지로 쑤셔넣은 다른 원고들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신선했다. 나의 소설도 저런 반응을 불러올 수 있는 거구나 싶은 느낌에 감회가 색달랐다.
그녀가 소설을 읽는 동안, 가게의 일을 보는 것은 나였다. 값이 옳고 그르고는 크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물건 값을 내는 사람들도 그것이 정확한 가격인지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녀 역시도 크게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바쁘게 일을 하다보니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대단하세요.”
“뭐가?”
“소설이.”
“뭐가 대단해?”
“정말 재미있어요. 나 책 많이 읽는데, 이런 건 처음이야.”
“거짓말.”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아니 나도 제대로 만족을 하지 못 하는 글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정말 좋아.”
“내 소설들이?”
“네.”
“실패작들이야.”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책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다 실패작인가?”
“그럼?”
“내가 읽어주잖아요. 그리고 아저씨가 쓴 거고, 그렇게만 되더라도 소설로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아니야.”
“어째서요?”
“결과가 없잖아.”
“에, 낭만 없어.”
“낭만?”
“네.”
“여기서 무슨 낭만 타령?”
“그래도 예술가잖아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녀를 타박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정말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 소설을 읽고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혹시 그녀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거의 쓰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돈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어째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먹는 거야 어떻게든 되지 않아요?”
“안 돼.”
“하지만 그래도 그 소설들은 좋은데?”
“책내주게?”
“그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아요.”
“내 인생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죠.”
“그러면 신경 쓰지 마.”
“좋아요.”
“신경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그 글들이 너무나도 좋다고요. 내 마음을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냥 써요. 계속 써요. 내가 읽어줄 거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한 이후에는 나의 글쓰기의 목적이 바뀌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혹은 신춘문예라는 곳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쓰던 글이, 오직 그녀를 읽게 해주기 위해서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밤을 샜고,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열심히 볼펜을 움직였다.
정말 좋다.
진짜 좋아요.
이거 진짜 공감이 가네.
어떡해. 진짜 눈물이 안 멈춰.
진짜 이렇게 감동적인 건 처음이야.
진짜라는 말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해주는 그녀의 감탄사는 나를 기쁘게 하고 있었고, 내게 힘을 주고 있었다. 저렇게 나의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새로운 세상의 열림이었다. 내 소설이 혹 재미있다는 사람은 있었지만 저토록 느껴주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내 글이 좋아?”
“네.”
그녀는 늘 똑같은 질문에, 늘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했었다.
“오늘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는데, 그냥 이상해.”
분홍색 팬티만 입은 채 냉장고로 향하는 애인의 몸매는 아주 아름다웠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커다란 히프는 말 그대로 콜라병 몸매의 표본이었다. 게다가 미끈하게 쭉 뻗은 다리는 그녀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무엇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런 그녀의 외모만 보더라도 가슴이 설렜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저기 말이야.”
“왜?”
가슴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와는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많은 추억을 쌓았다.
“뭐야? 싱겁기는.”
“옷 좀 입으면 안 돼?”
“옷?”
“민망해서.”
“민망하다고?”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분 좋게 웃는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 가득한, 조소의 웃음이었다.
“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벗기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 거니?”
“이제는 달라졌잖아.”
“이상해. 오늘도 섹스 하나도 열심히 안 했어.”
“열심히 했어.”
“아니.”
그녀의 말에 너무나도 민망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와 섹스에는 열광하지 않았다. 그녀와 섹스를 나누는 도중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은 그녀가 아니라 나의 소설을 읽어주던 그녀였다. 애인은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이 되지 못했다.
“그나저나 요즘에는 소설 안 쓰니?”
“아니, 왜?”
“안 보여주길래.”
“아, 내가 그랬나?”
“왜? 별로야? 예전만큼 안 나오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궁색해졌는데, 순간 그녀의 거뭇한 겨드랑이가 시선에 잡혔다. 나와 만나는데 나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도 더 이상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거였다.
“겨드랑이 뭐야?”
“어?”
자신의 겨드랑이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너무 한거 아니야?”
“아니, 일부러 기르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몰랐어.”
얼굴이 붉어지며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그녀를 보는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나았다.
“나보고 섹스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 전에, 너는 애인으로 제대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부터 점검하는 건 어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고?”
“됐어. 됐다고.”
애인은 황급히 옷을 입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한 번 나를 강하게 쏘아보더니 식식 거리면서 뛰쳐가는 그녀를 나는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삶에서 그녀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소설을 쓰는 건 어때요?”
“뭐가?”
“기분이랄까?”
“똑같지 뭐.”
“뭐랑 똑같은데요?”
“지금이랑.”
“지금이랑?”
“우리 이야기 하고 있잖아.”
“그런데요?”
“딱 이런 기분이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요?”
“어. 누군가에게 수다를 떠는 기분.”
“편하겠다.”
“나는 편해.”
“그럼 나도 글을 써볼까?”
“네가?”
“네. 못 쓸 것 같아요?”
“모르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모두 다르니까.”
“잘 쓸 것 같다는 소리는 안 하네.”
“안 봤으니까.”
“빈 소리라도.”
“나는 그런 거 못 해.”
“야박하다.”
“뭐가 야박해?”
“아니, 빈말한다고 돈 드나?그런 걸 못 해줘요?”
“돈을 줘도 못 해.”
“고집 있으시네?”
“너도 좀 있네.”
“소재는 어디에서 구해요?”
“그냥 여기저기?”
“그런 애매한 답이 어디 있어요?”
“정말이야.”
“정말로요?”
“이렇게 둘러보다보면 캐치가 되는 거지.”
“어떻게?”
“흐음, 어떻게라. 그러니까 저기 보이지? 저기 두 사람.”
“응. 그런데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풀어가는 거야.”
“그냥요?”
“그렇지.”
“어떻게요?”
“두 사람을 운명인 것처럼 쓰는 거지. 두 사람은 여기서 처음 보지만 끌리는 막 그런 거?”
“유치해.”
“그게 좋은 거야.”
“유치한 게 좋은 거라고요?”
“오히려 너무 어렵게 쓰는 것 보다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런가요?”
시계를 보아하니 벌써 그녀와 머문지 몇 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나는 이제 갈게.”
“벌써요?”
“시간을 봐.”
“아 오래 되었네.”
“그렇지?”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내가 그녀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과 같은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 역시도 나와 보낸 시간이 끝나는 것에는 아쉬워 화는 것 같았다.
“저기, 바빠요.”
“왜?”
“아니면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아직 퇴근 전 아닌가?”
“잠시 밥 먹으러 갈 시간은 괜찮아요. 어때요?”
“돈 없는데.”
“내가 있어.”
전이라면,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절대로 허락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버린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 가서도 밥을 먹는 것이 서서히 눈치가 보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직업도 가지지 못한 아들이라는 존재는 어디를 가던 부끄러운 존재이고, 스스로가 작아보이는 존재였다.
“같이 가는 거죠?”
“그래.”
“처음이었네.”
“처음이었어요.”
식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고,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잠자리로 이어졌다. 그녀에 삽입을 할 때 좀 뻑뻑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아직 그녀가 처녀라서 그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침대 시트에는 선명하게 붉은 색이 남겨져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하긴.”
“찝찝했죠?”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처녀성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사과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 할 문제였다. 내가 망친 것은 단순히 그녀의 처녀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집에 안 들어가도 되나?”
“뭐, 너무 늦었잖아요.”
“그래.”
“저기 부탁이 있어요.”
“지금 소설을 쓰면 안 되나요?”
“지금?”
“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지금 소설을 써라. 처녀애와 막 잠을 자고 난 직후에 당연히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녀를 곁에 두고 그런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내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무감각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무개념은 아니었다.
“지금은 좀 그렇지 않아?”
“괜찮아요. 아프지도 않아.”
분명히 아랫도리가 뻐근한 것이 꽤나 아플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싸구려 볼펜을 꺼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빨리 쓰네.”
그녀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떄로 신음을 흘리기도 하면서 약간의 글을 마쳤다. 그녀는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에, 나 역시도 조심스럽게 수첩을 건넸다.
“별로일 거야.”
“괜찮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메모를 받았다.
-삶이란 건 중요하지 않잖아? 이미 너무나도 늦게 알아버린 거니까.
-당신만 있다면 나도 죽음을 택해도 좋아.
도로시의 말에 레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그녀에게까지 고통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보다는, 마지막까지도 멜로의 주인공으로 남고 싶었기에, 그는 가만히 도로시를 안은 채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영원히, 나를 잊고 살기를 바라.
-어떻게 당신을 잊어? 사랑한 사람인데. 영원히 사랑했던 사람인데.
-했던, 그 말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 거야.
레이는 천천히 도로시를 놓았다. 그리고 깊은 어둠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습기가 가득 찬 어둠의 한 가운데 붉은 빛이 쏟아지고 있ᄋᅠᆻ다. 레이는 그 곳을 향해 깊숙이 검을 찔러넣었다.
“판타지에요?”
“그런 거정하지 않아.”
“그럼?”
“그냥 쓰는 거지.”
“그냥 쓴다고?”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쓰는 거야.”
“아무 목적도 없다고요?”
“목적이 없다기 보다는. 그냥.”
당신을 위해서 글을 쓰는 거라고 말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기뻐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변하곤 한다. 그리고 내 글에 자신이 나온다는 것을 경멸하고, 치를 떠는 순간도 오곤 한다. 그녀에게는 그런 순간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쓰고 싶은 것들 쓰는 거야.”
“낭만적이야.”
“낭만적일 거 하나 없어.”
하지만 그녀의 그 말은 너무나도 설렜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힘을 주는 단어였다.
“헤어지자.”
“그래.”
“이유도 안 묻니?”
“이유가 뭐니?”
애인은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너라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보일 수 있는 게 없어.”
“보일 수 있는 게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따위 글을 도대체 언제까지 쓸 거니?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니?”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하, 어머니? 아버님?”
“아니.”
“아니라고?”
“여자가 있어.”
“그런 거구나.”
애인은 자연스럽게 입에 담배를 물었다. 한동안 피지 않던 담배였는데, 그녀는 참 맛있게 피고 있었다. 애인은 다소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가만히 담배만 피고 커피만 마시고를 한참 반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그 여자애가 좋니?”
“좋아.”
“나보다?”
“아직은 모르겠어.”
“그런데도 안 잡아?”
“싫다며.”
“싫으면 끝이니?”
“싫다는데 어떻게 하니?”
애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애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부터 나를 감싸주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었고, 그녀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마음이 떠난 거구나.”
“그런 가보네.”
“좋겠네.”
애인의 얼굴에는 서운하다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아하니, 내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내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다시 잘 사귀어 볼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마음에 없는데,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몸을 섞을 수 없었다.
“저기 그런데 나 할 말이 있어.”
“뭔데?”
“아이가 생겼어.”
“뭐?”
“뱃속에 아기가 생겼다고.”
“누구 앤데?”
“누구 앤지 몰라서 묻니?”
“알고 묻는 거야.”
콘돔의 이질감에 단 한 번도 콘돔을 끼고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사실 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 헤어지는 판에 임신 했다 말을 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는가? 임신을 하게 되면 헤어지려는 마음을 가지더라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어떻게 지금에서 헤어지자 하지?
“지울 거야?”
“낳을 거야.”
“어떻게?”
“내 아이니까.”
“내 아이라며.”
“당신은 신경 쓰지도 않을 거잖아.”
“그러네.”
“잔인하다.”
애인은 나의 커피잔에 자신의 담배꽁초를 깊이 집어넣었다.
“뭐하는 짓이야?”
“너 같은 인간은 커피 마실 자격도 없어.”
“너 같은 여자는 아이 가질 자격도 없어.”
“나 혼자 아이를 가진 거니? 그런 거야?”
“너보고 아이를 가져달라고 말을 한 적 없어.”
“됐어.”
애인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과 이야기를 할 부분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이 뭐라고 하건 나는 아이를 낳을 거야.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니까 말이야.”
“그 아이의 씨가 나라면, 내 아이잖아.”
“당신에게 책임지라는 소리 안 할 거야.”
애인은 계속 식식 거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머리에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나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는 나의 소설을 읽어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런데 나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데,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녀의 담배꽁초가 길게 담겨 있는 커피는 더욱 쌉싸래한 맛이 느껴졌다.
“아이를 가졌대요?”
“어.”
“큰일이네.”
“큰일이지.”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같은 여자라고 그녀도 임신이라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가요.”
“어디를?”
“그 분한테죠.”
“왜?”
“여자는 임신하면 마음이 허해요.”
“잘 아는 것 같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가 막 건네준 원고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이 같아.”
“뭐가?”
“이 원고가.”
“그럼 나는?”
“삼신할머니 같은, 글신 할아버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돌아가요.”
그녀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어차피 내 걱정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자기 걱정하고 있으면서.”
“그런 거 아니야.”
“나 바보 아니에요.”
“누가 바보라고 했어?”
“좋은 사람이에요.”
“누가?”
“그 여자분.”
“어떻게 알아?”
“당신이 부담을 느낄 걸 알고 책임지라는 소리 안 한 거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말캉한 혀를 입에 집어넣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상황에 정지해있었다. 곧 그녀는 몸을 뗐다.
“뭘 한 거야?”
“이 느낌 잊지 말아요.”
“잊지 말고?”
“써줘요.”
“뭘?”
“소설.”
그녀는 내 앞에서 소설을 잘게 찢었다. 더 이상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제 가요. 지금까지의 모든 건 잊고.”
“못 잊어.”
“잊어야 해.”
그녀의 눈에는 가만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를 잊어야 해.”
“서운하지 않을까?”
“대신 글로 써줘야 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서 멀어졌다.
“당신 오늘 시장 좀 대신 볼 수 있죠?”
“그럼.”
“애도 좀 부탁해.”
“내가 다 할게.”
“미안해.”
“아니야.”
“오늘 늦게 퇴근할 것 같아요.”
“알았어.”
바쁘게 출근하는 아내의 등을 보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는 다행히 아내가 유치원에 맡기고 간다고 했다. 전업주부 남편이라는 말은 나와 상관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전업주부 남편이 된 이후 그 말은 너무나도 가까운 단어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싸구려 볼펜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내 서랍장에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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