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Blue - 비 오는 날에]
(평범한 가정집, 한쪽에 흔들의자가 있다.)
( 빗소리가 나고, 유리가 젖은 우산을 들고 들어선다. 전화를 꺼내서 열심히 싸우는 시늉을 하더니 전화기를 집어 던진다.)
유리 : 하여간 마음에 드는 거 하나도 없어. 나오지 않을 거면 진작 말을 하던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사람을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해놓고서는, 마음에 안 들어. 이걸 헤어지던지 해야지. 어유, 짜증나. (외투를 벗는다.) 그나저나 비는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네. (창밖을 바라보는 시늉을 한다.) 이러다가 서울 시내 다 물에 잠기겠다. 노아의 방주도 아니고, 언제나 그치려나? (리모컨을 들어 TV를 튼다.)
앵커 : (춤이나 우스운 동작을 하며) 전국적으로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 300mm이상, 부산과 강원 등에 250mm등을 비롯 전국적으로 최소 100mm이상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현재 남쪽에서 올라오는 온난 기후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랭 기후의 부딪힘으로, 이번주 내내 비가 내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호우로 인한 피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리 : 아 재미 없어. (TV를 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도 안 하는 거야? (다시 집어드는 순간 전화기가 울린다.) 여보세요?
모친 : 뭔 일이래? 평소에는 전화 한참이나 울려서 받더니.
유리 : 아 무슨 일이야?
모친 : 아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 되어 걸었어.
유리 : 비가 오는데 걱정할 거 뭐가 있어? (의자에 앉는다.) 엄마 있는 데는 비 많이 안 와? 아까 뉴스 보니까 경상도 쪽도 비 많이 온다고 하던데. 거기는 늘 비가 오면 피해 입고 그러잖아.
모친 : 여기야 뭐 괜찮지만, 너 혼자 있는데 비가 이리 와서 괜찮을까 모르겠다. 밥은 먹었어?
유리 : 배도 안 고픈데 뭐.
모친 :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밥을 안 먹었어? 다이어트도 좋지만, 그래도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사는 거야.
유리 : 됐어 커피 마시면 돼. (부엌으로 가서 찬장서 원두를 꺼낸다.) 그리고 요즘 사람은 밥 먹고 안 살아. 그리고 요즘 뚱뚱한 여자 누가 좋아한다고.
모친 : 누가 너 뚱뚱하다고 그러냐?
유리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원래 저녁 안 먹어.
모친 : 너 속도 안 좋은 게 밥도 안 먹어서 어째.
유리 : 엄마는 잔소리 밖에 할 거 없지? 아무튼 늦었어. 비 오더라도 나는 별 일 없으니까 엄마나 조심하셔. 거기는 비 오면 진짜로 길 뚝 끊기는 곳이잖아요.
모친 : 지금 텔레비전을 보니까 서울도 길 끊기기는 마찬가지라 하던데, 아무튼 조심해. 이런 날 오히려 감기 걸리니까 옷 얇게 입지 말고.
유리 : 알았어. (전화를 끊고 글라인더로 원두를 간다.) 아 향 좋다. (순간 울리는 벨소리) 누구 올 사람이 없는데? (현관 쪽으로 가서 문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한다.) 택배인가? 시킨 것도 없는데? 누구세요?
인하 : 문 열어주라. 나 드디어 돌아왔어. 1년 기다려줘서 고마워. 네 얼굴보고 할 이야기 많으니까 문을 좀 열어줘.
유리 : 이 사람 뭐야? 저기요. 누구신데요? 1년을 기다려요?
인하 : 어? 누구세요? 원래 여기 제 여자친구가 살던 곳인데?
유리 : 아, 저 이곳에 이사 온지 꽤 되었는데. 그 사람 이사를 간 지 반 년도 넘었어요. 전화를 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인하 : 저기 잠시만 문을 열어주실래요? 물어볼 일이 좀 있어서요. 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요.
유리 : 흐음, (잠시 망설이다 안전 고리를 걸고 문을 연다.) 내 무슨 일이시죠?
인하 : 혹시 이곳에 살던 사람이 어디에 갔는지 아시나요?
유리 : 이사가면서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고 가는 사람이 있나요?
인하 : 아무 것도 모르세요?
유리 : (의심스러운 눈으로 인하를 위 아래로 바라보며) 아니 도대체 누구시기에 이전에 사시던 분을 찾는 거죠?
인하 : 그 사람의 애인입니다.
유리 : 애인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이사를 가면서 이사 들어오는 사람에게 어디로 이사를 간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저는 모르니까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세요.
인하 : 저기요. 잠시만요. (문을 잡는다.) 진짜 그 사람의 애인이 맞았고요. 그 사람과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잠시 집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유리 : 집에는 왜요? 이상하시네요. 그런 사람 없다는데 왜 이렇게 구시는 거예요? 연인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방법을 찾으실 것 같은데요? 이런 시간에 남의 집에 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인하 :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그 날도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비가 많이 오면 만나기로 했습니다.
유리 : 비가 많이 오는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인하 : 꼭 오늘일 것 같습니다.
유리 : 아무리 그래도 좀 그러네요. 날씨도 이런데 외간 사람을 집에 들이기는 그렇죠.
인하 :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저를 한 번 보시라고요. 제가 무슨 음흉한 짓이라도 할 것 같이 보이시나요?
유리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인하 : 딱 두 시간만, 두 시간만 있다가 가겠습니다.
유리 : 뭐, 딱 두 시간이에요. 비도 많이 오고, 아무튼 그러니까 잠시 들어와 계시다가 빗줄기가 살짝 가늘어지면 바로 가세요.
인하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리 : (문을 닫았다가 안전 고리를 풀고 다시 연다.) 그나저나 비도 많이 오는데 이런 날씨에 오셨네요. 날씨라도 조금 좋을 때 찾으러 오시지. 그러면 조금 더 편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인하 : 이런 날씨에 떠났거든요. (쭈뼛거리며 집으로 들어온다.) 그나저나 집 되게 깔끔하시네요.
유리 : 뭘 보고 그러세요. 앉으시죠. 뭐 드실래요?
인하 : 커피 드시고 있으셨나봐요?
유리 : 네, 커피 드려요?
인하 : 주시면 감사하죠.
유리 : (원두를 다시 직접 갈기 시작한다.) 어떻게 드려요? 설탕? 우유?
인하 : 그냥 우유만 조금 넣어주세요.
유리 : (커피를 만든다.)
인하 :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유리 : (커피를 건네며) 이름은 왜요?
인하 : 그냥 궁금해서요. 고마워요. (커피를 마신다.) 우와 되게 좋네요. 한 두 번 만들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요.
유리 : (대꾸도 하지 않고 흔들의자에 앉는다.)
인하 :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유리 : 저기요. 집에서 그 분이 오실 거를 기다리는 것은 괜찮지만, 굳이 우리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인하 : 저는 류인하입니다.
유리 : (이상한 눈으로 류하를 바라본다.)
인하 : 그쪽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유리 : 아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인하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어차피 만나게 된 거 이름 알아서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리 : (때마침 천둥이 치고, 깜짝 놀란 후 살짝 인하의 눈치를 본다.) 어떻게 이런 날씨에 올 생각을 했어요?
인하 : 이상하게 이런 날이라서 더 그 사람이 올 것 같더라고요. 사실 오늘이 같은 날짜는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래서 왔어요.
유리 : 이상한 사람이네요.
인하 : 네, 저는 이상한 사람이죠.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살핀다.) 책도 되게 많네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유리 : 네,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커피 잔을 내려두고 가만히 인하의 행동을 살핀다.)
인하 : 저기 책 좀 살펴도 되요?
유리 : 네.
인하 : (책을 하나 꺼내서 차근차근 읽기 시작한다.)
유리 : (다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인하를 살핀다.)
인하 : (책을 덮고, 다른 책을 꺼내서 차근차근 읽기 시작한다.)
유리 :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커피를 만든다.)
인하 : (또 다른 책을 읽는다.)
유리 : (커피를 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인하 : (책을 다시 꽂고) 저기요.
유리 : 네?
인하 : 조용한 게 어색한데, 텔레비전이라도 보면 안 될까요?
유리 :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앵커 : (춤을 추거나 우스운 동작을 하며) 비는 여전히 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일부 통하던 길들 역시 침수로 인해서 통행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비 피해가 최소가 되도록 공무원 비상소집을 명령했습니다.
유리 : 아까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나저나 이런 날씨에, 길까지 끊기고 있다는데 그 분이 올 것 같아요?
인하 : 네. 올 것 같습니다.
유리 : (리모컨을 다시 누른다.)
앵커 : (가발을 쓰고 코미디언의 흉내를 낸다.)
인하 : 뉴스 보고 있었는데.
유리 : 재미도 없잖아요. 아까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뭘 봐요.
인하 : 저는 처음인데요?
유리 : (살짝 인하를 노려보더니 다시 리모컨을 누른다.)
앵커 : (가발을 벗고, 춤을 추거나 우스운 동작을 한다.) 부천과 인천에서는 호우로 인해서 수재민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모든 선박은 출항이 금지되어 있고,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역시 일시 폐쇄가 되었습니다.
유리 : 저기 그쪽은 어디에 살아요?
인하 : 이름이 뭔지 알려주면요.
유리 : 됐어요.
인하 : (유리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삿포로에서 왔어요.
유리 : (놀란 눈으로 인하를 바라본다.) 삿포로요? 한국사람 아니에요?
인하 : 한국사람 맞아요. 그 사람에게 떠나서 답을 얻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혼자 떠났어요.
유리 : 에이, 별 거 아니네. (시선을 다시 앵커에게로 맞춘다.)
인하 : 저는 어디에서 왔는지 말을 했으니까, 그쪽도 이름을 말해줘요.
유리 : 내가 언제 말을 해주라고 했어요? 자기가 혼자서 말을 한 거면서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인하 : 그래도 사람이 얼굴을 봤는데 이름은 알아야지. 내가 자꾸 그쪽이라고 하면 좋아요? 그쪽도 이름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니죠.
유리 : 그쪽하고 오래 있을 생각이 없으니까 굳이 퉁성명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인하 : 그쪽이 아니라 류인하 씨.
유리 : 아무튼요. 관심 없어요. (빗소리가 더 굵어진다.) 마음만 같으면 그냥 나가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비가 자꾸만 굵어지네요.
인하 : 이거 봐요. 비가 계속 올 것 같다고요. 이 상황에서 서로 어색하게 있는 거 별로지 않아요? 나는 싫은대. 네? 알려줘요. 이름 알려준다고 해서 손해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 비 오는 거 봐. 한참이나 같이 있겠네.
유리 : 평소에 말 많다는 말 안 들어요?
인하 : 들어요. 나에 대해서 관심이 막 생기죠?
유리 : 뭐래?
인하 : 아무튼 이런 것도 인연이잖아요.
유리 : 이름 알려주면 입 다물 거예요? 나 원래 이 시간에 책 읽으려고 했다고요.
인하 : 오케이. 입 꾹 다물게요.
유리 : 채유리에요.
인하 : 오 채유리. 예쁜 이름이다.
유리 :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향한다. 인하에게 보이지 않고 관객에게만 보이는 표정으로 은근히 웃고 있다. 그리고 책을 뽑고 갑자기 정색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인하 : 저기 리모컨 좀 줄래요?
유리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넨다.)
인하 : (계속 리모컨을 누른다.)
유리 :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인하 : (리모컨을 내려두고 가만히 유리를 살핀다.)
유리 : (살짝 몸을 돌려서 계속 책을 읽는다.)
인하 :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하다 다시 유리를 바라본다.)
유리 : (책을 소리 나게 덮으며) 저기 왜 이러는 거예요?
인하 : 아니 그냥 심심해서요.
유리 : 리모컨도 줬잖아요?
인하 : 재미있는 것도 없어서.
유리 : 되게 무례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무례한데, 자꾸 말을 걸고 하면 귀찮아 할 거라는 생각이 안 드나요?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인하 : 죄송합니다. 저기, 저도 책 읽어도 될까요?
유리 : 읽어요. 마음대로 읽으세요. 책을 꽂다.
인하 : (쭈뼛거리며 책장으로 향한다.)
유리 :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인하 : (책을 뺐다 꽂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바닥에 책을 떨어뜨린다. 다시 뺐다 꽂기를 반복하다 책을 떨어뜨린다. )
유리 : (인하를 가만히 쳐다본다.)
인하 : (더 느린 행동으로 책을 뺐다 꽂기를 반복한다.)
유리 : (자리에서 일어나 인하의 손을 잡는다.)
인하 : 아, 방해 되었어요.
유리 : 많이요. 그 분에게 전화를 해보면 안 되는 거예요?
인하 : 저, 번호를 모릅니다.
유리 : 연인이었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번호를 모를 수가 있어요? (인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무런 사이가 아닌 거 아니에요?
인하 : 사귄 사이는 맞는데, 연락을 안 한지가 오래 되어서요.
유리 : (책장 아래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여기요. 번호가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만, 전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번호네요.
인하 : 저기 그럼 전화기도 좀.
유리 : (못 마땅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주려던 찰나 울린다.) 여보세요?
애인 : 지금 어디야?
유리 : (자리에 앉으며) 집이죠. 그나저나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에요? 늘 바빠서 문자에 제대로 답장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애인 : 화가 난 거야?
유리 : 이제는 화를 낼 여유도 없어요.
애인 :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사람 미안하게. 지금 집으로 갈게.
유리 : (한 번 인하를 바라보고는) 오지 말아요.
애인 : 왜?
인하 : (책을 뺐다 꽂기를 반복한다.)
유리 : 너무 늦었어요. 어차피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하잖아요.
애인 : 그래도 당신에게 미안해서. 아까 비도 오는데 많이 기다렸잖아.
유리 : 아직 비 많이 오잖아요.
애인 : 그래, 아직 많이 오네.
유리 : 내일 출근하는데 문제 생길 지도 몰라. 우리 집은 멀잖아요. 그냥 오늘은 당신 집에 가서 쉬어요. 대신 나중에 시간 좀 내고.
애인 : 화 많이 난 거 아니지?
유리 :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당신이 뭐 달라질 사람인가?
애인 : 나 혼자 잘 살려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유리 : 알았어요. 늘 그 소리.
인하 : (책을 떨어뜨린다.)
애인 : 무슨 소리야?
유리 : 책을 읽으려다가 떨어뜨렸어요. 별 일 아니야.
애인 :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괜찮아?
유리 : 네, 뭐 책인데.
인하 : (다급히 책을 꽂다가, 찌그러진 책을 발견하고는) 저기 이거 괜찮아요?
애인 : 거기 또 누구 있어?
유리 : (고개를 흔들고는) 아니, 아무도 없어.
애인 : 지금 사람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유리 : 텔레비전 소리에요. 줄였어.
애인 : 그래? 아무튼 정말 미안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 부장이 그렇게 잡을 줄은 몰랐다니까.
유리 : 그런 변명은 됐고. 아무튼 쉬어요. 당신 비 오면 늘 감기 걸리고 그러잖아.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또 아프면 어떻게 해?
애인 : 보고 싶다.
유리 : (누그러진 목소리로) 알았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애인 : 응. 들어가.
유리 : (자리에서 일어나 인하의 앞에 선다.) 거기서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통화하는 거 안 보여요?
인하 : 책이 찌그러져서요. 되게 소중한 책인 것 같은데. (포장지로 쌓여 있는 책을 든다.)
유리 : 별로 소중한 책 아니에요. (인하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 품에 안는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요? 남의 물건을 만질 때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화기를 내민다.) 어서 빨리 전화나 해봐요. 이제 그쪽이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거 불편하니까요.
인하 : 고마워요. (통화 연결음) 아직도 그대로네.
(유리의 집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인하 : (유리를 보며) 집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유리 : 그럴 리가 없는데?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돈다.) 보세요. 어디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고 있다고요. (하지만 여전히 벨이 울린다.) 이상하네,
인하 :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여기저기 뒤진다.)
유리 : (인하를 말리며) 뭐하는 거예요?
인하 : 집 안에서 소리가 들리잖아요.
유리 : 그렇다고 남의 집을 뒤지는 게 말이나 되요?
인하 : 비켜봐요. 집에서 전화가 울리는데, 분명히 울리는데. (뒤를 돌아 유리를 살핀다. 전화는 계속 울린다.) 당신 뭐예요?
유리 : 이 집 주인이라고요. 내 전화기 내놔요.
인하 : 못 줘요.
유리 : 내놓으라고요! (인하의 손에서 전화를 빼앗으려 한다.)
인하 :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며) 줄 수 없다고요.
유리 : (전화기를 낚아채며) 당신이라는 사람 정말 무례해.
인하 :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 되게 무책임하네. 무례한 것도 맞는 것 같고요.
유리 : (인하의 옆에 주저앉는다.) 1년이라는 시간은 되게 오래라고 생각이 되지 않아요? 일주일, 딱 그 정도면 더 좋았을 것 같지 않아?
인하 : 그 시간이라면 달라졌을 게 없을 거 같아요.
유리 : 인하 씨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어떤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의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 안 들어요. 그래야 할 사람이 없으면, 남은 사람이 얼마나 힘이 들까 안 느껴져요?
인하 :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유리 : 아 나쁘네. 정말 나쁜 사람이다.
인하 : 저기 전화 한 통만 더 빌려줄래요?
유리 : 안 받는 거 확인했잖아요. 전화는 또 왜요?
인하 : 그 사람하게 메시지라도 남기고 싶어서요.
유리 : 무슨 메시지요?
인하 : 미안하다고. 이제 당신을 찾지는 않을 거라고. 시간이 지나서 당신은 이제 당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고. 그렇게 말을 하고 싶어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거 다 말을 하고 싶어요.
유리 : 아, 정말 이기적이다.
인하 : 유리 씨도 그렇게 생각을 해요?
유리 : 그렇게 일방적인 것이 어디에 있어요? 혼자서 누군가를 위해서 떠나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건 아니지. 남은 사람이 얼마나 버거우고 얼마나 힘이 드는 건데. 아 정말로 싫다. 그런 건 정말로 아니네.
인하 :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유리 :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비가 아직도 오네.
인하 : (유리의 옆에 선다.) 그칠 것 같지 않아.
유리 : 커피 마실래요?
인하 : 밥 먹을래요.
유리 : (가만히 인하를 바라본다.)
인하 : 내가 요리할게요.
유리 : 됐어. 새까맣게 탄 음식 같은 거 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인하 : 나 요리 되게 잘 하는데?
유리 : 일 년 동안 한 것이, 요리인가?
인하 : 그런가보네. 뭐 먹고 싶어요? (부엌으로 향해서 앞치마를 맨 후 뒤를 돌아본다.) 뭐든 말만해요. 다 해줄게.
유리 : (주방의 의자에 거꾸로 앉으며) 뭘 할 수 있는데요?
인하 : 다.
유리 : 가장 시간 오래 걸리는 걸 해줘요.
인하 : 이제 두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유리 : 아, 눈치도 되게 없네.
인하 : (싱긋 웃더니 손을 씻는다.)
유리 : 비가 와서 길이 막히고 있는 것 같은데, 비가 그칠 때까지는 있어요. 나 그렇게 야박한 사람이 아니니까.
인하 : 되게 친절한 사람이네.
유리 : 1년 동안 나도 달라졌으니까.
인하 : 미안해.
유리 : 아니야.
인하 :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유리 : (가만히 일어나 커튼을 치는 시늉을 하면 막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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