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21
‘Rrrrr Rrrrr'
“어머 아들.”
액정에 선재의 번호가 뜨자 유자는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먼저 전화를 걸다니 별 일이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
‘걱정했지?’
“걱정은 무슨.”
하지만 유자의 목소리에는 금새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어?”
‘싫어. 말하면 또 아빠한테 바로 불 거잖아. 내가 미쳤다고 엄마한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을 해?’
“네 아빠한테 말을 안 할 테니까 그냥 말해. 엄마가 너한테 안 좋은 일 생기게 둔 적이 있어?”
‘호텔이야.’
“호텔? 어디? 서울?”
‘내 이름 대고 들어올 수 있는 호텔 대한민국에 두 개 있는데, 설마 미쳤다고 내가 제주도까지 갔을까 봐. 강남이에요. 아빠 호텔에 희준이 이름으로 묵고 있습니다. 내 얼굴 안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엄마가 지금 갈까?”
‘됐어요. 지갑 내려놓으세요.’
“너는 무슨.”
유자는 선재의 말에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방금 손에 들었던 지갑을 재빠르게 탁자에 내려 놓았다.
“그래도 아들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 어떻게 엄마가 아들 소식을 자꾸만 방송으로 봐야 해.”
‘죄송해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드라마는 계속 하기로 했어요.’
“하기로 했어?”
유자는 금새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들을 매일 같이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쁨이었다.
“어떻게 그랬어?”
‘그쪽에서 아무튼 사과를 한 거니까. 그 정도는 받아줘야 하는 거잖아. 그래야지 엄마 아들이 좋은 사람이지.’
“암 그렇지. 그럼 계속 나오는 거야?”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내일 드라마 현장에 복귀를 하면 펑크는 나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그럼 이제 집에 들어오는 거야?”
‘아니.’
“어머, 왜?”
너무나도 빠르게 대답을 하는 선재 탓에 유자의 목소리는 금새 풀이 죽었다.
“네 아버지 때문이면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양반을 말릴게. 하여간 그 양반은 애를 죽도록 잡아요.”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이제 나도 독립을 생각을 해야 할 나이잖아요. 그러니까 겸사겸사 나오는 거지.’
“독립? 그럼 네 오피스텔 있잖니?”
‘어? 그, 그거.’
유자는 살짝 미간을 모았다. 얘가 또 오피스텔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구나. 유자는 이마를 짚었다.
“너 오피스텔 어떻게 한 거야?”
‘뭘 어떻게 해? 잘 있지.’
“아빠한테 이를 거야. 내가 네 아버지 모르게 그거 해주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면서 그래.”
‘임대 줬어요.’
“어머, 미쳤어.”
‘나도 집에서 나올 줄은 몰랐지. 서울 시내에 휴식을 취하려고 ᄄᆞ로 오피스텔 구해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거야. 엄마는 엄마 아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다니기를 바라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거 그냥 팔지 그걸 왜 임대를 하니? 그리고 네가 어디 돈이 궁해? 돈이 궁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는 지를 나는 모르겠다. 하여간 아들은 정말 이상해.”
‘그냥 놀려서 뭐 해? 아직 팔지도 않을 거고. 진짜로 돈이 필요했으면 팔았죠. 그냥 놀려두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정말이야?”
‘내가 엄마한테 거짓말해서 뭘 얻을 게 있다고. 진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컸어.’
“오늘 아버지 늦으신다니까 집으로 저녁 먹으러 와.”
‘됐어요.’
“아니 왜?”
유자가 다급히 반문했다. 남편도 없는데 왜 아들이 집에 들어오기 싫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유자는 너무나도 서운했다.
“우리 아들 엄마한테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
‘내일 바로 드라마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오늘은 먹은 걸로 할게요.’
“어떻게 먹은 걸로 해. 먹지도 않았는데, 그러면 케이터링 호텔로 넣어줄까? 아니면 뭐든 다 룸으로 시켜. 엄마가 지금 호텔에 전화를 걸어서 결재를 네 이름으로 하라는 소리를 안 할 테니까.”
‘저도 돈 벌어요.’
“어?”
‘저도 돈 잘 번다고요. 엄마는 내가 언제까지 그런 어린 아이인 줄 알아요? 돈 떄문이 아니에요.’
“그래.”
은근히 서운한 유자였다. 선재의 말처럼 선재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서운한 것일까?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화 드렸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하고 있으니까요.’
“알았어. 그럼 자주 연락해.”
‘네.’
전화를 끊고 유자는 가만히 전화기를 품에 안았다.
“아들.”
나이가 들고 나니 정을 붙일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남편도 아들도 그녀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더라도 늘 서운한 마음이 드는 유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없다면 아들을 지켜줄 것은 없을 거였다. 유자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선재에게는 자신이 유일했다.
‘Rrrrr Rrrrr'
“네, 선재 씨.”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있었어요.”
은비는 채연을 보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전화를 했어요?”
‘지금 좀 봐요.’
“네?”
은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보자고요? 지금 너무 늦지 않았어요? 밖은 이미 되게 깜깜한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요?”
‘나 다시 드라마 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내일부터 은비 씨랑 못 놀아줄 테니까 오늘 놀아주려고요.’
“아.”
은비가 엷게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요?’
“선재 씨가 할 일을 하는 건데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 하나도 없다는 말이에요. 선재 씨 할 일을 하는 건데 왜 자꾸 나를 신경을 쓰고 그래요. 나는 선재 씨가 열심히 일을 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해야지, 나만 그렇게 신경을 쓰면 민망하고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너무 내 신경 쓰지 말아요.”
‘이제 월요일에 못 쉬어요.’
“네?”
‘은비 씨랑 약속을 한 다음 월요일, 그리고 그 다음 월요일에 쉬지 못 한다고요. 그러니까 지금 봐요.’
“어.”
갑작스러운 선재의 통보에 은비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이 남자는 은근히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월요일의 데이트가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너무 늦은데.”
‘알아요. 그리 오래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응? 내가 지금 바로 은비 씨 집 앞으로 갈게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 30분?’
은비는 자신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자 채연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나 가득 하고는 은비를 바라봤다.
“뭐래?”
“지금 온대.”
“아이고, 권선재 그 사람도 어지간히 지극정성이다. 너도 이제 그만 튕겨야 하는 거 아니냐? 너무 대단한 사람인데?”
“대단하기는.”
“대단하지. 그냥 남자들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거야. 그런데 권선재 씨가 너에게 그러는 건 말 그대로 쇼킹한 사건이지. 톡 까놓고 말을 해서 권선재 씨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는 거겠냐?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지. 너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그런 일까지 하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너 말이 이상하다.”
은비는 살짝 이상한 눈으로 채연을 바라봤다.
“너는 누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을 고마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겨우 그런 사람이야?”
“은비야.”
“너 솔직히 우스워. 권선재 씨가 뭐가 어때서? 내가 싫으면 그만인 거잖아. 그 사람이 유명한 것이 뭐가 그렇게 잘난 건데? 그 사람이 잘나서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은 아니잖아. 애초에 그 사람 부모님이 있어서 시작이 달랐던 거잖아.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나를 그 사람보다 못 한 사람으로 취급을 하는 건데? 너는 왜 자꾸 권선재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건데?”
“미안해.”
채연은 황급히 은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네가 화 나라고 한 말은 아니야.”
“알아, 내가 봐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 너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어?”
“그런 게 아니야.”
채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은비의 손을 잡았다.
“그냥 신기해서 그런 것 뿐이야. 너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너를 좋아하니까 그게 신기해서.”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이지?”
“세상에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너랑 나랑도 이렇게 다른데. 같은 사람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그런데도 그 사람은 너를 좋아해주니까 그걸 좋게 생각을 하라는 거야. 다른 걸 좋게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이야. 그냥 그 점을 좋게 생각을 하라는 거라고.”
“알아.”
은비는 힘 없이 대꾸했다.
“내가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래.”
“네가 자격지심이 있을 것이 뭐가 있어?”
“왜 없어? 나는 이 모양인데.”
“네가 뭐가 어때서? 나는 권선재 씨 보다 조은비 네가 백 배는 더 멋지다고 생각을 하는데?”
“거짓말도.”
은비가 엷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가 더 멋있어?”
“진짜로 멋있다니까? 너는 그냥 당당하잖아. 내가 괜히 또 이상한 소리를 해서 네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나 보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 그 사람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인지 말이야.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사람에 비해서 너무나도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인데 이상해.”
“그 사람도 부족한 곳이 있을 거야.”
“어?”
은비는 가만히 채연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아직 권선재 씨를 몰라서 그러지, 그 사람도 은근히 허당 기질이 있을 지도 몰라. 빈 구석이 있을 거라니까?”
“됐네요.”
“됐기는.”
채연은 은비의 뒤로 가서 따뜻하게 은비를 안았다.
“조은비.”
“왜?”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네가 권선재 보다 나아.”
“진짜로?”
“진짜로.”
“고마워.”
은비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참 고마웠다. 객관적으로 말을 해주는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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