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촬영장에는 아예 오지 않을 것 같더니. 여기는 왜 오고 그래? 요즘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말이야.”
“그래도 담당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데 안 올 사람이 어디에 있어? 연기는 좀 잘 풀려가?”
“집에 있는 김수아 걱정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된다. 김수아 씨만 눈앞에 있으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막상 김수아가 또 눈앞에 있으니까 또 다른 걱정이 막 생기는 것 있지?”
“무슨 걱정이 생겨?”
“도망가면 어떻게 하나.”
“도망은 무슨.”
“도망은 무슨이 아니지. 나를 피해서 그렇게 멀리 여행까지 갔던 사람이니까. 다시 도망을 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게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다시 사라진다면 더욱 충격이 클 것 같아.”
“그럼 데리고 오지 그랬어?”
“어떻게 그래?”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는 것을 모르는 모양인지, 여전히 가온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가온을 보는 가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아가 조금은 마음에 드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가온처럼 저렇게 열성을 다할 정도의 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네가 여기에서 그렇게 초조하게 있는다고 해서 뭐 김수아 씨가 알아주기나 한다니? 촬영이나 잘 하시지?”
“잘 하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기는. 아무튼 아침에 미안해. 너 요즘 민감한 거 알면서도, 요즘 겨울이라 그런가 잠이 조금 늘었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누나한테 그렇게 짜증을 내고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음이 불편하더라. 그냥 집에 김수아 씨가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아.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야. 내가 더 챙겨야 했는데. 김수아 씨랑은 이야기 많이 했어?”
“응.”
“다행이네.”
“그 사람 마치 고양이 같아.”
“고양이?”
“응. 되게 겁이 많거든.”
“낯서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고양이 같지.”
“아주 입이 걸렸어요.”
가온이 입이 찢어져라 밝게 웃자 가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 좋을까 싶을 정도로 가온은 좋아하고 있었다. 가온의 사랑을 받는 수아가 아주 조금은 부러운 가나였다.
“회사에 들어갔다 왔는데 남 사장이 걱정이 많더라고.”
“김수아 씨 때문에?”
“당연하지.”
“누나한테 뭐라고 하지.”
“뭐, 선배가 나에게 그러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은근히 눈치는 줄 거 아니야.”
“알면서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안 그래? 집에 들어가서 김수아 씨 볼 생각에 웃고 있는 주제에.”
“미안해.”
“됐어.”
가온의 사과에 가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가온의 사과를 듣기 위해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가온의 편이라는 것을 조금 더 제대로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도 솔직히 말을 하면 나 김수아 씨가 우리 집에 있는 것은 그런 것 같아. 따로 방을 구하자.”
“그건 김수아 씨가 결정을 하면 좋겠어.”
“솔직히 부담될 것 같지 않아?”
“뭐가?”
“우리 집에서 살게 하겠다는 네 계획 말이야. 솔직히 조금 우습지 않니? 김수아 씨랑 너랑 무슨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이제 겨우 서로를 좋아하는 것 확인을 한 정도인데 너무나도 일러.”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김수아 그 사람은 무조건 다시 도망을 갈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모르겠다.”
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김수아라는 여자는 겁을 먹는 것 같으면서도 가온이 이렇게 눈에 보이게 행동을 해주자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럼 누나도 내가 하는 행동에 그냥 동의를 해주는 거지?”
“내가 언제 노라고 한 적이 있었어?”
“그래도.”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내 허락을 받고 했다고 그런 표정을 짓고 그러니? 웃기지도 않아. 하여간.”
“솔직히 미안하잖아.”
가온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나가 그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기에 더욱 미안했다. 그래서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출연진이 들어와서 촬영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다. 가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촬영장으로 나갔다. 가나는 그런 가온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해야 할 텐데.”
가나의 눈은 그런 가온의 자취를 쫓았다. 잘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오늘 잘했다고 하더라. 현장에서 다들 혀를 내두르더라고.”
“그럼 내가 누구인데? 강가온이야.”
“하여간. 이런 강가온의 모습을 보면 팬들도 다 싫어할 거야.”
“왜?”
“이렇게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니? 사람들은 모두 강가온이 되게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다들 강가온을 좋아하지.”
“왜 그래? 누나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되게 좋아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기를 바라는 거야?”
“누가 그렇대?”
가나는 살짝 볼을 부풀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온의 이런 모습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면 금방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것이 우습잖아. 방금 전까지도 엄청나게 관심을 보이다가 금방 사라지고 그러잖아.”
“나는 그런 것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런 거 이미 누나가 이야기를 해서 다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준비랑 현실은 다르잖아.”
“다르기는.”
가온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처음 사람들의 관심이 생기 때부터 가나는 그에게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인기라는 것은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까 절대로 자만을 하지 말라고. 절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지 말라고. 아직까지는 가나의 이야기처럼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지만 가온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 인기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나저나 아까 대충 들으니까. 남 사장님이 나에게 새로운 매니저를 하나 붙여준다는 것 같은데.”
“너 그거 어디에서 들었어?”
“그냥 들었어.”
“누가 그래?”
“왜 화를 내고 그래?”
“말 해.”
갑자기 가나의 어조가 날카로워지자 가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관련이 된 것이라면 늘 날을 세우는 가나에게 고맙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호의에도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로 화를 내는 가나를 보면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주율 역시 이런 가나를 보면 답답할 터였다.
“솔직히 누나가 힘이 든 것은 사실이잖아. 그리고 실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할 일도 아니고 말이야.”
“말이 실장이지. 나 네 개인 매니저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도대체 선배는 왜 자꾸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네 매니저를 포기를 할 것 같아?”
“누가 포기를 하래?”
“그럼 그런 이야기를 왜 해?”
“누나가 힘이 드니까 그러지.”
“나 하나도 힘 안 들거든?”
“안 들기는.”
가온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가나가 오늘처럼 이렇게 늦게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늘 건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그 동안 눈치를 채지 못한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 분명히 가나는 조금씩 힘이 든 티를 내고 있었을 거였다. 그런데도 자신은 자신만 생각을 하느라고 가나가 힘이 든 것은 하나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누나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뭐라고 그런다고. 그런 건 싫어.”
“누가 너에게 뭐라고 그래?”
“다들.”
“다들 누구?”
“솔직히 그렇잖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누나를 부려먹는 것처럼만 보인다고. 아니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누나가 언제 자기 시간을 낸 적이 있어? 늘 나만 생각을 하느라고, 정작 자기는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있으면서 말이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누구 하나 나에게 이것을 강요한 사람이 없는데 다들 왜 그런다니?”
“사실상 강요지.”
“뭐라고?”
“강요잖아.”
“어째서?”
“엄마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누나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챙기게 된 것이니까 그런 거지.”
“강가온!”
가나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옆으로 차를 세웠다. 갑작스러운 가나의 행동에 가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한 번만 더 그 소리를 해 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은 줄 알아?”
“솔직하게 말을 해서 사실이잖아.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누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너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니야?”
“도대체 왜?”
“왜라니?”
“사실이잖아.”
“사실이 아니야.”
“누나.”
“나 한 번도 너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 희생이라고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만일 희생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나 네 일 봐주지 못했을 거야. 아니 못 했어.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너는 그 사람들의 말을 맞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데? 절대로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마.”
“누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누나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누나가 나 때문에 고생을 하는 거니까.”
“그런 거 알면 그런 말을 하지 마.”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가나가 유난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자 가온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나가 이 정도로 거칠게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가온은 가나를 걱정을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가나가 유난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니까 마음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가온이었다. 가온은 다시 가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핸들만 잡고 있었다.
“안 갈 거야?”
“나도 힘들어. 많이 힘들다고. 하지만 나보다 더 네가 힘이 든다는 것 알고 있어. 여기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네 성격이 그런 성격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성격은 물론이고, 그렇게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순전히 네 노력이야.”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 나보다 누나가 더 알고 있잖아. 모든 것은 누나의 공이야.”
“내 공이라고?”
“그래.”
가온이 힘을 주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가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온이 고스란히 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온은 절대로 저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가온은 자신에 대해서 충분한 자부심을 가져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 탓에 가온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였다. 가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만일 네가 이쪽 일에 능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재능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너를 보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수많은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기회를 찾고 있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드물어.”
“너 만큼이 아닌 거야.”
“정말 대단하네.”
“네가 대단한 거지.”
“누나. 너무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솔직히 말을 하면 누나가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부담스러워.”
“뭐라고?”
가나가 고개를 돌리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가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가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가온의 눈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
“왜?”
“너를 무시할 테니까.”
“그런 사람 아무도 없어.”
“아니. 다들 그래.”
“누나.”
“제발.”
“알았어.”
가온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가나와 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애초에 무엇을 바라고 꺼낸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가온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나 우리 가자.”
“그래. 가야지.”
천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나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정적이 싫었던 가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그 제과점 가서 밀푀유나 사갈까?”
“또 먹게?”
“김수아 씨 사주게.”
“아우, 정성이야.”
운전대를 잡은 가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살짝 룸미러로 가온을 노려봤다. 가온은 두 손을 모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맛있는 것도 막 나눠먹고 싶은, 응?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아니겠어?”
“이 피곤한 누나가 운전대까지 잡았는데, 강가온 너는 꼭 그렇게 돌아가는 길로 가고 싶어?”
“어.”
“미워.”
가나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좌회전 깜빡이를 넣었다. 서운하기도 하면서도 어느새 이렇게 동생이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해지는 가나였다. 이런 가온의 사랑을 받는 수아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면서도 은근히 심술이 생겼다. 자신은 이렇게 가온의 모든 것을 챙겨주고 있는데도 그 마음을 오롯이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아라는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가온이 사랑을 받고 있었다.
“대신 가게에서부터는 네가 운전하는 거다.”
“오케이.”
“흔쾌히 오케이라니. 강가온 네가 정말로 김수아 씨를 좋아하기는 좋아하는 가 보다. 운전까지 다 하겠다고 하고.”
“그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누나를 좀 좋아하면 안 돼?”
“나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가온은 뒤에서 가나의 어깨를 주물렀다. 가나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서 가온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너 김수아 씨 앞에서는 이러면 안 돼.”
“뭐가?”
“어린 애처럼.”
“남매인데 뭐.”
“남매라도. 너는 이제 남자로 보여야 하는 거잖아.”
“오, 뭐야?”
가온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가나를 바라봤다.
“김수아 싫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 사람에게 별 볼 일 없는 남자로 보이는 것은 싫은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가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이었다. 혹여나 김수아가 가온을 어린아이로 본다면 그녀도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울 터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앞에서는 가온과 자신의 사이를 떨어뜨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야 수아가 들어올 자리도 생길 테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온이 조금 더 어른스럽게 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할 터였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남자는 바로 강가온이라고. 그런데 이 강가온이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으면 좀 그렇잖아.”
“그 사람 나 모자라다고 이야기 안 해.”
“그래도 모르는 거야.”
“누나가 이상한 거야.”
“내가 뭐가 이상해?”
“대한민국 여자들이라면 다들 어련히 이 강가온을 좋아하게 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김수아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한 이상, 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자기가. 응? 이미 강가온의 마력에 빠졌는걸.”
“미쳤어.”
가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거리인데 신호가 잘 바뀌지 않았다.
“여기 신호가 원래 이렇게 길었나?”
“아, 바뀌었다.”
가나가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핸들을 꺾는 순간, 옆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마지막으로 지나가려던 버스가 두 사람을 향해서 달려오고 싶었다. 가나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곧 엄청난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원래 그렇게 교수가 되고 싶었어?”
“아 선배님.”
“아니 평소에는 그냥 환자들 받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아니었나 보네.”
“그런 게 아니라 한 번 해보라고 하니까 열심히 해보는 거죠. 뭐. 그나저나 선배님께서 안 들어가셨어요?”
“관심이 가는 환자가 있어서.”
난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지우의 곁에 앉아서 지우가 하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우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커피 드실래요?”
“이 늦은 시간에 커피는 무슨.”
“디카페인도 있는데요.”
“됐어. 남 선생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불편한 거구나?”
“솔직히 무조건 편하기는 어려운 사이잖아요. 선배님께서 바로 저보다 한 기수 위이시니까 말이죠.”
“그렇지.”
난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리 남 선생을 엄청나게 괴롭혔어.”
“뭐 선배님께서 그러고 싶으셔서 그랬겠어요?”
“그래도. 나 원망 많이 했지?”
“원망은 안 했어요. 그냥 나는 선배가 되면 절대로 선배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죠.”
“못 말려.”
“그나저나 정말 왜 오신 거예요? 뭐 저에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으셔서 오신 거예요? 그런 거면 말씀을 하시고요.”
“뭐 내가 늘 부탁만 하니?”
“거의 그렇지 않으셨어요?”
“그래. 내 잘못이다.”
“잘못은요.”
난희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우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나는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남 선생 방에만 불이 들어와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자나 연구를 하나. 그냥 궁금해서 호기심 반. 감시 반. 이런 마음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역시 감시는 안 해도 될 거였어.”
“이미 충분한 감시인데요?”
“병원에서도 솔직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으니까. 내가 남 선생 무지하게 밀었던 거 알고 있지?”
“압니다.”
지우는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교수가 되어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는데, 난희는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난희는 미소를 짓고는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그럼 나는 가볼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난희가 나가고 나서 지우는 기지개를 켰다. 늦은 시간이었다. 늘 난희가 그를 챙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약간 시장했던 지우는 난희를 쫓아가서 무엇이라도 먹을까 재킷을 들었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망설이던 지우는 전화를 받고는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고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
“어머? 남 선생님. ER에는 무슨 일이세요?”
“강가나 씨라고.”
“강가나 씨. 아 강가온 씨 누나요. 저쪽에요.”
“고마워요.”
지우는 간호사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처음에는 빠르던 걸음이 조금씩 더뎌졌다. 혹시라도 가나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커튼을 연 가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지우를 바라봤다.
“아직 병원에 있었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일방적으로 당한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왔어?”
“호출이 왔지.”
“지우 너 병원에서 중요한 의사인가 보네.”
“당연하지.”
차트를 이리저리 넘기던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교통사고니 후유증이 심각할 지도 몰랐다. 지우는 응급실 담당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한 후 가나를 응시했다. 안도를 지나치니 그녀에게 화가 났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검사가 많을 거야. 다 받아. 강가온 씨 부탁도 있으니까.”
“어?”
그리고 가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응급실을 나섰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주율이 떠올랐다. 망설이던 지우는 단축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주율이 받았다.
“무슨 일이야?”
“병원으로 와.”
“병원은 왜.”
“그냥 와.”
“왜 짜증이야? 바빠.”
주율의 목소리에 지우는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에게는 퉁명한 주율이 원망스러워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런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원으로 오라고 하면 그냥 좀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런 일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되는 건가?”
“나도 일하는 사람이야. 내가 뭐 노는 사람이라면 거기로 바로 가겠는데.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누가 형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거 모르고 전화를 한 줄 알아? 평소에 내가 형에게 전화를 해?”
“그러니까. 왜 난리야.”
“이래서 내가 형에게 전화를 안 하는 거라고.”
“내가 뭐.”
“형이랑 도대체 무슨 이야기라도 하려고 하면 항상 돌아서 버리고 말이야. 요즘 가나 누나의 일만 해도 그렇잖아.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형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형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그런데 형은 아니잖아.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기대마저도 형은 완벽하게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말잖아.”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형으로의 자질.”
“네가 지금 바라는 것이 그거라고?”
수화기를 통해서도 주율이 코웃음을 치는 것이 고스란히 들렸다. 지우는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꼭 그렇게 비웃어야겠어?”
“지금 너 나한테 왜 짜증을 내는 건지 몰라서 그래?”
“뭐라고?”
“강가나가 네 말을 듣지 않으니까 지금 나에게 신경질을 내는 거잖아. 남지우 내가 지금 틀렸어?”
“틀렸어.”
“하. 내가 뭐가 틀려?”
“씨발 형이면 다야? 왜 형이 꼭 가나 누나를 가져야 하는 건데? 가나 누나는 왜 형을 좋아하는 건데?”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모든 것은 다 가나의 선택인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형이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을 하니까 가나 누나가 자꾸만 형이 뭔가를 해줄 거라고 기대를 하는 거잖아.”
“뭐라고?”
“전부 다 형 탓이야.”
“남지우.”
“그냥 병원으로 오라고 하면 그냥 오면 좀 안 되는 거야? 내가 형에게 뭐 나쁜 일을 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유를 말을 하면 되는 거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유도 말을 하지 않고 나보고 병원으로 가라고 하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지금 회사에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강가나가 지금 병원에 있어.”
“뉴스도 안 봐?”
“뭐라고?”
“강가온이 교통 사고가 났다고.”
“뭐라고?”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장이라니. 지우는 고개를 흔들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 강가온이랑 강가나 두 사람 모두 우리 병원에 와 있어. 이제 병원으로 올 이유가 충분한 거야.”
“왜 그것부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야?”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괜히 쓸데 없는 이야기만 빙빙 돌리면서 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 거야. 그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잖아.”
“사장이 그렇게 무능해서 되겠어.”
“지금 어딘데?”
“응급실인데 아마도 검사를 하고 특실로 올라갈 것 같아. 지금 회사에 있는 거면 금방 오겠네.”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서 지우는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려주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그리고 가나가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그 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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