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 1
“올까?”
“자기가 온다고 했으니까 오겠지.”
손님이 뜸해지고 10시가 넘자 딱히 문을 닫지 않더라도 손님들이 없었다. 불타는 금요일, 카페에 와서 커피나 마실 손님은 없을 거였다. 게다가 프랜차이즈 커피점도 아니니까. 케이티는 하품을 하면서도 영준이 미리 건네준 소설을 재밌게 읽고 있었다. 선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무 기대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나 하고 가지? 이번 거 되게 재미있던데.”
“재미는.”
“왜? 묵직하고 그러던데.”
“원래 동화를 비꼬는 건 다 그러는 거야.”
“그래도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데 종이 울렸다. 고개를 드니 어색한 표정의 연주와 연우가 가게로 들어섰다.
“아직 시작 안 한 거 맞죠?”
“잘 오셨어요. 사람이 하나도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나도요?”
“네.”
연주와 연우가 자리에 앉는데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그녀였다.
“죄송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뛰어온 모양인지 살짝 얼굴이 상기가 된 채로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모습에 영준의 표정이 저절로 밝아졌다. 선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영준의 발을 살짝 밟았다. 영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제 시작을 할까요?”
“더 안 기다리고?”
“이렇게면 다 온 것 같은데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선재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이야기 카페, 카페 사랑은의 사장을 맡고 있는 변영준이라고 합니다.”
영준은 일부러 여자의 쪽은 바라보지 않으면서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다음은 케이트의 차례였다.
“저는 바리스타 케이티에요. 케이트라고 불러주셔도 좋아요.”
케이트가 앉고 나서 선재는 유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 녀석을 무지하게 걱정하고 있는 좋은 친구 권선재라고 합니다. 다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다음은 연주의 차례였다.
“저는 도연주라고 하고, 요 앞에서 샐러드도 파는 떡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뭐, 조만간 문을 닫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부탁해요.”
모두 당황한 순간에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대로 이 커피집이 장사가 잘 되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우리 누나가 취업을 했거든요. 아무튼 저는 도연우라고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모였다.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민아리라고 합니다. 여기 커피가 무지하게 맛있어서 첫 날 두 번이나 오고 매일 들러서 커피를 사고 있는 단골이에요.”
“반갑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백설 공주를 한 번 해보려고 해요. 워낙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조금 동양적으로 해보려고요.”
영준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넓은 궁 안에 온기도 하나 없이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왕좌에 앉은 백설은 가만히 왕좌 앞의 사내들은 긴장된 기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백설은 천천히 검지로 손잡이를 두드리며 사내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러다가 한 사내를 보고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저거.”
사람들의 고개가 모두 그리로 향했다.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안 사내는 긴장감에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내의 편을 들어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리.”
공주의 손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 긴장된 상태로 바라봤다. 차라리 궁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라면 다행이었다. 모든 관직을 잃게 되고, 모든 토지도 몰수당할 터지만 목숨만은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공주의 손끝은 감옥을 지나서 사형대를 향했다.
“치워.”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공주님!”
사내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근위병 둘이 다가와서 사내를 단단히 결박한 후 사형대로 향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오늘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백설은 이제야 만족한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체리가 먹고 싶은데.”
백설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궁녀가 체리를 백설에게 건넸다. 백설은 체리를 한 알 입에 먹고 입 안에서 굴리더니 지그시 깨물었다. 백설의 입가를 따라서 보랏빛 과즙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멀리 사형대에 사내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백설은 이리저리 목을 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궁녀를 바라보더니 높게 손을 들어서 그녀의 뺨을 세게 쳤다.
“아악.”
“고얀 것.”
궁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지만 그 누구도 궁녀를 위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백설은 사나운 눈길로 궁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것을 내가 먹으라고 가지고 온 것이냐?”
“예. 공주님.”
“이따위 것을?”
“네?”
“시다 못해 초가 된 것이 분명한 과실을 지금 네가 나에게 먹으라고 가져왔다. 그 말을 하는 것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주님.”
궁녀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무릎을 꿇고 백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과일 중에 체리를 건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백설의 표정은 이미 충분히 일그러졌고 그녀의 미간에는 주름이 곱게 잡혀 있었다. 백설은 순간 엷은 미소를 짓더니 높은 굽의 신발로 궁녀의 허리를 내리 찍었다.
“아흑.”
“여린 척을 하는 게냐?”
“아닙니다.”
“여린 척을 하는 게야!”
백설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면서 구두로 궁녀의 허리를 내리 찍었다. 새하얀 궁녀 복에 핏물이 배기 시작했다. 순간 신하 중 한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오자 백설은 신하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그 탄식은 누구의 탄식이란 말씁입니까? 어서 말을 해보시지요. 도대체 누가 그따위 탄식을 내뱉은 거야!”
“공주님의 고운 신발에 피가 묻어 안타까워 그랬습니다.”
“그래?”
백설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면서 방금 이야기를 한 신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신음을 흘리던 신하는 곧바로 고개를 다시 숙였다. 백설은 씩 웃더니 그의 얼굴 앞에 신발을 가져갔다.
“그럼 핥아.”
“네?”
“그럼 핥으라고. 그리도 안타깝고 그리도 애가 닳으면 이 신발을 핥아서 피를 네가 닦아주면 될 일이 아니더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너를 용서를 하는 게야. 저 자리에 지금 네가 가 있을 수도 있어. 알고 있어?”
앙칼진 백설의 고함이 울렸다. 멀리 교수대에 올려 진 사내를 본 모두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짓을 막을 사람이 그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여나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이제 다들 나에게 함부로 구는 것은 그만 두기를 바란다. 내가 아무리 일국의 공주의 지위에 오른 것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곧 이 왕국은 나의 것이 될 테니까.”
백설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서 체리를 먹었다. 그리고 새콤함에 살짝 눈을 찡긋하더니 조아린 궁녀의 발을 짓밟았다.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백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나가자.”
“거기 서거라.”
왕좌에서 일어난 백설은 순간 흠칫 놀라더니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지금 자신을 부른 쪽을 바라봤다. 은하는 가만히 백설을 응시했다. 늙었지만 여전히 고고한, 그리고 매서운 눈길에 백설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머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불경한 자를 처단하려는 것입니다.”
“불경한 자?”
“예. 역모를 꾀하고 있는 자지요.”
“누가 그러더냐?”
“저 사람의 눈이 그리 말을 했습니다.”
백설의 눈에 은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위병을 향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은 백설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사형대로 향해서 사내를 끌고 들어왔다. 백설의 고운 얼굴에 가늘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백설은 살짝 목을 가다듬기 위해서 헛기침을 했다.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어머님.”
“흑렵아. 그 자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아라.”
“네.”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어머니!”
백설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사내들은 모두 겁에 질려서 땅에 고개를 박고 있는데, 은하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만히 백설을 응시했다. 그리고 코웃음을 친 채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무리 그리 제멋대로 행동을 하려고 한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가 있겠느냐?”
“어머니만 방해를 하지 않으시다면 가능합니다. 도대체 어머니께서는 왜 이리 제 일을 방해를 하시는 겁니까?”
“그 자는 하나도 죽을 이유가 없는 자다.”
“반역을 꾀했습니다.”
“증거가 있어?”
“그 자의 눈입니다.”
“그 자의 눈이 무엇을?”
“그 자의 눈이 말을 합니다.”
백설은 갑자기 큰 소리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곧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우고 입술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세게 물었다.
“도대체 어머니께서 왜 이렇게 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자 노력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리입니다. 제 나라입니다.”
“아직은 내가 네 어미다. 아직은 내가 이 나라의 중심이다. 네 아버지께서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무엇을 꿈을 꾸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머니는 무엇을 꿈꾸시는 겁니까?”
“무어라?”
“어머니의 것은 절대로 안 될 겁니다.”
“그런 생각 하나도 한 적이 없다.”
은하는 가만히 백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차분히 대답했다. 반대로 은하를 바라보는 백설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분노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쥔 주먹은 핏기도 하나 없이 하얗게 변했다.
“흑렵이 곁에 계시다고 그렇게 함부로 구셔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흑렵은 어디까지나 고용이 된 천한 사냥꾼에 불과하니까요.”
“그 천한 사냥꾼이 네가 부리고 있는 수많은 근위병보다도 더 우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더 이상 흑렵은 천한 사냥꾼이 아니다. 이 나라. 이 궁을 지키는 근위병 중 한 사람이지.”
“그거야 어머니의 생각이지요.”
“그래. 내 궁에.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이를 근위병으로 삼겠다고 하는데 네가 감히 말릴 이유는 없는 거겠지. 안 그러냐? 아무리 네가 이 나라를 대표할 이라 하더라도 그런 부분까지 오직 네 마음대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 사람은 내가 원하는 이로 채울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죠.”
백설은 빤히 은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은하를 스쳐서 지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설의 뒤를 따라서 문밖으로 나섰다. 은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런 무리의 뒤를 가만히 응시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더 이상 공주님을 저리 두시면 안 됩니다. 결국 공주님 스스로도 모든 것을 잃게 되실 테니까요.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그대께서 힘이 드시더라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나는 계속 힘을 내고 있다. 다만 저 아이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마뜩찮아 하는 것이 전부일 뿐. 내가 그 동안 저 아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는지 그대가 더욱 잘 알지 않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흑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에게 허락이 되지 않는 왕실을 위하여 은하가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백설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백설은 그 사실을 잊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머니인 은하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갈 것이라는 망상에 잡히기 시작했다. 은하가 그녀의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러한 행동은 더욱 심해졌다.
“이제 돌아가자.”
“네.”
잠시 흑렵을 보며 뭐라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이던 은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한들 그것이 자신의 딸인 백설의 얼굴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것은 그녀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아이의 미친 짓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게 궁금하구나. 이 나라에 저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있기나 할 터인지. 그것도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저리 하다가 결국 그 칼에 자신의 목이 겨누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저 가녀린 아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인가?”
“한 번 한 가지에 집착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일그러져 보입니다. 세상이 붉다 이야기를 하는 이에게 하늘을 가리킨들 그것이 온전한 푸른 빛깔로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이의 눈에는 세상은 그저 붉은 빛의 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이겠지요. 지금 공주님의 눈도 그러실지 모릅니다. 공주님의 눈에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목을 겨누는 사악한 자들이니까요.”
“그런 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결국 자신의 잔혹하고 잔인한 일 때문임을 왜 모르고 그리 행동을 하는 게야? 도대체 누가 언제까지 자신을 그리도 보호하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나저나 미안하구나. 내 흑렵 너에게 괜한 일을 시켜서 공주의 마음에 벗어나게 만들었구나. 그 아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것인데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은하는 흑렵의 얼굴에 남아있는 흉터를 응시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백설이 품에 지니고 다니던 은장도를 날린 탓에 생긴 흉터였다. 조금이라도 빗나갔더라면 실명이 될 수도 있었기에 은하는 더욱 미안했다.
“그 아이가 그리 변한 것은 모두 내 탓인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아무도 내 탓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이 어찌 왕비 마마의 탓이겠습니까? 모든 것은 다 공주께서 아직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는 탓입니다.”
“그 아이는 나에 대한 질투로 그러는 것이다. 아비의 사랑을 극진히 받아야 하는 나이에 아비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녀린 아이이니까. 모든 것은 다 그 아이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흑렵.”
흑렵의 단호한 어조에 은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어보였다.
“내 그대가 있어서 이리 마음이 놓이는 구나.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돌을 던지더라도 그대는 나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대에게 내가 믿음이 있기에 웃을 수가 있어.”
“저도 언젠가 왕비 마마를 배신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 그날이 오면 저를 절대로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그대가 어찌 그러겠는가?”
“모를 일이지요.”
“흑렵.”
“왜 그리 놀라십니까? 처음부터 왕비께서 하시던 말씀이 아닙니까? 자신을 믿지 마라. 언제든지 저를 배신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면서, 제가 배신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흑렵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닿자 순간 흑렵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왕비 마마.”
“내가 그대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대를 이리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야.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가 이리도 힘이 들 필요가 없을 터인데. 내가 당신을 괴롭게 하고 있어.”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들이 오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오해?”
“마마. 아직 국왕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살아있어?”
은하는 큰 소리로 코웃음을 치더니 곧 홀 가득 울리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양반은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잠을 자야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나라의 꼴이 이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죽은 듯 잠만 자고 있을 거야!”
“병 때문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병?”
“왕비의 존함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공주를 포함하여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왕비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왕비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면 저도 더 이상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은하는 얼굴에서 모든 웃음을 지우고 곧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 없는 이 왕국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편인 사람이었다. 참 이상하게 계모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은 그녀가 백설에 나쁜 사람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백설에게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제 아비가 걱정을 할 정도로 그 아이의 편을 들어서 늘 잔소리를 들었던 그녀였지만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에 은하는 그저 냉정한 계모였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느냐?”
“무슨 사람들 말씀입니까?”
“그 아이를 막을 수 있는.”
“네?”
“아무리 보아도 내가 그 아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누군가가 그 아이를 막아야 해. 그것이 나일 수는 없겠지. 내가 그 아이의 앞에 선다면 사람들은 모두 내가 나쁜 사람이라 이야기를 할 테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단 말씀입니까?”
“너도 궁 안에 살게 된지 오래 되었구나.”
은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자.”
“왕비 마마는 끝까지 국왕을 기다리면 그 분이 일어나실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시는 겁니까?”
“그래.”
“그런 날이 올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날이 온다고 한들. 공주께서 왕비 마마의 편을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보나마나 폐위를 주장할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조금이라도 이르게 화근을 자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람을 모은다면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순간 은하의 손이 흑렵의 뺨을 스쳤다. 흑렵의 얼굴에는 곧바로 은하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흑렵을 노려보았다.
“다시는 그런 말도 입에 담지 말거라.”
“하지만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저는 왕비의 편입니다. 저는 왕비의 편인데, 그 누구도 그대의 편이 아니면 저 혼자서 도대체 어떻게 지키라는 말씀입니까? 게다가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다는 그런 존재가 왕비의 편을 절대로 들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된다면 먼저 나서시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게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방법이 있을 거다.”
“왕비 마마. 결국 사과입니다.”
“사과?”
“그렇습니다. 황금 사과.”
“다물어라.”
은하는 얼굴이 창백해서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황금 사과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테미스의 황금 사과는 궁전 안의 어딘가에 잘 보관이 되어 있을 거였다. 그것을 손에 넣은 여인은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백설의 친부이자 자신의 유일한 남편인 왕이 일어나는 것이 모두였다.
“그 사과를 이용하면 얼마나 많은 상처가 생기는지 몰라서 묻는 것인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것은 맞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내려놓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왕비께서는 그런 엄청난 힘이 생기더라도 결국 손에서 놓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까?”
“아니다.”
은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기다란 그녀의 속눈썹이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나풀거렸다. 은하는 핏빛이 감도는 입술을 열고 가늘게 입김을 불고 몸을 살짝 떨고는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더 이상 있어서 할 것은 없다. 돌아가자. 오늘따라 왠지 마음이 더 아프고, 또 시리구나.”
“알겠습니다.”
흑렵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가 이토록 이야기를 하는데 그도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황금 사과?”
“네.”
백설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다란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어릴 적 들은 적이 있었어.”
“그러십니까?”
“거짓이라고 생각을 했지.”
백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몸종을 응시했다. 어릴 적 그녀가 들어가면 안 되는 서재에 들어가서 읽었던 책에 있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면 그것이 그저 헛소문이고 날조된 것은 아닐 지도 몰랐다.
“어디에 있는지 들었어?”
“그것까지는 못 들었습니다.”
“그래?”
“죄송합니다.”
“아니야.”
몸종이 황급히 머리를 바닥에 대고 용서를 구하자 백설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런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백설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내가 어머니를 직접 치는 것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지?”
“안 될 일입니다.”
“나도 알아.”
백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금장이라도 그녀를 이 공간에서 몰아내고 싶지. 아무리 자신이 잘난 척을 하더라도 결국 왕실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될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니까. 그리고 이 왕실의 정통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도 바로 내가 아닌가? 네 생각에는 어떠니? 내가 여왕이 된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현실이 될 거야.”
백설의 입가에 곧 비린 미소가 떠올랐다. 백설은 가슴으로 손을 넣어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이 권력을 위해서 자신이 먹을 차에 독을 탔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야. 그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다고 믿고. 그러하겠지.”
“그래도 국왕을 잠들게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권력은 오롯이 공주께 들어갔을 테니까요.”
“누가 그러지?”
“네?”
“혹시나 내 밑으로 왕자라도 태어나게 된다면 그 순간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저 끈이 떨어진 연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라고. 그런 끔찍한 것은 싫어. 이 왕국은 내 것이야.”
“설마요. 그 나이에 후손을 생산하시겠습니까?”
“모를 일이지.”
백설이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 미친 노인네가 재혼을 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나이를 먹었으면 그냥 얌전히 늙고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 나이에도 어떻게 여인이 품고 싶어서 결혼을 하지?”
“이제 겨우 쉰을 맞으셨습니다.”
“뭐라고?”
“아닙니다.”
백설의 사나운 시선에 몸종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을 잘못하면 바로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말실수를 했다. 하지만 이미 권력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백설은 시선을 거두었다.
“쉰이라는 나이가 주는 상징이 얼마나 크던가? 이 나라에 팔십을 넘는 노인은 없는 상황인데. 쉰이면. 이미 다 산 거지.”
“그렇기에 결혼을 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결국 공주께서 하루라도 빠르게 더 확실한 무언가를 차지하시기 위해서는 혈통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누구랑?”
“네?”
“내 또래 아이들의 그 유치함을 나보고 견디라는 말이냐?”
“공주님.”
“왕자라는 것들이 전부 다 자신이 무엇을 할 줄 아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그런 이들과 내가 혼인을 하라고? 도대체 왜 나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내 손에 들린 것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더 많은 것을 가지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많은 것을 가진 국가의 왕자라면.”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에 더욱 많은 불만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라도 거기에 끼어들 생각을 할 거다.”
“공주님.”
“나는 오롯이 내 힘으로 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한다. 여왕이 아니라 왕이 되어야 해. 이 왕국이 내 것이 되어야.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를 받지 않을 수가 있다.”
“누가 감히 무시를 하겠습니까?”
“다들.”
“네?”
“지금 어머니의 통치에도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통치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보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잖아.”
백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불빛이 아른거리는 마을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있었다. 백설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도 그 분이 통치를 하신 적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나의 어머니가 통치를 하였고,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열 살이던 내가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재혼을 하신 이후에는 그녀가 모든 것을 다 다스리고 있는 데도 사람들은 모두 왕이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지.”
“앞으로 보이는 것이 그것이니까요.”
“앞으로 왜 아버지만 보여야 했던 건데!”
순간 백설이 손에 잡히는 것을 던졌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몸종의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고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몸종은 황급히 얼굴에 손을 가져가고 바닥에 피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했다.
“나가라.”
“네.”
몸종이 나가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본 백설은 씩 웃었다.
“피가 떨어졌구나.”
“고, 공주님.”
“너의 천한 피가 떨어졌어.”
“죄송합니다.”
“감히. 내 침실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무엇인데?”
“공주님.”
“여봐라!”
곧 문이 열리고 근위병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노한 기색이 역력한 백설과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몸종.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종을 잡았다.
“공주님. 공주님 살려주세요. 공주님 잘못했습니다. 공주님.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어서 저것을 가져다 치워라.”
“네. 어찌할까요?”
“오늘은 바다에 던져.”
“알겠습니다.”
“피비린내가 나면 상어들이 좋아하겠지.”
백설은 창을 내다보았다. 곧 몸종이 던져지고 상어가 보이고 바닷물에 피가 번졌다. 백설은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하더라도 내 앞에 서면 결국 저런 꼴밖에 될 수 없는 것을, 결국 뉘가 거부할 수 있을까?”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그러고 싶은 모양이지.”
“네?”
“아니다.”
백설은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은하를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백성들이 사랑하는 존재였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스러져 버렸으면 했지만 아직 그녀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녀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백설 스스로도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가능했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 텐데.”
백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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