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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이 흘렀다. 궁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시간의 가운데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흑렵은 은하의 곁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일곱 사내들은 궁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국왕의 차도는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만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결과였으니까.
“흑렵.”
“네.”
“그대는 왜 내 곁에 머물지 않는가?”
“다른 이들의 눈이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눈이 두렵다는 것인가?”
“적호의 의술을 통해서 더 이상 폐하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금방이라도 폐하께서 모든 건강을 찾으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여나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저와 그대의 사이를 오해하기라도 한다면 저는 두렵고 죄송해서 견딜 수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두렵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렵의 앞으로 다가와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많이 힘든 모양이로구나.”
“이러지 마십시오.”
“무엇이냐?”
“예?”
“도대체 무엇이 네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것이야? 네가 나에게서 멀어질 이유는 하나도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리 만든 것이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흑렵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벌써 물러가겠다는 것이냐?”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너무 사람들의 눈을 신경을 쓰는 구나. 혹여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을 신경ㅇ르 쓰는 것이냐?”
“그게 무슨.”
“아니다.”
은하는 말을 거두었다. 괜히 흑렵을 의심해서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는 순간 그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를 놓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도 어느 정도 흑렵을 믿어야 했다.
“일곱 사내들을 감시하는 것은 잘 되고 있는가?”
“그들도 아무 것도 찾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정녕 무엇이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다.”
은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국왕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없으니 그녀도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허나 이 궁에 여러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쉽게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대도 이미 몇 개의 비밀 통로를 발견하였고 말이다.”
“예.”
“앞으로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흑렵이 은하의 방에서 나서자 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자 커튼 뒤에 몸을 숨겼던 황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마도 흑렵도 많은 것을 생각을 하셔서 그러신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것 하나 선택을 하기에 이 궁은 너무나도 많은 보기를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공주를 말을 하는 것인가?”
황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은하는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에게로 가야겠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어이 하여서 나를 말리는 것이냐?”
“지금 공주께 찾아간다는 것은 공주께 약점을 보이는 일입니다. 절대로 왕비의 약점을 보여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서서히 사람들의 민심이 옮기고 있습니다. 국왕이 그리도 오래 아프신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 사람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대도 마찬가지군.”
“마마. 그것이 어인 말씀입니까?”
“아니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모두의 말이 맞을 거였다. 지금 여기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는 의미였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이리로 오세요.”
흑렵은 백설의 침대 곁에 누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백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성년이 된 그녀는 싱그러웠다.
“도대체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안다고 사냥꾼이 되신 겁니까? 손에 피를 묻히고 그 괴로운 일을.”
“그것이 나의 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백설은 안쓰러운 눈으로 흑렵을 바라보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흑렵은 백설의 품에서 아이처럼 웅크렸다. 백설은 그런 흑렵을 가만히 토닥였다. 백설의 차가운 품 안에서 흑렵은 가늘게 떨었다.
“도대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랍니까? 이 궁에 정말로 거울이 있는 것은 맞습니까?”
“이 나라에서 거울이 있을 곳은 궁이다. 평범한 마을에 있었다면 오히려 숨기지 못했을 것이야.”
“하지만 왕비도 알지 못하는 것을 도대체 우리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입니까? 이제는 지쳤습니다.”
청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호도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홍호는 청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청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 손을 쳐냈다.
“그래도 여기에 왔는데 우리가 포기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있어야 황금 사과를 찾고 너희들의 외모도 변할 수 있으니.”
“저는 이 외모에 불만이 없습니다.”
남호는 안경을 위로 올리면서 차분히 말했다.
“결국 우리 일곱 사내들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녹호 형님과 청호 형님, 그리고 저와 자호 덕 아닙니까? 형님들처럼 곱상하기만 하면 과연 누가 저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것 상관이 없습니다.”
“너나 그렇겠지.”
청호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황금 사과는 분명히 내가 먼저 발견을 하였는데 도대체 왜 저 형님들 셋이서 그 모든 덕을 본 것인지.”
“청호!”
“알겠습니다.”
녹호의 말에 청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알아내지 않았는가?”
“그나저나 정말로 국왕은 깨우시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공주가 먹인 독이 무엇인지 아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홍호 형님이 약초를 캐고, 적호 형님이 약을 달이면 끝이 나는 일 아닙니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적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국왕을 다시 깨우기에는 공주가 그에게 먹인 독의 양이 지나치게 많네. 그리고 아직 국왕을 깨워서는 안 될 거야. 아직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어내지 못했으니. 국왕이 다시 일어선다면 우리는 궁에서 나서야 할 거야. 그렇다면 더 이상 거울을 찾을 수가 없는 거지. 그럴 수는 없네.”
“앗.”
서고에서 책을 꺼내던 은하는 발을 삐끗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달려오지 않았다.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그저 이런 식으로 죽는다면 다들 만족스럽겠지. 공주의 손에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은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의 옆을 손으로 누르는 순간 딸깍 소리와 함께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곧 은하의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은하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비틀거리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커다란 방에 덜렁 거울 하나가 걸려있었다.
“이게 무슨.”
“어서 오십시오.”
은하는 순간 숨을 들이쉬고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냐?”
은하는 품을 뒤져서 재빨리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작게 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울에 그녀가 비췄다.
“제가 바로 그 거울입니다.”
“거울?”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그 거울말입니다.”
은하는 가만히 거울을 응시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거울에 다가갔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자신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저는 그대가 바라는 것은 모두 대답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세 가지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은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울에 도대체 무슨 귀신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물러나라. 어디 감히 나를 현혹하려고 하는 것이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라?”
“흑렵이 말입니다.”
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울에 비춘 은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가 가장 사랑했던 이. 그리고 사랑하는 이. 그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지금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은 부정할 나위가 없이 바로 국왕이시다. 그런데도 무엄하게!”
“정말 그리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네, 네가 감히!”
“그대의 마음입니다.”
거울 안에 흑렵이 보였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흑렵이 보였다. 은하는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부정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야?”
“왜 흑렵이 왕비를 외면하고 요즘 왕비의 곁에 있지 않은지 아십니까?”
“그야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면 누군가가 오해를 할까 그것이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순진하시군요.”
“무어라?”
“공주입니다.”
“뭐라고?”
“공주란 말입니다.”
은하의 얼굴이 굳었다. 거울은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흑렵과 백설이 다정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단검을 거울을 향해 던졌다. 분명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거울 안으로 단검이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야?”
“저는 사람의 마음으로만 부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비께서는 저를 부수지 않기를 원하시는 군요.”
“부술 것이다. 너를 부술 것이야!”
“그럼 사람들을 불러서 부수십시오.”
“뭐라고?”
“더 보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그대의 사랑하는 딸이 그대가 가장 사랑하던 사내를 품에 안는 모습을 말입니다.”
“네가 꾸며낸 일이다.”
은하는 고개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춰지는 것은 분명히 흑렵과 백설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냥 기분이 아니 좋아서 그렇다.”
은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황호는 쭈뼛쭈뼛 그녀에게 다가서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았다.
“마마.”
“왜 그러는가?”
“저는 여인을 사모할 수 없는 이라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마를 보고 나니 여인도 사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인가?”
은하는 낯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난로에 섰다. 그리고 곧 싱그러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여인이기는 한가 보구나. 그대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차라리 폐하께서 일어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신다면 마마께서도 다시 폐하의 곁으로 가실 것이 아닙니까? 이리도 고운 그대가 말입니다.”
“그런 말은 안 될 말이다.”
황호는 조심스럽게 은하에게로 다가가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황호를 밀어내려던 은하의 움직임이 멈추고 황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덜미의 입을 묻었다. 은하의 가슴께가 들썩이고 황호의 입술이 은하의 쇄골을 스쳐서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그 다음 조심스럽게 그녀의 드레스를 아래로 내렸다.
“이러면 안 된다.”
“잠시만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황호.”
“잠시만 가만히 계시면 되는 겁니다.”
황호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은하를 뉘였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었다.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황호의 단단한 근육에 손을 가져갔다. 황호의 손가락이 은하의 샘을 향하고 은하의 허리는 뒤로 휘어졌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처음으로 나도 누구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은하는 멍하니 자신과 국왕의 그림을 바라봤다. 환하게 웃고 있기는 하지만 저 초상화를 그릴 때도 두 사람은 같이 있지 않았다. 국왕은 그렇게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는 일이 천한 것이라 여겼다.
“한 번만이라도 나도 평범한 여인이 될 수 있다면.”
“제가 곁에 있었을 겁니다.”
“황호.”
“하지만 지금은 마마께서도, 그리고 저도 그저 평범하게 누군가를 바라볼 수는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은하는 고개를 흔들더니 조심스럽게 황호의 목을 끌어당겨서 입을 맞추었다. 마음을 열었다. 흑렵에게도 열지 않은 마음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배신하면 안 됩니다.”
“마마.”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은하는 황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황호는 가만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은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무섭습니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닐까 무섭습니다.”
“그대에게는 거짓을 하나도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셔야 합니다. 정말 그러셔야 합니다.”
“도대체 언제 폐하를 낫게 하실 겁니까?”
“워낙 오래 아프셔서 그렇습니다. 저희도 하루라도 빠르게 낫게 해드리고 싶으나, 아직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저희도 하루라도 빠르게 페하를 낫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은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잔을 적호에게 던졌다. 적호는 숨을 들이쉬고 얼굴에 묻은 포도주를 소매로 훔쳤다.
“무엇이 거짓말이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을 하였는가?”
“마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가지고 있다지?”
“누가 그렇게 말을 하였는지 몰라도 저희는 이 나라를 모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된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다.”
“그대들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예?”
“들여라.”
문이 열리고 포박을 당한 녹호와 청호, 남호, 그리고 자호가 줄줄이 들어왔다. 얼마나 두들겨 맞은 것인지 얼굴에는 피가 마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들이 모두 말을 하였다.”
“이리 고문을 하면 모두 없는 것들까지 다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고문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낸단 말입니까?”
“진실.”
“진실이라 하셨습니까?”
“그래요.”
“도대체 무슨 진실이요!”
적호가 고함을 지르듯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를 노려봤다. 은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주가 독약을 쓰었다지요.”
적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적호는 얼굴에서 그런 기색을 모두 지우고 은하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저보고 이 나라의 공주님을 모함이라도 하라, 그리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진실을 말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대가 쓰는 약초들을 알아보니, 모두 독에 쓰는 해독제였습니다. 아닙니까?”
“해독을 할 수 있다고 하여서 국왕께서 독을 드셨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약초는 여러 효능이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여러 효능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모두 겹치는 하나의 효능이 있더이다. 한 가지 독에만 반응하는 그런 약초들이라서 말이지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약초에 능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왕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욕을 하시고 저희에게 고초를 겪게 하실 거라면 저희는 차라리 숲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국왕께서 깨어나시기를 바랄 뿐이지 다른 목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울을 찾는다고요.”
적호의 얼굴이 굳었다. 적호는 황급히 형제들을 돌아봤다. 형제들은 저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축 늘어져 있었다. 적호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다시 은하를 바라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에게서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그리 말씀을 하신다고 하면 저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물러나세요.”
“예?”
“이 나라에, 이 궁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은 그대들처럼 천한 이들이 가지게 될 물건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 물건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지언정 정말로 궁에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시는 말씀은 저희가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 시간을 끌기라도 하려고 억지로 폐하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데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그런 말씀이라도 하는 겁니까?”
“그럼 아닙니까?”
은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세를 뒤로 조금 더 기대고 오른쪽 검지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이제 시간이 되었는데.”
“무슨 시간이 되었단 말입니까?”
“공주가 쓴 그 약 말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것은 찾으러 갔고. 곧 소식이 들릴 텐데.”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고요해졌다. 잠시 후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왕비의 침소 문이 활짝 열렸다.
“무슨 일인가?”
“폐, 폐하가. 폐하께서 승하하셨나이다. 왕비마마. 국왕 폐하께서 승하를 하셨나이다. 더 이상 숨을 쉬시지 않습니다.”
“그래요?”
은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승하를 하셨군요.”
“마마. 어찌하여서 놀라시지 않는 겁니까?”
“이 자들이 그 범인이라는 사실을 문초하고 있었으니 페하께서 승하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놀랍지 않은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적호는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궁의 경비들이 은하의 침소로 달려왔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설마 천박한 그대들을 내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네들의 잘못이지. 잘못이야. 단 한 번도 그대들이 우리의 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혹여나 그리 생각을 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무어라?”
“저희의 잘못이 아니라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까? 저희가 무슨 말을 하건 믿으실 준비가 아니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지금도 같은 행동을 하시고 싶으신 거겠죠. 저희들에게 이런 식으로 장난을 하고 싶으신 거겠죠.”
“장난이라?”
“그렇습니다.”
“하. 어찌 장난이라는 것인가?”
적호가 비틀비틀 은하에게 다가섰다. 호위들이 검을 뽑아들자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적호는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싸늘하게 웃었다.
“거울이라도 찾으신 겁니까?”
“그대가 그걸 어찌 아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마마께서 이러실 이유가 없지요.”
“어찌하여서?”
“저희들을 신뢰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흑렵도 곁에 없으시니 이리도 잔혹하게 행동을 하시려는 겁니까?”
“뭐라? 네 감히.”
“마마. 달이 차면 기울게 되어 있나이다. 결국 달은 기울어야지요. 지금 저희를 죽여서는 얻으실 수 있는 것을 절반도 얻지 못하실 겁니다. 더 많은 것을 보시고 지금 이러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은하는 차분한 어조로 읊조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저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마마!”
“죽여라.”
“안 됩니다!”
은하의 말에 동생들이 끌려가자 적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적호는 다급히 은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하겠습니다. 정말 뭐든 다 할 테니 아우들을 죽이라는 명은 거두어 주십시오.”
“살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마마. 그게 무슨.”
“신이 내린 의인이라 하던데 말이다.”
“그렇다고 한들 어찌 제가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마. 절대로 안 됩니다.”
“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묻지. 그대가 대신 죽겠는가?”
“네?”
“저들 대신 말이다.”
은하는 뒤로 물러나서 의자에 앉은 후 가만히 적호를 응시했다.
“저 하나만 사라진다면 아우들의 안전은 약속해주실 수 있는 겁니까? 정녕 그러실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다면.”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은하는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봤다. 백설이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그녀의 침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은하는 씩 웃더니 고개를 더욱 높이 들었다.
“아니 공주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지금 국왕께서 승하하셨다는데 여기에 오실 정신이 있습니까?”
“어머니야 말로 그러실 정신이 있습니까? 지금 아버지꼐서.”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 자들을 살릴까요? 죽일까요? 결국 폐하의 병을 낫게 하겠다고 궁에 들어온 이들인데 아무런 것도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공주는 이들의 목숨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아버지를 이 날까지 살린 분입니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 죽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요?”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모두 죽여라.”
“어머니!”
“죽이라고!”
동생들이 끌려 나가자 적호는 미친 듯 그리로 달려갔지만 호위병들에 막혔다. 적호는 절규했지만 은하는 미동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렵. 이리로 나오게.”
백설의 뒤에 있던 흑렵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섰다. 은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에 서고 싶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곱 사내들이 없다면 공주가 힘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네도 알 터인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우들.”
“마마.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대도 한 패였지요.”
은하는 차가운 눈으로 황호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황호에게 다가가서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짝 소리가 침소에 울리고 은하는 손을 왼손으로 어루만지고 등을 돌렸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였습니까?”
“마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죽이세요.”
은하는 입을 꼭 다물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바로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내가 몰랐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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