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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도망가셔야 합니다.”
“저는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또 다른 이들이 이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일이라면 제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씀입니까!”
“흑렵.”
흑렵이 고함을 지르자 백설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흑렵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절대로 그렇게 쉽게 생각을 하셔서는 안 될 겁니다. 여왕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끝을 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 끝을 내라고 하세요.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말입니다.”
“제가 무섭습니다.”
“그대는 내가 지키겠습니다.”
“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공주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두려운 것입니다. 혹여나 여왕이 그대에게 무슨 일이라도 할까 저는 그것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제가 무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어찌 그리 태평하신 겝니까?”
흑렵의 검은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자 백설은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제야 제 말을 들으시려는 거군요.”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흑렵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나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 혼자서 도대체 무엇을 바라기 위해서 이곳을 떠난단 말입니까? 그대가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목숨 하나 유지하더라도 그대가 없더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대가 내가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렵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미천한 사냥꾼일 따름이고, 그대는 일국의 공주입니다.”
“그게 무엇이 어때서요? 그대는 일국의 공주가 사랑하는 이입니다.”
“사랑이요?”
“그렇습니다.”
백설은 흑렵의 목을 끌어당겨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고 가볍게 입을 한 번 더 맞춘 후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흑렵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뒤로 살짝 밀었다.
“저도 그대가 저를 사랑해주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내게 이러시는 겁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공주는 목숨을 지키셔야만 합니다.”
“그러니 같이 가요. 같이 가서 목숨을 지켜요.”
“우리 둘이 같이 가면 목숨을 지킬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서 그렇습니까?”
“여왕이 그리 보지 않을 테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제발.”
흑렵은 살짝 이를 드러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공주가 모든 아픔을 다 감당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있고 다른 이들도 있습니다. 일단 숲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숲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일곱 사내들 말입니다.”
“그들이 어찌?”
“은혜를 갚기 바라고 있습니다.”
백설은 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고작 그런 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고 그들을 아프게 했다. 자신은 절대로 용서를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흑렵 그대라도 가서 사세요.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말씀을 하세요.”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테니까요.”
“그러지 마세요.”
흑렵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그대와 함께 갔다고 하면 다들 웃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하느냐고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이 싫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만일 목숨을 비루하게라도 유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흑렵 그대와 함께여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대가 물러나는 것은 보지 않을 겁니다.”
“국왕을 닮으셨습니다.”
“아버지를 아시는 겁니까?”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흑렵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늘 그 분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제가 왕비의 곁에 있는 것을 무어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잠시 누워계시다 의식을 찾으셨던 순간에도 저에게 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군요. 한 번도 그런 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늘 정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아니 정이 없다기 보다는 정을 줄 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그냥 그런 어른이셨으니까요.”
“그러니 나를 버리고 가지 말아요.”
흑렵은 싱긋 웃고는 백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공주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버리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공주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킬 수가 없으니 누군가에게 바란다고 부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디 견디셔야 합니다.”
“내가 그대가 없이 어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대가 없이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까?”
“일곱 사내들이 지킬 겁니다.”
“허나.”
“그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백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렵의 품에 안겼다. 가늘게 떨리는 백설의 등을 쓸어내리는 흑렵의 등도 떨렸다.
“황금사과?”
“이 성에 숨겨져 있습니다.”
은하는 팔짱을 끼고 엄지를 물었다.
“도대체 그게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거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 궁에 숨겨져 있는 것을 아는 주제에 황금사과가 결정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냐? 네가 정녕 내가 어찌 할 수 없다고 나를 무시하고 능멸하려는 게야?”
“거울은 인간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은하는 침을 삼키고 가만히 거울을 응시했다.
“그래서 네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저는 황금사과를 비출 수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오직 저만이 황금사과를 비출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곱 사내들이 저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있어야 황금사과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 그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예.”
“그런데 그대는 모른다.”
은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아. 여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 테니까.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허나 조금 더 많은 것을 가지신다면 더 이상 그 누구도 여왕에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조심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까짓 손가락질이 도대체 무슨 대수라고 그러는 것이야? 손가락질을 아무리 많이 한들 그들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 아니지. 절대로 아니지. 그들은 나를 이길 수가 없지. 아무도 나를 이길 수가 없지.”
“하지만.”
“무엇이 하지만이냐!”
“여왕님께서 지금 잘못 생각하시는 것은 온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바로 공주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화가 나고 견딜 수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공주가 적합한 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까짓 피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허나 모두 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니 그대의 말은 고귀한 혈통의 피가 흐르지 않는 내가 적합한 자가 아니라고 온 백성들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은하는 입을 실룩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을 적합한 군주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싫다고 하더라도 그게 진실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도대체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나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하더라도 잘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들은 나를 이길 수가 없을 테다. 절대로.”
“허나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이게 무슨 일입니까?”
“공주님.”
“미안해요.”
백설은 진심으로 미안한 눈으로 일곱 사내들을 바라봤다. 여기에 와서 자칫하다가는 이들에게도 큰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와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이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여왕이 이곳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이 나라에서 나를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신 이후로 저희의 목숨은 저희의 것이 아니라 공주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주를 도와드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나저나 시장하거나 그러시지는 않습니까?”
“네.”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백설에게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백설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 내가 있으면 그대들에게 위협이 갈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그대들이 나를 좀 도와주세요.”
“무엇을 도우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우기까지요. 지금은 아직 내가 많이 모자라지만 이제 내가 이길 수 있도록. 제발 부탁드립니다. 일곱 사내들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공주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꼭 우리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까?”
“압니다. 내가 그대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공주님을 우리가 도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대들이어야만 합니다.”
백설의 단호한 표정에 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백설을 응시했다.
“저는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중심에 공주가 있다면 말입니다.”
“형님.”
“제 아비를 독살한 자다.”
“그것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백설은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저었다.
“허나 왕비의 품에 빠져서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했던 일입니다. 지금은 제 아버지를 그리 만든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 후회하실 것이 없습니다.”
“황호!”
“진실은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진실이라니요?”
“여왕이 죽인 것입니다.”
백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그, 그게 무슨.”
“공주가 드린 약으로 국왕은 그저 편찮기만 할 뿐 더 이상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왕비가 넣은 독약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권력을 취하기를 바랐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요. 가능한 일이지요.”
“말도 안 돼. 나는 내가 했다고.”
“공주가 한 것도 맞습니다.”
적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애초에 공주가 국왕을 병약하게 하지 않았다면 고작 그 정도 약으로 쓰러지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래서 저는 공주님의 편이 될 겁니다.”
“황호!”
적호가 자신의 이름을 볼렀건만 황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백설의 곁에 섰다. 적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숲이 우리를 어찌 받은 것인지 모르는 것인가?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더 이상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맹세를 해서 숲에 들어온 거라는 것을 잊은 게야?”
“허나 이 숲이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주와 우리가 만난 것도 결국 인연입니다. 더 이상 숲의 말을 듣고 행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숲에 있어야 하는 겁니ᄁᆞ?”
“숲이 우리를 살렸으니까!”
“저기 나 때문에.”
“저는 공주를 도울 겁니다.”
황호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서 말했다.
“아무리 형님이 뭐라고 하셔도 저는 공주의 편이 될 것입니다.”
“여왕과 칼을 맞대겠다. 너는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것이냐? 여왕과 맞대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게야?”
“꼭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여왕이 생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가서야만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저희도 하겠습니다,”
“너희들.”
홍호를 제외한 이들이 모두 황호의 편에 서자 적흐는 미간을 찌푸렸다. 홍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이 숲에서 살게 되면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이 그저 지금처럼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굳이 공주의 편을 들겠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목숨이 끝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지켜준 이 숲에서 머물지 않고 공주를 따르겠다는 것인가?”
“예.”
“도대체 왜?”
적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이래야 한단 말인가?”
“공주는 우리들을 구했습니다.”
“애초에 공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죽을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공주가 어서프게 흑렵을 취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게 저의 또 다른 부탁입니다.”
백설은 황급히 끼어들었다.
“흑렵을 구해야 합니다. 그를 구해야만 합니다.”
백설의 간절한 표정에 적호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백설을 지나서 백설의 등 뒤에 벽에 박혔다. 그러나 백설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적호를 응시했다.
“겨우 이 정도 위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했더라면 애초에 이 숲으로 올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숲에 쫓겨온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압니다. 다 알고 있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대들을 궁으로 들이겠습니다.”
“궁이요?”
적호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궁 전혀 가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누굴 위한 거란 말입니까? 그 궁에 가면 뭐라도 달라진단 말입니까!”
“궁에 가면 달라지지요.”
홍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과를 찾으면 뭐든 다 해결이 되지요.”
“아우님.”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애초에 목표로 두었던 것은 찾지도 못하고 이렇게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상황이 용납이 되십니까?”
“용납이 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주를 돕는 일입니다.”
“그래. 그래서 세금을 낼 수가 없다?”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어서 농사 자체가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물고기들이 허옇게 배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폐하.”
“그게 나랑 상관이 있는 겐가?”
은하는 도도한 표정으로 신하를 바라보면서 오른손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하품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다음.”
“폐하. 이대로 넘기시면 안 됩니다.”
“물러나라 하였다.”
“백성들을 외면하셔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물러나라 하였다!”
“민심이 지금 어찌 되셨는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입니까? 모두 여왕께서 공주를 몰아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하면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들이 폐하께 충성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하루라도 빠르게 없애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말이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
“네.”
“맞다.”
은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다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내가 쫓았어.”
“그게 무슨.”
“공주가 있으면 이 궁에 사람들 중 과연 누가 내 말을 듣는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공주를 쫓았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무엇이 말이냐?”
“그런 일을 하신 것을 알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 겝니까? 돌아가신 국왕께 죄송하지 않으십니까?”
“죽여라.”
“폐하!”
“어서 죽여라!”
호위 무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검을 뽑아서 신하의 등을 베었다. 신하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은하는 코를 막았다.
“역겨운 냄새. 그 동안 공주의 밑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다가 이제 그것을 토해내야 하니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게로군.”
“다음 신하를 들일까요?”
“되었다.”
은하는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 들어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을 테지. 통촉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무시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있어야지 페하의 자리도 유지가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백작이니 공작이니 그런 것들 전부 다 왕국이 유지가 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 아니던가?”
“하오나.”
“되었다.”
은하는 하품을 하면서 몸을 뒤로 기댔다.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제 바빠서 말이다. 공주를 이 성에서 내보낸 그 말도 안 되는 녀석을 고문할 계획도 세워야 하니. 지금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건가?”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
은하는 가늘게 신음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 서거라.”
“꼴이 말이 아니군.”
“이런 모습을 폐하께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은하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흑렵의 턱을 쥐어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엷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네 몸 상태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
“공주님이 어디에 갔는지 정녕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다면 여왕께 왜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내가 공주를 찾으면 그녀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으니 지금 나를 속이려고 드는 거겠지. 정녕 나를 바보로 생각을 하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왕 폐하께 거짓을 고하고자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공주께서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면 지금이라도 바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괜히 제 입에서 나온 말도 안 되는 말에 어설픈 곳이라도 찾다가 병사들이 지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혹여나 그 소식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여왕이 공주를 찾아서 없애려고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로군. 애써 돌려서 말을 하더라도 내가 그 마음을 모를 것 같은가?”
은하는 쿡쿡 거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가만히 흑렵을 응시했다.
“그대가 지금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그대의 목숨이다. 말도 안 되는 공주 하나 살려주기 위해서 노력을 해봤자. 아무도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그대는 그저 지금 당장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그런 가벼운 사내로만 보이니 말이다. 이래도 상관이 없는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그렇겠지. 이미 공주의 마음에 들었으니 조금만 버티면 공주가 돌아와서 구해주기라도 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런 거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혹여나 공주께서 진실로 도망이라도 가신 거라면 도대체 왜 궁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겁니까?”
“이 모든 것을 다시 자신의 손에 넣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겠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 이 많은 것을 한 번 잃은 사람이 다시 한 번 가지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공주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혹여나 돌아오신다고 하더라도 권력이 아니라 백성을 생각해서 돌아오시는 것일 겁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을 하거라. 네가 아무리 여기에서 지껄여도 공주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테니.”
은하는 가만히 흑렵을 노려봤다. 그러나 흑렵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은하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새어나왔건만 흑렵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구나.”
“더 이상 여왕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렇습니다. 그 자리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주를 마음에 품는 일은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게야? 정녕 네가 그렇게 생각을 해서 지금 나를 능멸하고 다시 또 공주의 품으로 갈.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였더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여왕 폐하께서 아무리 저를 닦달하시더라도 원하시는 것은 이끌어내실 수 없다는 겁니다.”
흑렵의 엷은 미소에 은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면서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새까만 그녀의 옷에 그녀의 피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흑렵은 그런 은하를 그제야 안타깝게 바라봤다.
“도대체 검은 옷을 언제 벗으시려는 겁니까? 그 옷이 여왕 폐하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서 입고 있는 것이야. 내가 이 옷을 입는 것이 무슨 상관이라 생각을 하는 게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면 성난 백성들이 폐하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저 내가 공주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그 사실이 두려울 따름이지.”
은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 봤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대지는 바싹 말라있었다. 물레방아는 더 이상 돌지 않았고 짐승의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가? 이 세상이 얼마나 고요한지. 이 고요함은 예전부터 최고의 음악이라 하지 않았던가?”
“진정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고요함이 아니라 적막.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을씨년 아닙니까?”
“그래서 다르다는 것인가?”
“다릅니다.”
“그래?”
은하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흑렵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이라도 어서 공주가 계신 곳을 말씀을 하세요. 혹여나 공주가 말도 안 되는 짓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겝니까? 공주가 그대를 배신할 것이 혹여나 두렵지도 않다는 말입니까?”
“제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제야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절대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뒤늦게 가지게 된 이들이 그 손에 쥔 것들을 절대로 놓지 않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곤 하지요. 지금 흑렵 그대가 하는 일이 꼭 그것입니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아이 말입니다. 그 아이를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간단하다. 어떻게요?”
“여왕의 마음을 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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