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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엇이요?”
“그들을 괴롭히시는 이유 말입니다!”
“괴롭힌다.”
은하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백설을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네가 뭐 대단한 자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게냐?”
“어머니.”
“네가 언제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늘 나를 무시하고 그러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새장으로 가서 새를 손에 쥐고 그대로 꽉 쥐었다. 피가 아래로 흐르고 은하는 그것을 혀로 살짝 핥고 백설을 돌아봤다.
“네가 원하는 것은 이제 이루어주지 않을 테다.”
“어머니.”
“그 동안은 폐하께서 살아계셨으니, 당연히 네가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 거였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나라는 나의 것이다.”
백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하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어머니의 것이란 말입니까? 이 나라는 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차갑게 사람들을 대하고도 여전히 그들이 너의 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게냐? 절대로 아니지.”
“그게 무슨.”
“이제 이 나라는 내가 지배할 것이다. 진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좋습니다. 이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리시건 뭐든 다 하세요. 다만 그들을 죽이지는 마세요. 살려주세요.”
“싫다.”
“무엇이 싫단 말씀입니까?”
“흑렵을 품었다지?”
은하의 말에 백설은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러다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가만히 은하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잘못이라는 말씀입니까?”
“잘못이 아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처자와 사내가 사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시는 어머니가 지금 더욱 우스운 것 아닙니까? 도대체 그것이 문제가 될 부분이 어디에 있다고 지금 그러시는 겁니까? 말씀을 해보세요.”
“문제가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그 문제가 아닌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공주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알아 듣는 겁니까? 공주. 절대로 아니에요. 그래서는 아니 되었던 겁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백설은 언성을 높였다. 은하는 후후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람이니까.”
“뭐라고요?”
“품에 안거나 그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궁에서 내가 유일하게 의지를 하던 사내를 그대가 가져갔습니다.”
“어머니께서 유리하게 궁에서 의지를 해야 하는 사람은 그 모자란 사냥꾼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여야 했습니다!”
“공주도 알지 않습니까?”
은하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은하는 상대방의 심장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백설을 응시했다.
“단 한 번도 국왕께서 나를 사모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저 나의 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싶어서 궁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요.”
“이런 식으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아, 공주가 무엇을 오해를 하고 계시는 군요.”
“제가 무엇을 오해한다는 것입니까?”
“그 동안 공주가 내게 함부로 굴었던 것은 내가 봐주어서 가능했던 것이에요. 내가 공주를 죽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 가느다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그래도 그대가 내 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야. 비록 내 친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오랜 시간 너를 봤으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 건방은 떨지 마. 네 자리는 거기가 아니야.”
“어머니.”
“그런 표정도 짓지 마.”
은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다가 싱긋 웃더니 백설에게 다가섰다. 백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 벽에 닿았다.
“이런, 갈 곳이 없네.”
“이러지 마세요.”
“딱 한 사람을 살리겠습니다.”
“네?”
“그대가 바라는 사람. 한 사람. 살리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대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백설의 눈이 크게 변했다. 은하는 싸늘하게 웃더니 기다란 손톱을 백설의 목에 가져갔다. 그 뾰족한 손톱에 백설의 가녀린 피부가 긁혀 피가 새었다.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일곱 사내들, 흑렵, 그리고 그대 중에 한 사람을 고르라는 이야기입니다.”
“흑렵도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지요.”
“어떻게 그런.”
“내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어머니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어머니의 사람이었던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러는 겁니다.”
“네?”
“나를 배신했으니까요.”
“그게 어떻게 배신입니까?”
“배신이지요.”
은하는 새를 죽인 손으로 가만히 백설의 목을 졸랐다. 피 비린내에 백설은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용감해요.”
“어머니.”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여왕 페하.”
“여왕이요?”
“그러죠.”
“여왕이라는 단어가 지금 어머니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럼요.”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종을 울렸다. 시종들이 들어와서 허리를 숙였다.
“공주께서 이전의 잔혹한 심성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저 가녀린 새를 가져다 잘 묻어주도록 하세요.”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공주. 이 어미는 마음이 아픕니다. 여왕이 되어야 한다니요? 그래야 공주도 나중에 여왕의 지위에 오르는데 사람들의 반발이 없을 거라니요? 그래서 이 어미를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하고 싶으시기라도 한 겁니까?”
“그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공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런 것 아닙니까?”
은하의 장난기가 가득한 음성에 백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런 식으로 저를 궁에서 몰아내시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이 궁에 권력을 지닌 사람이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도 제게 이러신다고요?”
“요즘 흑렵과 지내시느라 진실을 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사람들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옮겨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더 이상 공주에게 그 사람들의 관심이 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시종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주는 흑렵을 택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을 위할 수 있는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공주는 그 모든 권력을 다 빼앗긴 것입니다. 이제 다들 사람들은 그대에게 충성하지 않아요. 일곱 사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것이 바로 그 이유겠지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아. 그랬습니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 꼬리를 올리고 백설을 응시했다.
“그래서 선택을 했습니까?”
“무슨 선택을 말입니까?”
“누구를 살릴지 말입니다.”
“적어도 당신은 아닙니다.”
“이거 지금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겁니까?”
은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작게 헛기침을 하고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공주가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이미 사람들은 공주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 식으로 저를 모함하시기라도 하겠다는. 뭐 그런 이야기라도 지금 하시고 싶은 건가요? 그런 거예요?”
“모함이 아니라. 사실이죠.”
은하는 옆에 있던 검을 뽑아 들어서 백설의 목에 가져갔다. 그리고 피가 한 방울 흐르자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칼을 거두었다.
“공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주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그 동안 내가 공주를 너무 많이 봐주고 있었지요.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지내지는 않을 겁니다. 더 이상 공주에게 만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에요. 나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하면서 지낼 겁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것이 뭐죠?”
“흑렵.”
“어머니께서 그 사람을 선택을 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가련한 그 사람을 저의 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게 설마 죄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죄입니다.”
은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고 손을 들었다.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백설을 거칠게 끌어냈다.
“지금 그 자리에 계시면 모든 것을 다 가지셨다고 생각을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곧 모두 다 잃으실 겁니다. 모두!”
“어서 치우세요. 그리고 모두 물러나라.”
침소가 비자 은하는 한숨을 내쉬고 벽난로에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손을 움직이고 벽난로 위의 시계를 움직였다. 벽난로 뒤의 공간이 드러나고 서재에서 가지고 온 거울이 빛나며 그녀를 비추었다.
“거울아. 거울아.”
“예. 왕비님.”
“이제 나는 여왕이 되었다.”
“아직 왕비에 자리에 계십니다.”
“그런 건 확실하군.”
“저는 현재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은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다 물어보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만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물론 그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바라는 것은 모두 다 보는 것이었지만.
“흑렵을 보여주거라.”
거울에서 흑렵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은하의 마음이 묵직해졌다.
“도대체 저 자는 왜 내가 아니라 백설을.”
“왕비께서 애정을 주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찌 물으신 겁니까?”
“물은 것이 아니다.”
은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뒤에 의자에 앉아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일곱 사내들을 보여주게.”
거울에는 형장에 매어있는 일곱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은하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던 이들이 저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거울아. 거울아. 재미있지 않느냐?”
“무엇이 재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일곱 사내들 말이다. 결국에는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찾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겠구나.”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은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설이 검을 들어서 일곱 사내들을 풀어주고 있었다. 은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왜 저 것을 아무도 막지 않는 게냐?”
“이 나라의 공주시니까 그렇습니다.”
“뭐라고?”
“아무리 공주께서 악행을 저지르셨다고 하더라도 궁에 사람들은 왕비께서 이 나라의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주께서 그 권리를 가져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주께서 저리 행동을 하시더라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건방진! 내가 공주를!”
“놓아주십시오.”
“뭐라고?”
은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곧바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거울을 응시했다. 백설이 주위를 둘러보고 일곱 사내들을 풀어주는데 아무도 막지 않았다. 다들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 동안 나쁜 짓을 한 것은 내가 아니었는데. 나는 공주의 악행을 막기만 했을 뿐인데. 도대체 어이 하여서 나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그대의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뭐라고? 내 마음이 선하지가 않다니!”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공주를 걱정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단 한 번도 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을 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네 감히!”
은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거울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하는 거울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거울에 무슨 짓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왕비께서는 다른 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행동을 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다 보였다?”
“그렇습니다.”
“누가 봤단 말인가?”
“모든 이들이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왕비의 눈에 번뜩이는 그 살기를 말입니다.”
은하는 침을 삼키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바닥에 쪼그렸다.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살기를 품은 적이 없다. 그저 이 세상에 여인 혼자 사는 것이 두려웠을 따름이야.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마음을 먹은 적이 없어.”
“국왕이 승하하시고 가장 마음이 놓이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내 탓이 아니야!”
은하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사랑을 주신 적이 없는 분이다. 그런 분의 곁에 있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네가 아느냐? 단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아니 살아있은 적이 없는 고작 거울 네 주제에 알고 있는 것이야!”
“왕비께서는 압니까?”
“뭐라고?”
“결국 국왕이 왕비에 사랑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왕비가 그 사랑을 거절하고 피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국왕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국왕은 그녀를 위해서 특별히 정원을 꾸며줬을 따름이었고, 역모를 꾀하던 그녀의 아비를 살려줬을 따름이었다. 직접 브로치를 만들어서 그녀에게 건네주기도 하였고,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그녀와의 식사 자리에서는 늘 정찬으로 준비를 하게 뒀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사람들의 눈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절대로 아니었다. 국왕은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는 사내였다.
“여전히 부정하시는 군요.”
“부정이 아니라 이게 진실이다.”
“진실이란 결국 믿는 사람 마음이지요.”
“뭐라고?”
“왕비께서 그렇게 세상을 보고 게셨으니 그저 그렇게만 보인 겁니다. 사실은 그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던 거죠.”
은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벽난로 뒤의 숨겨진 방을 빠져나갔다. 거울에는 곧 아무 것도 비추지 않았다.
“위험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흑렵.”
“그러다 여왕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소각로에 태웠다고 이미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백설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힘없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일부러 그곳까지 가셔서 확인을 하실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거지요.”
“왜 그들을 도우신 겁니까?”
“지금 제 편이 되줄 사람들이니까요.”
“저도 공주님의 곁에 있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그대는 내 편이 아니라 어머니의 편이 아니었습니까?”
흑렵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자 백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렵의 품에 조심스럽게 기댔다.
“그대가 나를 품는 동안에도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름답지요. 그 분은. 비록 내 친어머니가 아니시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에는 그 분이 나의 친어머니라도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는 공주를 걱정한 것입니다. 그 분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니 그저 모정이 그리워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애정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애정이라, 어머니께서 애정도 주실 줄 아십니까?”
“예.”
“그렇군요.”
백설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침대에 누웠다.
“어머니께서 어디까지 잔혹해지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주님만 하시겠습니까?”
“지금 나를 나무라는 것이지요?”
“제가 어찌 공주님을 나무라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다 잘못한 겁니다. 내가 왜 그리도 철이 없었던 것인지. 내가 왜 그 동안 그리도 악했던 것인지.”
“무엇입니까?”
“네?”
흑렵은 가만히 백설의 눈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낯선 태도에 백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공주님께서는 악행을 저지르셨습니다.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그 모든 것들을 후회하시고 그러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대입니다.”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백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렵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나니, 누군가의 마음에 담겨 있는 이를 죽이거나 하는 일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공주님.”
“나는 그대를 잃지 않을 겁니다.”
“저도 공주님을 지켜드릴 겁니다.”
“그대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이 그대의 목숨을 내놓고서야 가능한 것이라면 나는 바라지 않을 겁니다.”
“공주님.”
“그저 나를 보고 계세요.”
백설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조심스럽게 흑렵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주를 죽여라.”
“네?”
“공주를 죽이라는 말이다.”
은하의 침소로 들어온 흑렵은 침을 삼켰다. 은하는 표정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공주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죽일 것이다. 그대의 숨을 끊어버릴 것이야. 그러니 공주를 죽여라.”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은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이 하여서 그럴 수 없단 말인가?”
“공주님께서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공주님을 죽이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공주님께서 어머니이신 그대에게 무엇 하나라도 실수를 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다는 것 왕비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여왕이다.”
은하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면서 말했다. 흑렵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이제 국왕이 게시지 않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 나라의 모든 권리는 내 손에 들어왔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만 그런 것이 아니지. 모두들 나를 무시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지. 건방진 것들.”
“조금이라도 더 아량을 베푸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이전에 공주께서 하시던 일들을 마뜩찮아 하시지 않았던 것이 바로 여왕이십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여왕 폐하.”
“이제는 내 세상이다. 그러니 가서 공주를 죽여.”
은하의 눈이 가만히 흑렵을 응시했다. 흑렵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은하는 그런 흑렵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진짜 사랑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지금 나를 원망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이 그러는 것인가?”
“그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유?”
“공주님께 그러시는 이유 말씀입니다.”
“정말로 그대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네.”
“정녕 그대가!”
은하의 목에 핏대가 섰다. 은하는 검을 들고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들었다가 겨우 신음을 흘리면서 칼을 내렸다.
“나는 그대를 아낀다. 그래서 그대가 쉽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래서 지금 그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께서는 여왕의 자녀십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딸입니다.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한 것은 잊었더냐? 먼저 내 목을 조르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을 잊은 게냐?”
“그렇다 한들 똑같이 행동을 하시는 것이 과연 여왕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순간 흑렵의 옆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칼이 내리쳐졌다. 바닥에는 긁힌 자국이 남고, 불꽃까지 튀었다.
“한 번만 더 그 입을 함부로 놀리면 내 그대를 절데로 용서하지 않을 게다. 명심하고 있거라.”
“어이 하여서 아랫사람이 하는 바른 말을 듣지 않으시려고 하시는 겝니까? 이 나라를 어질게 다스리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왕께서 하시는 일이 어질게 다스리는 일이 된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물러가거라.”
“여왕 페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더냐! 밖에 아무도 없더냐.”
신하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은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리키는 흑렵을 붙잡고 일으켰다.
“이것 놓거라.”
“일단 물러나시지요. 지금 여왕님의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으십니다.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조심한단 말이냐?”
“어서 치우지 못할까!”
“알겠습니다.”
흑렵이 끌려 나가고 나서야 은하는 눈을 감았다.
“정녕 그대가 나를 이리도 아프게 할 것이란 말인가? 정녕 그대가 나에게 이래도 된단 말이던가?”
“이것 놓으시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그러오?”
“여왕은 이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전의 왕비가 아닙니다. 아무리 흑렵이라고 하시더라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젠장.”
흑렵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으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게 공주님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이를 정녕 여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지금 곁에 두고 계시는 공주님도 이전에는 그러셨습니다. 결국 다를 것은 하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뭐라고요?”
흑렵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공주님과 숲으로 가세요.”
“절대로 공주님을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시종은 입에 검지를 가져가고 고개를 저었다.
“숲에 가면 일곱 사내들이 공주님을 도와드릴 겁니다. 그래도 공주님 덕에 목숨을 구했으니 말입니다.”
“그 자들의 도움을 다시 받으라는 것입니까?”
“지금으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허나.”
“오직 그대만 할 수 있습니다.”
시종의 말에 흑렵은 끙끙 거리면서 미간을 모으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일단 여왕을 속여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몰래 떠나십시오.”
“몰래요?”
“밤에 떠나신다면 아무 것도 모를 겁니다. 아무리 여왕이라고 하더라도 밤에까지 깨어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밤에 가셔야 합니다. 아무도 눈을 뜨지 않은. 심지어 올빼미도 자고 있는 그 밤에 가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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