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방] 야만적인 엘리스 씨
확실히 그다지 친절한 소설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도 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의미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소설은 다른 그 어떤 나라의 소설들에 비해서 다소 진지한 느낌입니다. 특히나 [야만적인 앨리스 씨]는 그 앞에 서있는 느낌을 주는 작품인데요. 폭력성을 가득 담은 공간에서 자랄 수밖에 없는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묘한 먹먹함을 줍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사실 어떠한 슬픔 같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소간에 무심함? 그러한 것도 같이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요? 분명히 낯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서글프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 역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위로가 필요한 환경에서 위로가 필요한 형제에게 사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않습니다. 재개발이 되기 일보 직전인 그곳을 마치 환상의 공간처럼 그려놓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환상적인 공간이라기 보다는 환상을 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알아서 살 수는 없는 공간이니까요. 누구에게는 그곳이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지만 어린 아이들이 살기에는 그 어느 장소보다도 지옥과도 같았을 겁니다. 특히나 학대를 하는 부모 아래에서는 더더욱 그런 거겠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 형제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그냥 그들이 알아서 아이를 보육하는 거라 믿으며. 자신들과 그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말을 하면서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의 삶은 기이하면서도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아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냥 평범하게 덤덤하게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러한 삶은 그저 요원하기만 합니다. 형제는 서로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오직 서로가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죠. 아무리 가혹한 학대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생의 투정을 들으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존재. 멍이 들어서 온 몸이 퉁퉁 부었으면서도 먹기 직전에 두들겨 맞는 개의 신세와 닮았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이 아이들의 아픔은 그냥 먹먹합니다. 하지만 형제는 그곳에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가상의 세계처럼 그려진 공간에서 현실의 아픔이 그려진다는 것이 참 묘한 느낌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지금도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것 같거든요. 분명히 작가는 아주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냅니다. 하지만 작가가 만들어내서 소설에서만 살아있을 것 같은 고모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그러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수도 없이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형제의 그런 외침에 대해서 자세하게 듣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단언하며 그들을 외면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픈 것들이라며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순간 형제는 지금도 서로를 위로하며 죽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다음 우수블로거 권순재 ksjdo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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