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장거리 연애
“집은 안 빼고요?”
“네.”
한나는 짐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은 내려와야 하는데 그래도 여기에서 하루는 자고 가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아서요.”
“피곤하지 않겠어요?”
“꽨찮아요.”
한나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오복규 씨야 말로 지금 여기에서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우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이 있잖아요.”
“너무 부려먹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복규는 한나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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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를 부른 거야?”
“응.”
“미치겠네.”
태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침부터?”
“오늘 일요일이잖아.”
“그런데?”
“보건소 안 열잖아.”
태민은 입을 쭉 내밀었다.
“내가 진짜 서운해서 살 수가 없다. 도대체 누나는 나에게 왜 이러냐?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그러냐?”
“그렇다.”
한나는 태민의 양 볼을 주욱 늘렸다.
“하이 마.”
“하이 마래. 하이 마. 아우 귀여워.”
“하지 말라고.”
태민은 한나의 손을 밀치고 볼을 부풀렸다. 한나는 그런 태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마실래?”
“밥이나 줘.”
“밥도 안 먹었어?”
“지금 아침 아홉 시거든?”
“여기 사람들은 벌써 밥 다 먹고 했다. 너는 도대체 여기에 뭘 맞추고 있는 거야? 엄청 게을러요.”
“자기는 뭐 여기에 엄청나게 동화가 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자기도 하나 안 다르면서.”
“그래도 다르지.”
“뭐가?”
“마인드가.”
한나의 대답에 태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양심도 없다.”
“내가 왜?”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
“어.”
“얼씨구.”
“밥 먹고 하자. 밥.”
한나는 씩 웃으면서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태민은 그런 한나가 미덥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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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누나가 다 한 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럼 그렇지.”
한나의 대답에 태민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한나는 입을 내밀고 태민의 머리를 숟가락으로 때렸다.
“악, 왜 그래?”
“미워서 그런다.”
한나는 국그릇을 건네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를 너무 무시하고 그래요. 아무리 내가 하지 않은 거라고 해도 그런 반응은 너무한 거지.”
“뭐가? 사온 거잖아.”
“아니거든.”
“그럼?”
“오복규 씨 어머니 작품.”
“그래?”
태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말랭이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오독오독하면서도 달콤 매콤함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다.”
“그렇지? 여기 참외 장아찌도 먹어봐.”
“참외로 장아찌도 해?”
“어. 완전 맛있어.”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참외 장아찌에 태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저 과일로만 먹는다고 생각을 했던 참외를 이런 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다른 반찬들도 모두 훌륭했다.
“솜씨가 좋으시네?”
“그렇지.”
“아니 나는 그 사람 어머니를 칭찬을 한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 누나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러냐?”
“뭐. 내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니까?”
“헛소리.”
“뭘 그렇게까지 반응해?”
“뭐 얼마나 많났다고 결혼 이야기야?”
“오래 만났다고 결혼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고. 짧게 만났다고 해서 결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그 사람을 만나면 되게 편하게 느껴지고 그래. 그게 뭐 나쁜 것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거 남자들 은근히 싫어한다.”
“어?”
태민의 말에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부담스럽잖아.”
“뭐가?”
“막 집착스럽다고 해야 할까?”
“설마.”
“진짜로.”
한나는 입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태민을 잠시 바라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은 못 믿어.”
“얼렐레?”
“네가 어디 남자니?”
“그럼 내가 뭔데?”
“꼬맹이.”
“누나.”
“아우, 시끄러워.”
물을 마시면서 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태민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음녀서 괜히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나 정말 모르겠다. 그나저나 서울로 가면 여기 제대로 올 수 있을지. 그것도 하나 모르겠어.”
“그래도 가야지.”
“가기 싫다.”
“이상해.”
“뭐가?”
“이제 정말로 누나를 위해서 기회가 열리는 거 아니야? 서울에서도 누나가 정말로 능력이 있으니까 부르는 거잖아. 이제 더 이상 무시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거기를 왜 가기 싫어하는 건데?”
“아무리 능력이 있어서 부르는 거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거기에 내 의지는 하나도 없는 거잖아. 누가 부르면 가야 하고. 다시 가라고 하면 와야 하는 거고. 그런 삶 되게 이상하지 않니?”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태민의 어른스러운 말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너무나도 당연한 거지만 낯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너무나도 당연한 일에서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다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불안핟고 하니까.”
“나도 모르겠다.”
“너는 여기에서 있을 만 해?”
“그럭저럭?”
“영화도 못 보고.”
“그건 뭐 참아야지.”
밥을 우물거리며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나야 이런 거 하나도 아무렇지 않지만 너는 되게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 너 이런 거 하나도 생각한 적 없잖아.”
“나 그래도 꽤나 겅인한 남자라고.”
“퍽이나.”
한나의 대답에 태민은 씩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네.”
“머리 아파.”
“너무 그러지 마라. 억지로 신경 쓰고 그런다고 풀릴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도 요즘 환자 늘었다며?”
“그게 좋은 일이야?”
“아닌가?”
“아니지.”
태민은 열심히 밥을 먹었다. 한나는 손을 내밀어서 그런 태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도 잘 먹고 기특하다.”
“날 너무 아기로 취급해.”
“어리니까.”
“아니거든.”
“맞습니다.”
태민은 씩 웃으면서 국을 들이켰다. 한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태민의 빈 그릇에 국물을 더 담아주었다.
“많이 먹어.”
“응.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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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면 가는 거죠?”
“오늘 밤에 그냥 가려고요.”
“아.”
복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한나는 그의 양뺨을 꼭 잡고 가까이 가지고 와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그럼 가지 말던가.”
“그건 안 되고.”
“치사해.”
“뭐가?”
“나만 나쁜 사람 같아.”
한나가 입을 내밀자 복규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더 나쁜 사람이에요. 김한나 씨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니까. 이런 말 하면 조금 괜찮은 거죠?”
“아니요.”
“왜요?”
“그래도 내가 가는 게 달라지는 거 아니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복규는 한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다 받아들이기로 했어. 김한나 씨가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거도 아니고 정말로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김한나 씨 나를 걱정하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그래도 좀 그래요.”
복규는 한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로 가져왔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편하다.”
“김한나 씨.”
“네?”
“잘 해요.”
“뭘요?”
“어디에서건.”
“그럴 거에요.”
“김한나 씨는 잘 할 수 있어.”
한나는 싱긋 웃으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다. 오복규 냄새.”
“변태같아.”
“어머. 여자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그렇게 느껴지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지. 사람이 별. 그래도 좋다. 오복규 냄새 맡을 수 있어서.”
“김한나 씨. 괜히 서울에 가서도 다른 남자들에게 이러면 안 됩니다. 괜히 나 불안하고 막 그러니까.”
“나 서울에서 늘 그랬는데?”
“하여간 김한나.”
복규가 일부러 화가 난 표정을 짓자 한나는 그의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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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안 가봐도 되겠나?”
“역에는 데불다 주기 싫다.”
복규의 말에 득수는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이대로 보내고 나면 다음 주나 되어서 볼 긴데. 아이지. 다음 주 것도 다 찍고 갔다고 켔제?”
“응.”
“그럼 당분간 못 보는 거 아이가?”
“그러네.”
“그럼 그라믄 안 되는 기지.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뜨겁게 안아주고. 가지 말라고 한 번 더 하고.”
“싫다.”
득수의 말에 복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가면 미련만 남고 그 사람에게 더 부담을 주는 거 같아서 내는 나가지 않을 기다. 그라믄 안 되는 기니까.”
“그래도.”
“그만.”
“와?”
“싫다. 이런 이야기.”
복규의 말에 득수는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솔직히 내는 잘 모르겄다. 니가 와 그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런 일들. 니가 하나도 안 아팠으면.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니까.”
“내는 하나도 안 아프다.”
“참말이가?”
“참말이다.”
복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밝게 웃었다.
“그런 거 생각할 이유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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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한나는 입을 내밀었다. 이제 정말 다시 혼자였다. 낯선 서울에서 혼자였다.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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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김한나. 오랜만이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
송아는 반갑게 한나를 맞았다. 다른 아나운서 동료들도 이전처럼 그렇게 냉담한 반응은 아니었다.
“당분간 그다지 바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바쁘지 않은 거면 저 그냥 거기에 둬도 되는 거 아니에요. 굳이 부를 이유도 없으면서.”
“그래도 불러야지.”
“왜요?”
“너는 여기 사람이니까.”
송아의 말에 한나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여기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 와서 느끼고 보니 그게 또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그런 기특한 생각은 어떻게 했어?”
“네?”
“거기 있는 거 다들 몰랐더라.”
“그래요?”
한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잘 몰랐으니까요.”
“이번에 퉁폐합 시킨다고 하던데?”
“네?”
“거기 사람들 유능하다고. 대구로 가라고.”
“말도 안 돼요.”
“어?”
한나가 목소리를 키우자 송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한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대구 두웨이에 통합이 되는 것을 그들이 원할지 안 원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요. 그대로 성주에 있는 것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주에서 대구로 간다고 하면 정말 제대로 성주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방송국은 이제 없어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런 거 싫어요.”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한나는 입을 내밀었다. 뭔가 아팠다.
“너 거기 너무 적응한 거 아니야?”
“네?”
“이제 너 거기 사람 아니야.”
“그게 무슨?”
“너 한 번도 성주 사람이었던 적이 없는 거라고. 늘 서울 사람이었고. 지금도 서울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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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좀 아끼세요.”
“그쪽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까칠하기는.”
복규를 진찰하던 태민은 입을 내밀었다.
“지금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알죠?”
“그쪽이라면 나처럼 행동하지 않을 겁니까? 그쪽이 김한나 씨랑 나름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는데.”
“차였어요.”
“네?”
“차였다고요.”
태민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제대로 차인 거라서. 사실 뭐 말을 할 것도 없고. 누나는 단 한 순간도 나 남자로 본 적 없어요. 나 혼자서 늘 그렇게 생각을 했던 거니까 새삼스럽게 생각을 할 이유도 없어요.”
“그렇습니까?”
복규가 여전히 긴장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태민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누나를 못 믿습니까?”
“그쪽을 못 믿습니다.”
“누나를 믿으면 상관이 없는 거죠.”
“그건.”
“안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태민은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복규를 살폈다.
“아직은 몸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지만 이제 정말 회복이 되느 것이 점점 더 더딜 겁니다. 이전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전보다 회복하는 시간도 늦을 거고. 뭔가 문제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쪽보다 체력이 좋을 겁니다.”
“저랑 비교하지 마시고요.”
“그럼?”
“이전의 당신이요.”
복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서운하죠?”
“뭐가 말입니까?”
“누나 떠난 거요.”
“김한나 씨를 위한 겁니다.”
“내가 가라고 했어요.”
복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게 무슨?”
“누나 정말로 방송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했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서 제대로 된 백도 없이 자기 힘으로 일어났고. 싸가지가 없기는 하지만 그게 뭐 나쁜 것도 아니고요. 누나가 정말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그런 방법 뿐이었다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도대체 그쪽에게 김한나라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겁니까?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첫사랑.”
태민의 대답에 복규는 미간을 모았다.
“마음에 안 들어요.”
“피차일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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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잤어요?”
‘아니요.’
복규의 목소리에 한나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왜요?’
“오늘 힘들었거든요.”
‘내가 거기로 갈까요?’
“아니요.”
한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복규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괜히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힘들고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간만에 여기에 다시 오니 이것저것 신경을 쓸 일이 많아서요.”
‘그러니까 내가 갈게요. 어차피 여기에서 참외랑 관련해서 일 그다지 바쁘지 않거든요. 이제 끝이고.’
“벌써요?”
‘그럼요.’
“참외 여름 과일 아니었어요?”
‘하나도 모르네. 요즘에는 많이 빠르게 나와서 괜찮아요. 김한나 씨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네.”
‘목소리에 힘이 없어.’
“괜찮습니다.”
한나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하자 복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거기가 정말로 좋았어요. 내가 거기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내가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내 자리가 여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도 오래 거기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또 거기에는 오복규 씨도 있으니까요. 더 정겨워.”
‘나도 당신이 없어서 내가 이토록 오래 살았던 곳이 나랑 너무나도 먼 곳처럼 느껴져요. 되게 멀고 낯설게.’
순간 벨이 울렸다.
“내가 내일 아침 전화할게요.”
‘내가 깨워줄게요.’
“그럼 고맙고요. 잘 자요.”
‘김한나 씨도요. 사랑합니다.’
“나도요.”
한나는 전화를 끊고 현관으로 갔다. 인터폰 액정을 확인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김한나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어! 문 열어!”
경표의 고함이 크게 들렸다.
“내가 다 알고 왔다고!”
“꺼져.”
한나는 덤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쉬었다. 괜히 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당하는 것은 그녀일 거였다. 일단 112의 번호를 누르고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다 이길 수 있었다.
‘네 경찰서입니다. 말씀하세요.’
“여기 지금 전 남친이 막 문을 두드리고 그러거든요.”
“김한나 문 열어!”
“얼른요.”
‘네 알겠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경표의 목소리에 신고를 받는 쪽도 어느 정도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빨리 와주세요.”
“김한나! 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그 동안 나에게 이것저것 다 받아먹더니 이러자는 거야!”
“내가 뭘?”
“김한나 이 문 열어!”
경표가 문이 부서져라 두들겼다. 그리고 잠시 소리가 조용하더니 무언가로 강하게 문을 애리찍는 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밖을 내다 보았다. 소화기로 한나의 집 현관문을 두들기는 것을 보고 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돼.”
한나는 재빨리 소파를 갖고 와서 현관을 막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위에 쌓았다. 너무 무서웠다.
“빨리 와주세요. 빨리.”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털커덕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경표가 보였다.
“김한나.”
“경표 씨.”
“네가 나를 모욕하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다, 당신 뭐야?”
한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경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집으로 한 발, 한 발 들어섰다.
“당신이 뭔데! 나를 그렇게 가지고 놀아! 네가 뭔데!”
그리고 경표가 한나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 경표가 누군가에게 부딪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나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복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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