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누구세요?”
“아. 태현이 친구입니다.”
“친구요?”
“네.”
우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우석을 바라봤다. 당장 퇴근해야 하니 뭐라고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내일은 출근을 하는 거죠?”
“잘 모르겠는데요?”
“네?”
“일단 간단한 건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 녀석 여기에서 알바할 적에 가끔 놀러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머리가 정말 좋아서요.”
“진짜요?”
“그럼요.”
우석은 당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바코드를 찍고 간단하게 계산해 보았다. 우리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의점에 더 붙들려 있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정태현 씨가 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가 친구 명예를 걸고 문제 안 일으키겠습니다.”
“뭐. 믿어볼게요.”
우리는 우석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서랍을 열어서 간단한 매뉴얼이 적힌 노트를 건넸다. 우석은 그것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게 뭐죠?”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네. 그런데요?”
“그거 다 읽어요.”
“네?”
“그 정도는 당연한 거죠. 설마 지금 편의점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막 그러는 거 아니죠? 편의점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요. 뭐 편의점에서 몇 번 와봤다고 하면 그 정도는 알지 않나요?”
“그러니까.”
우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석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겠다는 거죠?”
“네.”
우리의 미소에 우석은 입을 쭉 내밀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우석의 눈을 보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죠?”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정태현 씨 친구라고 하면 대충 상황을 알지 않을까 싶어서요. 대충 상황을 안다면. 두 사람이 지금 왜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지. 특히나 정태현 씨가 대신 근무 시간에 그쪽을 보낸 건지 알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군요.”
“뭐. 상관없어요.”
우리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해요.”
“네.”
편의점을 나서는 우리를 보면서 우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 아무리 내가 태현이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냥 이렇게 믿고 가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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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왜?”
“언니는 언니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라를 바라봤다. 나라는 입을 꼭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이것저것 궁금해서. 그래서 그러는 거야. 나는 내가 세상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을 했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부족할 것 없이 살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 같아서. 되게 한심하고. 미련하고. 그냥 그렇게 살기만 한 것 같아서.”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내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가장 잘 아는데 너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야? 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런 거 아니야.”
나라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하나 없었다. 지금 자신도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 여기에 왜 있어?”
“어?”
“정태현 씨 보러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나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 없겠지?”
“여태 뭐 한 거야?”
“아니.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가서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가지도 않고. 사람 이렇게 기다리면 안 되는 거지. 이나라. 너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이나라가 맞는 거니?”
“지금이라도 가야 할까?”
“당연하지.”
나라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가기 싫어.”
“이나라.”
“이거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거기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가게 되었을 거야. 이렇게 뒤늦게. 아 갔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된 거라고. 언니도 크게 생각을 하지 마. 어차피. 우리 두 사람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된 거야. 정말로 무슨 사이였다면. 그런 거라면. 그냥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너 그 사람 좋아하는구나?”
“어?”
우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라의 눈을 바라봤다. 단 한 번도 나라의 입에서 저런 식의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나라는 지금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였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이 좋아한다는 사실. 그것 하나는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 지금 가고 싶어 했잖아. 그러면 늦더라도 그 장소에 다시 가야 하는 거야. 혹시라도 그 사람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는 것 아니야? 누군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도 그 마음이 확실하다면 가야 하는 거라고.”
“아니.”
“이나라.”
“정말이야.”
나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히 그 미소가 무조건 밝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라는 한 번 자신이 결심한 일을 쉽게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언니. 그럼 나는 잘게.”
“그래. 쉬어.”
우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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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아. 누구세요?”
“이나라 씨죠?”
“네?”
“안우석이라고 합니다.”
우석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라는 머뭇머뭇 그 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태현이 녀석에게 못 들었어요?”
“네?”
“설마 어제 안 나간 겁니까?”
“그러니까.”
우석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 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적어도 그 녀석을 거절할 거라면. 그런 거라면 거기에 가서 말을 해야 하는 거. 그런 거 아닙니까?”
“어차피 거절할 거라면 거기에 가지 않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요? 그곳에 간다고 해서. 정태현 씨가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요. 괜히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 같은 거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건.”
“그쪽이 신경을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나라의 차가운 대답에 우석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ldf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오직 두 사람 사이의 문제였다.
“지금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쪽이 아니라 제가 정태현 씨랑 해결을 해야 할 문제라고요.”
“그렇군요.”
“고생하셨어요.”
“수고하세요.”
우석이 편의점을 나가는 것을 보고 나라는 한숨을 토해냈다.
“뭐야.”
나라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태현의 전화 번호를 누를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싫다.”
나라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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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현. 문 열어. 문 열어 보라고.”
태현의 집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우석이 까치발을 들고 집 안을 들여다 보아도 무슨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우석은 한숨을 토해내고 이것저것 삑삑 거리면서 현관에 도어락을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눌렀을까?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태현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너야 말로 무슨 일이야?”
우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너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무슨 어린 아이도 아니고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집에서 혼자 뭐 하는 거냐고?”
“아프지 않아.”
“지랄.”
우석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태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불덩이가 따로 없었다. 태현은 그 손을 밀쳐냈다.
“하지마.”
“병원 가자.”
“됐어.”
“정태현.”
“정말 괜찮아.”
태현은 이불을 둘러쓰고 침대에 앉았다. 우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현을 응시했다. 그가 오랜 시간 태현을 알고 지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태현이 너무 낯서어서 우석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현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왜 온 거냐?”
“친구가 친구 집에 오면 안 되는 거냐?”
“죽었을까봐?”
“정태현.”
“죽을 이유는 아니야.”
태현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어.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 말이야. 그래서 그냥 기다렸어. 처음에는 그냥 조금 늦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안 올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도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한 번은 오지 않을까? 그런데 오지 않더라고.”
“미친. 너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한테는 온갖 잘난 척을 하더니. 도대체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그 여자가 오지 않으면. 그러면 그냥 나와야 하는 거잖아. 도대체 뭘 기대하고 그냥 있는 건데?”
“그러게.”
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석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태현의 손을 이끌었지만 태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 병신아.”
“됐어.”
“정태현.”
우석은 심호흡을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병원 가자.”
“싫다고.”
“제발. 가자.”
우석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자 태현은 그를 올려다 보았다. 우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 친구라는 새끼가 이렇게 자존심도 없이 행동하는 거 나는 너무나도 싫으니까. 정말 짜증이 나니까 가자고.”
“그래. 가자. 가.”
태현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그대로 쓰러졌다. 우석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거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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