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왜 자꾸 그러는 겁니까?”
“이거 놔요.”
나라는 차가운 눈으로 태현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원망에 태현은 가슴이 시렸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냥 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이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가 있다는 거죠? 내가 본 게 사실이잖아요. 그게 전부잖아요.”
“그게 전부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나 그 사람하고 아무 사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 변명은 들어야죠.”
“아니요.”
나라는 차갑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들을 이야기 없어요. 나 집에 들여보내고 모르는 여자랑 키스나 하는 사람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자존심은요?”
나라의 말에 태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말이에요. 바보도 아니고. 대충 알 거 다 알거든요. 정태현 씨가 나랑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무슨 일이 정확히 벌어지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그거에 대해서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본 것 말고 더 있는 건가요?”
“당연한 거죠.”
“그래서요?”
“이나라 씨.”
“그 여자랑 모르는 사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요?‘
태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라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 이나라 씨는 우리 두 사람이 그냥 여기에서 끝이 나도 된다는 겁니까? 서로 힘들게 돌고 돌아 겨우 만난 겁니다. 서로의 마음에 대해서 이제 겨우 이해를 한 건데. 이렇게 그냥 끝을 내자고요.”
“네.”
나라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현의 눈을 바라보더니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에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이나라 씨.”
“그냥 소꿉장난. 한 여름 밤의 꿈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는 거죠. 뭐 애틋하고 뭐 그런 감정이 생길 여유도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태현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서 나라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대로 그냥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당신이 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누구인데요?”
“헤어진 사람입니다.”
“미련이네요.”
“미련 아닙니다.”
태현은 힘을 주어 대답했다.
“지금 내가 내 마음을 꺼내서 그쪽에게 보여줄 수 없어서 미치겠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다 버린지 오래라고요. 벌써 아주 오래 전 사라진 마음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미련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10년도 더 지난 일이고. 이제 다 잊은 겁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잊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 없잖아요. 그리고 분명히 그 사람하고 다시 마주하고. 지금 이런 식으로 엮이고 있다는 것.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엮이는 거 아닙니다.”
태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나라는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태현은 그런 나라를 슬프게 바라봤다.
“제발 이러지 마요.”
“내가 뭘 믿어야 하는 거죠?”
“나를 믿어요.”
“믿을 수 없어요.”
“이나라 씨.”
“끝내요.”
“뭐라고요?”
“아니. 끝내는 것도 아니네요.”
나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우리 두 사람 무슨 사이라기도 하기 우스운 거니까요. 뭐 연애 한 번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요. 어디 데이트를 나간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채로 끝을 내는 거니까. 남들이 다 이야기를 하는 썸. 그래요. 그 정도로만 해두면 되는 거네요. 썸이라고 해두면 되는 거네요.”
“안 됩니다.”
태현은 절박했다. 겨우 나라의 손을 잡은 거였는데. 그냥 이런 식으로 그녀의 손을 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고 그게 나라였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고. 바꿀 수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이나라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기회를 줘요.”
“아니요.”
나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끝이에요.”
“이나라 씨.”
“다른 사람하고 무슨 일을 하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요. 거기에 내 자리 같은 건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태현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억울합니다.”
“뭐가 억울하다는 거죠?”
“당한 겁니다.”
“당한 거면 되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니라.”
“왜 만나는 건데요?”
“그 사람이 나를 찾았고 피하는 길입니다.”
태현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하지만 나라는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나를 믿어줄 겁니까? 내가 미쳤습니까? 당신을 두고 그런 일을 하게요.”
“당신이 지금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몰라요. 정태현 씨. 나는 그냥 보는 것만 믿어요.”
“그러니 잘못된 것을 보았다고요.”
“그래서요?”
“이나라 씨.”
“변하는 건 없죠?”
나라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그 여자랑 키스한 거고.”
“아니. 막말로 그냥 키스입니다.”
“뭐라고요?”
“아니.”
나라의 얼굴이 곧바로 구겨지자 태현은 아차 싶었다. 그냥 키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별 것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그 일이 되게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다른 남자랑 막 키스를 하고 다니더라도 정태현 씨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건가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안 되는 건가요?”
나라의 물음에 태현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라의 눈을 보고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그냥 끝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끝내요.”
“이나라 씨.”
“더 할 이야기 없어요.”
나라는 차갑게 돌아섰다. 그리고 태현이 붙잡자 다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태현 씨가 이런 일로 나를 아프게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이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닐 줄 알았다고요.”
나라의 말에 태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나라는 그런 태현을 물끄러미 보더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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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가?”
지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우석을 응시했다.
“나는 그냥 태현이가 잡고 싶었어.”
“김지현.”
“저기. 이 살마 무슨 사이죠?”
“우리 씨.”
우석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지현을 가만히 응시하고 심호흡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정태현 씨랑 무슨 사이죠?”
“연인이었어요.”
“지금은요?”
“아무 사이도 아니죠.”
지현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우리가 그녀의 뺨을 날렸다. 지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너 뭐야?”
“너는 뭐니?”
우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네가 정태현 씨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 거야? 저 사람에게 도대체 뭘 바라고 이러는 건데.”
“당신이 끼어들 일 아닌데?”
지현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우리를 노려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천박해.”
“뭐라고?”
“가진 거 하나 없으니까 손이나 들고. 당신은 나랑 정태현 사이의 일을 모르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지금 당신의 일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버 아닌가?”
“내 동생 일이야.”
“아 동생.”
지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당신 일이 아니라는 거네.”
“돌아가.”
우석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김지현. 너 지금 충분히 다 망친 거니까. 더 이상 망치지 말고 돌아가. 이미 너로 인해서 다들 지쳤으니까.”
“뭐.”
지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가볍게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고 멀어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우리는 비틀거렸다. 우석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저 여자 뭐에요?”
“그게.”
우석은 한숨을 토해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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