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2년째 연애 중
“나 이번에 결혼해.”
우리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기연은 청첩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청첩장을 펼쳤다. 그리고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이름만 들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보이는 호텔이 결혼식 장소였다.
“두웨이 호텔? 여기 비싸지 않아?”
“아. 그 사람 아버님이. 아 이제 내 아버님인가? 아무튼 그런 데서 하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네.”
그제야 기연의 손에 끼워진 꽤나 비싸 보이는 반지가 눈에 보였다.
“그거 예랑이가 준 거야?”
“아. 어. 미안해. 우리 너는 아직 결혼 계획도 없을 텐데. 내가 막 너무 자랑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걸 알면서도 그러니?
우리는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재필이가 결혼하자고 난리인데.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결혼을 미루는 거야.”
“그래? 그래도 빨리 하지 그래.”
“야. 아직 우리 젊어. 요즘 백이십 살까지 산다고 하는데. 벌써 결혼하고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서 사는 거. 나 일단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서 그러고 결혼을 하려고.”
“뭐 그래도 되지.”
기연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밝게 웃어보였다. 우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끝까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청첩장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가야겠다. 점심시간에 잠시 나온 거잖아. 나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
“그러게. 내가 시간 너무 많이 잡아먹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괜히 바쁜 사람을 불렀네. 그냥 모바일로 보낼 걸 그랬다.”
“아니야. 이렇게 얼굴도 보고 좋지.”
당연한 거 아니야? 너랑 나랑 뭐가 그렇게 친하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 딱 봐도 나 먹이러 나온 거지.
“내가 먼저 들어가서 미안해. 너랑 같이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그래야 하는 건데. 괜히 내가 너무 바빠서. 그럼 다음에 보자.”
우리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기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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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씨. 회사가 놀이터입니까? 이렇게 오래 사무실을 비우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회사에서 월급 받고 싶습니까? 안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망할 놈의 팀장 새끼. 인격 모독을 이렇게 잘 하는 놈도 없을 거다. 서른일곱 살에 과장 달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네? 아니요.”
아차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 팀장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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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네가 문제다.”
“알고 있어.”
소망의 깐족거림에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팀장이 부탁한 일이 있는데 늦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게 뭐니? 도대체. 일만 잘 하면 뭐 하냐고? 회사에서는 왜 저런 사람을 승진을 시켜서 우리 팀에 팀장으로 보내고 난리야. 과장 직급에. 아우. 짜증나.”
“왜 네가 열을 내?”
아이스티를 만들며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숨에 커다란 머그잔을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데 너 어디 다녀왔어? 재필이?”
“아니.”
“그럼?”
“정기연 기억나?”
“누구?”
소망의 멍한 표정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면 소망이 더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오늘 술이나 한 잔 할래?”
“미안.”
우리의 제안에 곧바로 소망은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그 사람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서. 우리 오늘 만난 지 100일이거든. 너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아니다. 너 급하면 내가 그냥 그거 취소할게.”
“됐다.”
우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소망에게까지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오늘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외식하기로 했어. 외식. 맛있는 거.”
“너희는 참 좋겠다.”
소망은 벽에 살짝 몸을 기대며 입을 내밀었다.
“나랑 그 사람은 이제 겨우 100일인데도 뭔가 소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래.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 다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도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도 너희처럼 오랜 시간 잘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뭐 비법이랄 게 있나?”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만나는 거지.”
“그러게. 너희는 싸워도 꼭 다시 서로에게 돌아가더라. 부러워. 나는 싸우면 헤어질까봐 싸우지도 못하거든. 너희는 그래도 싸우면 서로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싸울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뭐.”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가는 거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너무 어려웠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었다. 유난히 사랑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편했다. 그리고 좋았다. 그 시간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도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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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집 좀 치우고 있으라니까. 나도 일하고 오면 되게 힘들어. 네가 이렇게 나 안 괴롭혀도 힘들다고.”
“우리 자기한테 무슨 일일까?”
트렁크만 입고 있던 재필이 입을 쭉 내밀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안았다. 우리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다.
“나 오늘 이럴 기분 아니야.”
“왜 이래?”
“기연이가 청첩장 주고 갔어.”
“어?”
“청첩장 주고 갔다고.”
우리는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재필의 얼굴에 던졌다. 재필은 여유롭게 청첩장을 받아서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데서 하네.”
“그게 다야?”
“그럼?”
“됐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
재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언성을 높였다.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왜 화가 났는지 말을 해야 나도 내 말을 할 거 아니야?”
“우리 결혼 안 하니?”
“뭐?”
“우리는 결혼 안 하냐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재필을 노려봤다. 재필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런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12년이야. 12년. 자그마치 12년. 이렇게 오랜 시간을 연애를 했는데. 너는 나한테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어떻게 한 번도 하지 않을 수가 있어? 우리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을 같이 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냥 청첩장이네. 좋은 곳에서 하네. 그 이야기가 전부야. 친구들이 너랑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그냥 미소만 짓고 오는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알아? 속에서 뭐가 막 끓어.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거 같아. 그런데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내 상황 알잖아.”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아직 취직 못 했어. 겨우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고 있다고. 이 집에서 너랑 같이 사는 게 전부야. 우리 두 사람이 하는 데이트. 그냥 영화나 보고 가끔 가다가 연극이나 보는 정도잖아. 뮤지컬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 전시회도 비싼 곳은 못 가잖아. 그런데 결혼이라니. 이런 곳에서 결혼 같은 거 말도 안 되는 거 아니야?”
“꼭 그런 데서 하자는 게 아니잖아.”
우리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재필을 응시했다. 재필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그냥 앞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을 보면 앞이 없어. 그냥 여기에서 다 끝인 거 같아. 그냥 여기에서 딱 멈춰있는 거 같다고. 남들이 우리를 보고 부럽다고 그래. 12년이나 만났다고. 그런데 12년을 만나면 뭐해? 그냥 여전히 우리는 고등학생인데. 그 이후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우리 이제 스물아홉 살이야. 스물아홉이라고. 그런데 앞으로 나아갈 준비는 하지 않고 그냥 여기에서만 머무른 채로 이대로 시간을 보내라고? 너는 서른이 아무렇지도 않겠지? 여자는 달라. 앞자리가 달라지는 기분이 이상하고 불안하다고.”
“나도 너에게 잘 해주고 싶어.”
“놔.”
재필이 손을 대자 우리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재필은 다시 손을 데려고 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는 좋아? 그게 무슨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해? 너랑 아무리 이야기를 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는데. 됐어. 그만 해. 내가 잘못했어. 너는 아무런 꿈도 비전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재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그런 재필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너 한심해.”
“서우리.”
“너 한심하고 머저리 같아. 무슨 남자가 그렇게 꿈이 없니? 다른 사람들 다 갖고 있는 꿈같은 것도 없잖아. 요즘에 취업하려고 이력서는 제대로 쓰고 있는 거니? 안 된다고 너 지금 그냥 포기하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려는 거 아니야? 아르바이트 자리는 왜 늘리는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이 앞을 보지 않고 그렇게 답답하게 사는 건데!”
“그만 해.”
“너 진짜 한심하다고!”
“그만 하라고!”
두 사람의 고함. 그리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으니까 그만 하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지금 내 처지. 내 상황 다 알고 있어. 굳이 너까지 하나하나 다 일러줄 필요 없어.”
“내가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우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내가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그 모양이면 내 기분이 도대체 어떨 거 같아? 그런데 청첩장을 받아왔는데. 집에 네가 속옷만 입고 누워있으면 내 기분이 정말 얼마나 끔찍할지 아니?”
“내가 나갈게.”
“됐어.”
우리는 재필을 위아래로 훑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가는 날도 아니라고 씻지도 않고 있었네. 그냥 내가 나갈게. 우리 지금 더 이야기를 해봤자 싸우기나 하겠다. 그냥 피해야지.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우리 항상 그렇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재필은 미간을 찌푸리며 우리를 응시했다.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너에게 뭘 바라고 있다고?”
“그게 아니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하라고. 그렇게 애둘러서 얘기하면 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건데?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나한테 다 풀면 내가 다 들어줘야 하는 거야?”
“뭐라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 믿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꼴이라니.
“네 눈에는 내 나이가 안 보이니?”
“그게 뭐?”
“그렇게 연애만 하면 내가 불안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지? 우리 두 사람. 정말 미래가 안 보이는 거는 알아? 앞이 보이지 않는데. 그냥 그렇게 묵묵히 나아가는 이 상황에서 내가 도대체 뭘 믿고 있어야 하는 건데?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하는 너를 보고 그냥 너만 믿고 있어야 하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됐어.”
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더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됐다고. 너랑 더 할 이야기 없어.”
우리는 그대로 가방을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 재필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를 붙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런 재필을 한 번 더 노려본 후 문이 부서지기라도 바라는 사람처럼 세게 닫고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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