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까칠한 사람이 날 보고 웃는다.
“한심해.”
멍하니 소주잔을 내려 보며 우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싸우려고 한 게 아니었다. 재필이도 노력하는 중이었다. 취업이 어렵다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재필이도 꿈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모든 상황이 다 복잡했다. 머리가 아프고 피하고만 싶었다.
“나 도대체 왜 이러니?”
화를 내야 하는 쪽은 재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이것저것 다 해주는 사람이었다.
“싫다. 정말 싫어.”
소주를 들이켜고 어묵국물을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쓴 맛에 이어 진한 조미료 맛이 밀려왔다. 이 시간에 갈 곳이 없는 것도 한심했다. 재필과 동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나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도 민망했다. 소망은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스물아홉. 여전히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쓸쓸했다.
“저기.”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웬 남성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 서우리 아직 안 죽었어.
우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남성을 응시했다. 남성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는다는 건가?
“저희가 자리가 없어서요. 혼자 오신 분이면 저희 이 의자 가지고 가도 괜찮을까요? 일행이 없으신 거 같은데.”
“아. 네.”
그래. 서우리. 네 팔자에 무슨.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은 그대로 의자를 들고 사라졌다. 답답했다. 도대체 자기 꼴이 왜 이 모양인지. 어릴 적에 스물아홉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멋질 것 같았다. 회사도 잘 다니고 있고. 아직 이른 나이이기는 하지만 재필과 결혼도 한 상태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것도 이뤄진 것은 없었다. 회사도 겨우 다니는 거지 잘 다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우리 인생 왜 이 모양이냐?”
어차피 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남은 소주를 모두 들이켠 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 여기 얼마에요?”
대충 값을 치룬 후 편의점에 들어가서 달달한 것을 잔뜩 샀다. 그리고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스물아홉 인생 갈 곳이 회사라는 것은 서러웠지만 그래도 회사라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냥 이걸로 위안을 삼는 게 최선이었다. 이 밤에 갈 곳이 있으니까.
“그래. 그 자식은 또 얼마나 힘들겠어. 요새 취직도 제대로 안 되는데. 그래. 내가 다 이해를 해야지. 여자 친구인 내가 그 망할 자식을 이해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그 자식을 이해를 하겠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은 하나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는 연신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어떤 답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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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
“염소망 씨. 일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합니까? 도대체 내가 서류 작성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줘야 하는 겁니까?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렇게 말귀도 못 알아듣습니까? 오타는 어떻게 할 겁니까?”
“고치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우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렷다. 자신은 사무실에 왔다. 그리고 남은 일을 마저 했다. 아직 시간이 여섯 시라 잠시만 눈을 감는다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깼으면 일어나세요.”
조 팀장의 목소리에 우리는 온 몸이 굳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담요를 내리고 시계를 바라봤다. 10시 40분. 우리는 놀라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조용히.”
“네?”
“잠시 이야기 좀 하죠.”
망했다. 아. 서우리. 너 도대체 왜 그랬어?
우리는 울상을 지은 채로 조 팀장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소망을 바라봤다. 소망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왜 그랬어?
뭐가?
조 팀장이 불러도 그렇지. 새벽에 회사에 오는 이유가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서로 입모양을 보며 대화하는데 갑자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서우리 씨. 지금 염소망 씨랑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내가 보자고 하는 이야기 안 들리는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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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여관입니까?”
“아닙니다.”
“뭐 그런 술주정이 다 있습니까?”
“네?”
술주정이라고? 내가 술주정을 했다고?
우리의 멍한 표정에 조 팀장은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어 보이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에 술을 먹다가 회사에서 잔업을 처리하는 주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인도 본인이 특이한 거 알죠?”
“아. 죄송합니다.”
망했다. 망한 거다.
이렇게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들었는데 조 팀장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야? 이 자식 도대체 왜 웃고 있는 거지?
“사무실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마 지금쯤 다들 나를 욕하고 있을 겁니다.”
“왜 팀장님을?”
“내가 잘 놀고 있는 서우리 씨를 불러서 일을 시켰다고 알고 있을 겁니다. 아마 다들 나를 욕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굳이 서우리 씨가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술에 그렇게 취해서 회사에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술주정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걱정할 것은 없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고마운 거야?
“안 갑니까?”
“네? 네.”
우리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조 팀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들었고 우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조 팀장 되게 이상하지 않아?”
“어?”
소망의 물음에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이 왜?”
“야. 미친 거 아니야? 한 밤에 너를 불러서 일을 시킨다는 게. 너는 속도 좋다. 팀장이 부르는데 그냥 와서 일을 다 하고. 조 팀장이 너를 얼마나 괴롭히는데? 나라면 아무리 불러도 안 한다.”
“그런 거 아니야.”
“어?”
“아니.”
우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친한 소망이라 하더라도 술을 먹고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왜 술을 먹었는지까지 다 나오게 될 것이 분명했다. 부끄러웠다.
“내가 어제 다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끝을 내지 못한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이야기는 그만.”
우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켰다. 재필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렇게 싸우고 나왔는데 연락도 없다니.
“왜 어디 연락 올 곳이 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쪽에서 연락을 안 하면 이쪽에서도 연락을 안 하면 되는 거였다. 12년.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되라였다. 굳이 재필에게 더 이상 애걸복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은 회사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소망의 호기심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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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에 해장국이 뭐야?”
“그러게.”
우리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는 조 팀장의 뒤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평소에는 팀원들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해도 거절하고 피하는 조 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먼저 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지를 않나, 안 그래도 해장국이 끌리는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해장국을 다 먹자고 하지를 않나. 이상한 일이었다.
“팀장님. 그런데 오늘 신기하시네요.”
“네?”
권 대리의 물음에 조 팀장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평소에 팀장님이 저희랑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냥 같이 드시는 게 낯설다. 뭐 그런.”
“그럼 내가 가야겠군요.”
“아닙니다.”
권 대리는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주위를 살폈다. 조 팀장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마셨다.
“그 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같아서 그렇습니다.”
“네?”
“누가 그러더군요. 도대체 사람이 왜 그렇게 사는 거냐?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냐. 그런 말을 해서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서우리 씨. 서우리 씨도 내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합니까?”
“아니요.”
우리는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조 팀장은 무슨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우리를 보며 미소를 짓고 시선을 돌렸다.
저 인간 저거 왜 저래?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너 팀장님하고 뭐 있어?”
“어?”
“아니. 팀장님이 오늘 너 유난히 챙기는 거 같다.”
“챙기기는.”
우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실수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냥 일을 한 것이 실수라고 했는데. 그런데 도대체 누가 조 팀장에게 같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물은 걸까?
설마!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분명히 누군가를 만났다. 사무실에 누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조 팀장님!”
“네?”
우리는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알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려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입을 열었다.
“저 특으로 시켜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다행히 모두 웃으며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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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치겠네. 도대체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새벽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 팀장이 하는 행동이 달라진 것을 보면 자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막 토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생각만 떠올랐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조 팀장에게 혼자 밥 먹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는 건데. 이 기억을 아무리 되살려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같은 것이 없었다.
“도대체 뭐지?”
“뭘 그렇게 중얼거리며 와?”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재필이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직 냉전 중이고 제대로 사과 같은 것을 받은 기억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쿡 하고 웃고 나니 어제 싸웠던 것이 모두 다 가짜 같았다.
“왜 나와 있어?”
“오늘은 씻었다.”
“자랑이다.”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검지로 재필의 머리를 밀었다. 재필은 뭐가 좋은지 그저 웃으며 우리의 곁에 섰다.
“미안해.”
“됐어.”
“내가 조금 더 노력할게.”
“아니야.”
재필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도 취업을 하고 싶지 않아서 집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게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천천히 지쳐가는 그에게 자신이 괜한 부담을 주는 거였다. 재필에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린 거였다.
“결혼식은 갈 거야?”
“아니.”
“왜?”
“걔 나랑 하나도 안 친하거든? 그런데 걔가 나한테 갑자기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하더니 청첩장을 준 거야. 되게 웃기지 않아?”
“그러게. 되게 웃기다.”
“그러니까. 뭐 그런 애가 다 있어?”
이게 바로 12년이라는 시간일 거였다. 그 오랜 시간을 만났기에 찾을 수 있는 여유. 마치 아무 것도 없는 척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거였다.
“미안해.”
재필은 그냥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우리도 그런 재필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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