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창고/우리의 시간[완]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장. 12년째 연애 중]

권정선재 2016. 8. 22. 15:46

1. 12년째 연애 중

나 이번에 결혼해.”

 

우리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기연은 청첩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청첩장을 펼쳤다. 그리고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이름만 들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보이는 호텔이 결혼식 장소였다.

 

두웨이 호텔? 여기 비싸지 않아?”

. 그 사람 아버님이. 아 이제 내 아버님인가? 아무튼 그런 데서 하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네.”

 

그제야 기연의 손에 끼워진 꽤나 비싸 보이는 반지가 눈에 보였다.

 

그거 예랑이가 준 거야?”

. . 미안해. 우리 너는 아직 결혼 계획도 없을 텐데. 내가 막 너무 자랑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걸 알면서도 그러니?

 

우리는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재필이가 결혼하자고 난리인데.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결혼을 미루는 거야.”

그래? 그래도 빨리 하지 그래.”

. 아직 우리 젊어. 요즘 백이십 살까지 산다고 하는데. 벌써 결혼하고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서 사는 거. 나 일단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서 그러고 결혼을 하려고.”

뭐 그래도 되지.”

 

기연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밝게 웃어보였다. 우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끝까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청첩장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가야겠다. 점심시간에 잠시 나온 거잖아. 나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

그러게. 내가 시간 너무 많이 잡아먹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괜히 바쁜 사람을 불렀네. 그냥 모바일로 보낼 걸 그랬다.”

아니야. 이렇게 얼굴도 보고 좋지.”

 

당연한 거 아니야? 너랑 나랑 뭐가 그렇게 친하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 딱 봐도 나 먹이러 나온 거지.

 

내가 먼저 들어가서 미안해. 너랑 같이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그래야 하는 건데. 괜히 내가 너무 바빠서. 그럼 다음에 보자.”

 

우리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기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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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씨. 회사가 놀이터입니까? 이렇게 오래 사무실을 비우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회사에서 월급 받고 싶습니까? 안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망할 놈의 팀장 새끼. 인격 모독을 이렇게 잘 하는 놈도 없을 거다. 서른일곱 살에 과장 달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 아니요.”

 

아차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 팀장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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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네가 문제다.”

알고 있어.”

 

소망의 깐족거림에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팀장이 부탁한 일이 있는데 늦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게 뭐니? 도대체. 일만 잘 하면 뭐 하냐고? 회사에서는 왜 저런 사람을 승진을 시켜서 우리 팀에 팀장으로 보내고 난리야. 과장 직급에. 아우. 짜증나.”

왜 네가 열을 내?”

 

아이스티를 만들며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숨에 커다란 머그잔을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데 너 어디 다녀왔어? 재필이?”

아니.”

그럼?”

정기연 기억나?”

누구?”

 

소망의 멍한 표정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면 소망이 더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오늘 술이나 한 잔 할래?”

미안.”

 

우리의 제안에 곧바로 소망은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그 사람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서. 우리 오늘 만난 지 100일이거든. 너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아니다. 너 급하면 내가 그냥 그거 취소할게.”

됐다.”

 

우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소망에게까지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오늘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외식하기로 했어. 외식. 맛있는 거.”

너희는 참 좋겠다.”

 

소망은 벽에 살짝 몸을 기대며 입을 내밀었다.

 

나랑 그 사람은 이제 겨우 100일인데도 뭔가 소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래.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 다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도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도 너희처럼 오랜 시간 잘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뭐 비법이랄 게 있나?”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만나는 거지.”

 

그러게. 너희는 싸워도 꼭 다시 서로에게 돌아가더라. 부러워. 나는 싸우면 헤어질까봐 싸우지도 못하거든. 너희는 그래도 싸우면 서로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싸울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가는 거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너무 어려웠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었다. 유난히 사랑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편했다. 그리고 좋았다. 그 시간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도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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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집 좀 치우고 있으라니까. 나도 일하고 오면 되게 힘들어. 네가 이렇게 나 안 괴롭혀도 힘들다고.”

우리 자기한테 무슨 일일까?”

 

트렁크만 입고 있던 재필이 입을 쭉 내밀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안았다. 우리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다.

 

나 오늘 이럴 기분 아니야.”

왜 이래?”

기연이가 청첩장 주고 갔어.”

?”

청첩장 주고 갔다고.”

 

우리는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재필의 얼굴에 던졌다. 재필은 여유롭게 청첩장을 받아서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데서 하네.”

그게 다야?”

그럼?”

됐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

 

재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언성을 높였다.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왜 화가 났는지 말을 해야 나도 내 말을 할 거 아니야?”

우리 결혼 안 하니?”

?”

우리는 결혼 안 하냐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재필을 노려봤다. 재필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런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12년이야. 12. 자그마치 12. 이렇게 오랜 시간을 연애를 했는데. 너는 나한테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어떻게 한 번도 하지 않을 수가 있어? 우리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을 같이 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냥 청첩장이네. 좋은 곳에서 하네. 그 이야기가 전부야. 친구들이 너랑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그냥 미소만 짓고 오는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알아? 속에서 뭐가 막 끓어.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거 같아. 그런데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내 상황 알잖아.”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아직 취직 못 했어. 겨우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고 있다고. 이 집에서 너랑 같이 사는 게 전부야. 우리 두 사람이 하는 데이트. 그냥 영화나 보고 가끔 가다가 연극이나 보는 정도잖아. 뮤지컬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 전시회도 비싼 곳은 못 가잖아. 그런데 결혼이라니. 이런 곳에서 결혼 같은 거 말도 안 되는 거 아니야?”

꼭 그런 데서 하자는 게 아니잖아.”

 

우리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재필을 응시했다. 재필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그냥 앞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을 보면 앞이 없어. 그냥 여기에서 다 끝인 거 같아. 그냥 여기에서 딱 멈춰있는 거 같다고. 남들이 우리를 보고 부럽다고 그래. 12년이나 만났다고. 그런데 12년을 만나면 뭐해? 그냥 여전히 우리는 고등학생인데. 그 이후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우리 이제 스물아홉 살이야. 스물아홉이라고. 그런데 앞으로 나아갈 준비는 하지 않고 그냥 여기에서만 머무른 채로 이대로 시간을 보내라고? 너는 서른이 아무렇지도 않겠지? 여자는 달라. 앞자리가 달라지는 기분이 이상하고 불안하다고.”

나도 너에게 잘 해주고 싶어.”

.”

 

재필이 손을 대자 우리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재필은 다시 손을 데려고 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는 좋아? 그게 무슨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해? 너랑 아무리 이야기를 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는데. 됐어. 그만 해. 내가 잘못했어. 너는 아무런 꿈도 비전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재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그런 재필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너 한심해.”

서우리.”

너 한심하고 머저리 같아. 무슨 남자가 그렇게 꿈이 없니? 다른 사람들 다 갖고 있는 꿈같은 것도 없잖아. 요즘에 취업하려고 이력서는 제대로 쓰고 있는 거니? 안 된다고 너 지금 그냥 포기하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려는 거 아니야? 아르바이트 자리는 왜 늘리는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이 앞을 보지 않고 그렇게 답답하게 사는 건데!”

그만 해.”

너 진짜 한심하다고!”

그만 하라고!”

 

두 사람의 고함. 그리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으니까 그만 하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지금 내 처지. 내 상황 다 알고 있어. 굳이 너까지 하나하나 다 일러줄 필요 없어.”

내가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우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내가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그 모양이면 내 기분이 도대체 어떨 거 같아? 그런데 청첩장을 받아왔는데. 집에 네가 속옷만 입고 누워있으면 내 기분이 정말 얼마나 끔찍할지 아니?”

내가 나갈게.”

됐어.”

 

우리는 재필을 위아래로 훑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가는 날도 아니라고 씻지도 않고 있었네. 그냥 내가 나갈게. 우리 지금 더 이야기를 해봤자 싸우기나 하겠다. 그냥 피해야지.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우리 항상 그렇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재필은 미간을 찌푸리며 우리를 응시했다.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너에게 뭘 바라고 있다고?”

그게 아니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하라고. 그렇게 애둘러서 얘기하면 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건데?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나한테 다 풀면 내가 다 들어줘야 하는 거야?”

뭐라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 믿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꼴이라니.

 

네 눈에는 내 나이가 안 보이니?”

그게 뭐?”

그렇게 연애만 하면 내가 불안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지? 우리 두 사람. 정말 미래가 안 보이는 거는 알아? 앞이 보이지 않는데. 그냥 그렇게 묵묵히 나아가는 이 상황에서 내가 도대체 뭘 믿고 있어야 하는 건데?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하는 너를 보고 그냥 너만 믿고 있어야 하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됐어.”

 

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더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됐다고. 너랑 더 할 이야기 없어.”

 

우리는 그대로 가방을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 재필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를 붙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런 재필을 한 번 더 노려본 후 문이 부서지기라도 바라는 사람처럼 세게 닫고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