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고마운 사람
“책장하고 배달 시킨 거 다 왔더라.”
“그래?”
우리는 거실 한 켠에 잔뜩 쌓인 상자들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저걸 언제 다 정리할지 걱정이 되었다.
“완성된 걸로 살 걸 그랬어.”
“엄마. 그게 얼마나 비싼데요.”
우리는 겉옷을 벗으며 씩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뭐 어렵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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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지?”
“어? 아니야.”
은화가 옆에서 물을 들고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우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런 기계 따위에게 질 수 없었다. 그건 서우리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만 믿어요.”
“너 그래서 언제 자겠어?”
“거실에 책장은 해야지. 이게. 이렇게 하는 건데.”
우리는 설명서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뒤죽박죽.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미치겠네.”
“옆집 총각 부를까?”
“아니요.”
우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정식에게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런 모습까지 보일 수 없었다.
“내가 할게.”
“하지만.”
“할 수 있어요.”
“그래. 알았어.”
은화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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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씨?”
“으왓. 팀자. 옆집 아저씨. 여기 어쩐 일이에요?”
은화가 정식의 옆에 서있자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좀 불렀다.”
“엄마.”
“너 지금 열 시가 넘었어.”
우리는 그제야 시계를 바라봤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시간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 시간에 도대체 정식을 왜 부른 건지.
“엄마 이 시간에 옆집 분을 부르면 더 문제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어요.”
“하나도 하지 않은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정식은 우리의 곁에 앉아서 설명서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완전 거꾸로인 거 알아요?”
“네?”
정식의 말을 듣고 조립한 가구를 보니 거꾸로 조립되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보였다. 우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두 시간이나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괜찮다니까요.”
“뭐가 괜찮습니까?”
정식은 우리의 손에서 공구를 빼앗아서 우리가 힘들게 조립한 책장을 다시 해체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이내 못 마땅한 듯 입을 쭉 내밀었다.
“지금 역시나 여자는 가구 조립 같은 거 못 해. 이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는 거죠? 나 무시하면서?”
“아닙니다.”
“진짜요?”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우리 씨는 이런 쪽에는 별로 재주가 없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팀장님. 아.”
우리가 눌라자 정식은 미소를 지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요. 어차피 우리 어머니가 서우리 씨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부탁하려고 준비를 많이 하셨거든요.”
“그게 무슨?”
“아. 어머니가 오해를 하시네요.”
정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치 내가 서우리 씨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줄 알고 계십니다. 뭐 그런 게 아니라고 할 이유도 딱히 없는 거 같아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말하면요?”
“좋은 거죠.”
“팀장님 정말.”
우리가 눈을 흘기는 사이 정식은 책장을 세웠다. 우리가 두 시간이나 걸려서 잘못 만들었던 책장은 20분만에 책장의 모양새를 하고 바닥에 놓였다.
“이게 다 한 거죠?”
“네.”
정식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우리 씨가 내 실력을 너무 못 믿던 거 아닙니까? 내가 생각보다 이런 데 재주가 있거든요.”
“누가 뭐래요?”
“이거 세우는 거 좀 돕죠?”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정식의 옆에서 책장을 잡았다. 그리고 책장을 벽에 새우다 순간 비틀해서 정식의 품에 기대게 됐다. 정식은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먼저 유혹하는 겁니까?”
“무슨 말이에요?”
“맞는 거 같은데?”
“팀장님.”
정식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책장의 윗부분을 못질해서 벽에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 다음 아랫 부분들도 벽에 고정했다. 우리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 해요? 책 좀 정리하지?”
“아. 네.”
우리는 바닥에 놓인 책들을 꽂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던 정식은 다시 또 하나의 책장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조립하고 우리가 책을 꽂는 책장 옆에 놓고 다시 못을 박아 벽에 고정했다.
“책이 많네요.”
“제가 사달라고 할 때 유일하게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사주시던 것들이 바로 책이었거든요. 저도 워낙 책을 좋아했고요.”
우리는 가만히 책등을 어루만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은 어릴 적에 그런 거 없었어요?”
“네.”
“뭐야.”
정식이 너무 단호히 말하자 우리는 입을 내밀었다. 정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릴 적에 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사는 집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요즘 취미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요즘에요?”
“네. 로봇.”
“로봇이요? 어떤? 막 말하고 그런 거요?”
“아니요.”
정식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변신로봇 있잖아요. 막 사람이 타이즈 입고 싸우는 그런 특수 촬영물에 나오는 로봇 같은 거요.”
“에? 그거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우리의 반응에도 정식은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되게 좋아해요. 어릴 적에는 그것들 가지고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제 방에 로봇들이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을 보면 되게 기분이 좋습니다. 어릴 적의 저에게 어떤 보상이라도 해주는 거 같고요.”
“그렇구나.”
“이상하죠?”
“아니요.”
정식의 물음에 우리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정식은 미소를 지은 채로 가만히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상하다고 생각을 해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제가 되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조카를 준다고 로봇을 하나 샀다가 제가 가지고 보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아, 이게 내가 내 어린 시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상구구나.”
“그러게요.”
정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머뭇하다가 다시 책을 정리했다. 정식은 그런 우리를 보더니 이번에는 작은 상을 조립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고 열심히 집을 정리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충 바닥에 놓인 짐은 없어졌다. 방은 아직 정리를 해야 했지만 거실이 깔끔해진 것만으로도 너무 다행이었고, 그럭저럭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는데.”
“그러게요.”
시간은 한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식을 바라봤지만 정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미안해서 그렇죠.”
“뭐가 미안합니까?”
“다 미안해요.”
“미안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나저나 서우리 씨 어머니께서는 오늘 저희 집에서 주무시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머. 엄마.”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식이 우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주무시게 두세요.”
“하지만.”
“요즘 서우리 씨 어머니도 많이 힘드시지 않았습니까? 혼자서 이것저것 다 감당하셨어야 했고. 딸은 아프고. 게다가 일도 안 하시던 분이 요즘 일을 하시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정식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정식은 그 손에 힘을 주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집에 우리 둘만 있는 거군요.”
“절대 안 돼요.”
우리의 말에 잠시 정식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중학생입니까?”
“뭐가요?”
“우리 이제 성인입니다. 그런데 뭐 서로 호감이 있는 사이에 약간의 스킨십 같은 것도 안 되는 겁니까?”
“안 돼요.”
우리는 손을 빼내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사귀기 전에 그러는 거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요.”
“그럼 사귀면 되는 겁니까?”
“네?”
정식의 말에 우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의 앞에 섰다. 우리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벽을 손으로 잡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도망갈 곳이 있어요?”
“팀장님.”
“조정식 씨.”
“네?”
“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조정식 씨라고 부르라고요. 아니 회사에서는 미친 개, 쓰레기. 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할 때는 안 부르면서 도대체 여기에서 왜 그렇게 팀장님. 팀장님 부르는 겁니까?”
“내가 언제요?”
우리는 심장이 다시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정식의 숨결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붉은 입술. 저기에 입술이 닿으면 그 순간 타버릴 거 같았다.
서우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식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왜요? 아쉽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서 씻고 자요. 나는 여기 마저 정리할 테니까.”
“하지만.”
“얼른요. 어차피 서우리 씨가 있어도 정리는 안 될 거 아닙니까?”
우리는 입을 내밀고 욕실로 떠밀리다시피 밀려갔다. 정식은 그런 우리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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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거 다 정리한 거야?”
씻고 나온 우리는 멍하니 거실을 바라봤다. 어질러졌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실을 보니 뭔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도대체 왜?”
“왜요?”
“으왓. 안 갔어요?”
땀을 닦으며 나오던 정식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리의 앞에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좋아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는 그의 목을 붙들고 입술을 가져갔다. 정식의 체온이 그녀의 입술을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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