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창고/지독한 연애[완]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1장]

권정선재 2016. 10. 4. 18:32

1

그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을 쓴다 해서 달라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머리만 아파올 뿐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서운은 눈을 감고 잠시 머리를 뒤로 기대며 낮은 한숨을 뱉다 가방을 뒤적거려 아스피린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억지로 꿀꺽 삼켰다. 목에 걸린 이질감에 답답해 올 쯤 문이 열리고 백현이 들어섰다. 잠시 멍하니 서운을 바라보던 백현은 아무런 말도 않고 컵에 수돗물을 따라 건넸다. 물끄러미 그 컵을 바라보던 서운은 컵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왜 온 거야?”

 

탁한 목소리. 백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서운의 손에서 다시 컵을 빼앗아 싱크대에 올렸다. 그리고 잠시 그 곁에 서 있다가 컵을 씻어 정리하고는 서운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서운의 머리를 이끌어 어깨로 가져왔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거라면 망설이지 않았어.”

 

역시나 낮고 탁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는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리 원망스럽더라도 백현이 없더라면 견딜 수 없을 터였다.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이유가 없이 온 거야?”

. 이유가 있다면 네가 궁금해서. 아마도 지금 굉장히 힘들어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제대로 온 거 맞지?”

밉다.”

 

서운은 엷은 미소를 짓는 백현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버티려고 해도 몸이 이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더 마시는 것이 아니었는데.”

. 그래도 나는 네가 집까지 이렇게 혼자 올 수 있을지 몰랐어. 분명히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왜?”

너는 늘 나에게 의지하니까.”

아니.”

 

서운은 차갑게 고개를 흔들고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현이 도우려 했지만 그런 손을 뿌리치고 서운은 벽에 기대 차가운 눈으로 백현을 응시했다.

 

너는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두 사람 어울리지 않아.”

 

백현은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잠시 서운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재미있는 일이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서운은 한숨을 토해냈다.

 

뭐 하자는 거야?”

그냥 재미있는 거?”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에게 말려 들면 안 되지만 자꾸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백현은 이리저리 목을 풀면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싸늘하게 웃었다.

 

한서운. 너 정말. 진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너무 서운한데 말이야.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온 거니까.”

우리 두 사람은 끔찍한 사이니까.”

 

순간 서운이 비틀거리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려고 할 쯤 백현이 재빨리 서운을 붙들었다. 서운은 허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백현은 서로의 주위를 돌고 있을 뿐 서로에게 다가가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이런 식으로 맴돌고 서로를 아프게만 하는. 그리고 서로가 살아있는지 서로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정말 싫다.”

 

서운은 백현을 밀어냈지만 백현은 서운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느물거리는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뭐가 싫은데?”

나는 아무리 너를 미워하더라도 결국 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거. 피할 수 없다는 것.”

나를 이용해. 원래 네가 잘하는 거잖아. 그래서 나를 그 집에 보낸 거 아니야? 재벌가의 사위가 되라고. 그러니까 그냥 이용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리고 나는 너 이용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 싫어. 그거 너무 우습지 않니?”

 

서운의 눈은 가만히 백현을 응시했다. 백현은 그런 서운의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나 미워하잖아. 그러니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가 바로 이거야. 그냥 나를 이용하고 또 이용하는 거.”

그런 거 복수라고 할 수 있나?”

 

서운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그런 나른함에 백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복수. 자신이 서운을 떠나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순간부터 서운에게 아무런 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망친 것은 그였다.

 

너는 내가 너를 더 이용하고 그러기를 바랄 텐데. 그리고 내가 너를 이용하고 아프게 하면 할수록 그럴수록 나는 늘 네 옆에 있어야 하는 거니까. 이 모든 것들 결국 네가 바라는 것 아닌가?”

그럴 지도.”

그런 거라면 별로 해주고 싶지 않은데? 내가 너에게 왠지 모르게 말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일단 지금은 가만히 있어.”

 

백현의 목소리가 다시 낮게 울렸다.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증거가 아니었다. 백현은 화가 나면 쉽게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다지 인내심이 많은 타입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백현은 애써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래봤자 너는 내가 아니잖아.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 가겠지. 백현. 너에게 나라는 여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니.”

 

백현의 물음에 서운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딱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사장님을 감히 노리는 비서가 될 수는 없잖아?”

 

서운은 백현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백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못 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비서를 노리는 사장은 괜찮은 건가?”

그런 거 흔하잖아.”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서운은 백현에게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q백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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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사장 어제 집에 들어갔다면서?”

 

느물거리는 목소리. 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내의 오빠라는 사람. 아니 아내의 배 다른 오빠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그의 방에 들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이번에 돈이 좀 필요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거 왜 이래?”

 

태화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숙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사업이 어려워.”

접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처남. 그건 아니지.”

어차피 저랑 나은이 이미 갈라진 사이인데 여기에 와서 이러시는 거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사람도 좋아하지 않을 거 같군요.”

뭐라는 거야!”

 

백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화는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유리가 깨지고 손에 피가 맺혔지만 태화는 백현을 노려보는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혼 그거 겉으로만 한 거잖아. 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시킨 거잖아. 그런데 지금 뭐라는 거야?”

그래도 이혼을 한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네 정말.”

 

백현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곧 사무실은 짙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백현은 그렇게 한참을 담배를 피다가 자세를 고쳤다.

 

형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건 이미 법적으로 이 회사는 제 회사입니다. 그리고 이미 형님의 회사에 들어간 자금이 엄청나고요. 그런데 더 이상 제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 이상 도와드릴 거 없습니다.”

내가 다 까발릴 거야!”

그렇게 하시죠.”

 

태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현은 덤덤했다.

 

어차피 그런 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미 유경 그룹의 지분은 저에게 더 많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무도 저를 해임하지 못할 겁니다. 만일 유경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지게 될 테니까요. 그걸 모르시지 않지 않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아내 분께서 운영하시는 백화점 식당을 모조리 빼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지만 백현의 말에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모조리 다 옳았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었다. 여기에서 자금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의 업체는 망하는 거였다.

 

딱 큰 거 50장만 줘.”

그게 적은 돈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거면 일단 살 수 있어.”

그리고 또 죽겠죠.”

 

백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버튼을 누르고 태화를 노려봤다.

 

여기 쓰레기 치워.”

뭐 쓰레기!”

 

태화가 일어나서 백현에게 달려들기 전에 바로 경호원들이 그를 붙잡았다.

 

이거 안 놔!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모시고 가.”

 

백현은 조용해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꾸만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겨웠다. 모든 것들이 다.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사모님과의 약속 시간입니다.”

 

서운은 사무실로 들어와 백현에게 말해줬다. 백현은 그런 서운을 힐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