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긴급 자금 요청이라고요?”
백현은 다시 한 번 태화의 말을 반복했다. 이사들은 이미 태화의 편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백현은 어이가 없었다. 이 회사의 사장은 자신이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편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곳에 투자를 해서 다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처남.”
“사장님이죠.”
백현이 말을 고쳐주자 태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장님. 백 사장. 이미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그냥 그 돈을 날리자는 겁니까? 지금 돈을 조금만 더 넣으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 조금의 돈을 넣기 싫어서 지금 망치자는 건 아니죠? 그 돈을 아주 조금만 더 넣으면 지금 넣은 돈은 다 회수하고도 남을 겁니다.”
“지난 번에도 그렇게 투자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백현의 지적에 태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백현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솔직히 반대입니다. 도대체 왜 이 회사에 계속 투자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기업이 우리 회사라고 하더라도 이미 독립한 회사 아닙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도와달라는 말도 무시를 한 상황 아닙니까? 오히려 모기업의 위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이러는 거 우습지 않습니까?”
“우습다뇨!”
태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침을 튀기며 삿대질을 했다. 백현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이리저리 목을 풀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이사들의 의견을 묻는 자리입니다. 백 사장이 그런 식으로 나서면 지금 이사들이 제대로 의견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봐요. 백 사장. 이 회사는 내가 가질 겁니다. 왜 유 회장님이 백 사장을 회장이 아니라 사장 자리에 앉혔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죠? 그 자리가 내 자리라서 그런 겁니다.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나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만 하시죠?”
“누가 그럽니까?”
백현은 눈썹을 가늘게 떴다. 여기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은 백현도 알고 있었고 태화도 알고 있었다. 태화가 세게 나오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일 거였다. 하지만 백현도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그냥 표결하시죠.”
또 그 느물거리는 표정 백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죠. 표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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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자식은 왜 그러는 거지?”
사무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백현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창가에 섰다. 하루에도 몇 번이라도 이곳에서 그냥 뛰어내리고 싶었다. 저 밑에 아스팔트에 머리가 부딪치고 피가 튀기고 깊은 잔상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의 그런 죽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더라면 진작 그런 선택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아무 것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냥 누군가의 죽음으로 남을 뿐. 그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라운지에 예약이라도 해드릴까요?”
서운의 말에 백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서운에게 다가오더니 그녀를 벽으로 몰아서 벽을 손으로 짚었다. 서운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렇지도 않아?”
백현은 고개를 숙여 서운의 향기를 맡았다. 짙은 향. 백현이 그녀에게 입술을 가져가려 하자 서운은 고개를 피했다. 백현은 그런 서운의 턱을 잡아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 후 그녀의 귀를 살짝 물었다.
“내가 싫어?”
“회사입니다.”
“회사가 아니면 된다는 건가?”
서운은 그런 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옆으로 비켜났다. 백현은 혀로 이 안 쪽을 훑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가 나은과의 결혼을 선택한 이후에 이 정도 여지도 주지 않았으니까.
“아직도 원망하는 건가?”
“제 감정이 중요하십니까?”
“적어도 낮에는 중요하겠지. 한서운. 네가 취하지 않으면 나에게 너무나도 도도하지만. 뭐, 취하고 나면 그런 감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그래. 알았어. 유태화 회사 어떤 일인지 알아봐.”
“이미 준비했습니다.”
서운은 품에 들고 있던 서류 철을 내밀었다. 백현은 손가락을 튕기고 그것을 받아서 대충 넘겨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 운영이 이렇게 최악일 수는 없었다. 막무가내. 그런데 여기에 돈을 더 넣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털고 나서는 것이 나았다.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거였다.
“차 준비해.”
“어디로 가시게요?”
“이곳.”
백현의 서류를 흔들자 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본능적인 반응에 백현은 싸늘하게 웃더니 그대로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그러쥐었다. 그의 손에 딱 들어오는 엉덩이. 서운은 그런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백현을 밀쳐내고 스커트를 가볍게 털었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보고 더 나은 남자가 되라고 한 것은 당신이야. 그래놓고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가?”
“사장님. 그럼 가시죠.”
서운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의 방을 나가버렸다. 백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넥타이를 목에 맸다. 다시 갑갑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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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대단해. 처남이 여기까지 오고.”
백현이 사장실로 들어서자 태화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박수까지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신의 긴장을 숨기기 위해서 이런 허세를 부리는 모양이었다. 백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 철을 그의 테이블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런 태도에 태화는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이따위 회사에 지금 자금 투입을 바라신 겁니까?”
“이따위?”
백현의 말이 성질을 건드린 모양인지 태화는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백현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을 보고 그 주먹을 다시 폈다. 그리고 나서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검지로 백현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네가 잘나서 지금 그 자리에 갔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그 회사는 우리 아버지 회사라고. 우리 아버지가 멍청한 짓을 해서 너에게 그 회사가 갔지만 내가 곧 다시 찾아올 거야.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 아니지? 그 회사 내가 다시 가지고 올 거야.”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백현은 태화의 손가락을 잡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백현은 더욱 세게 힘을 줬다.
“앞으로 이런 식의 행동은 하시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빨리 다른 수단을 찾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본사 차원에서는 이제 이쪽에 들어간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주주들이 저를 배임 혐의로 처리하려고 할 테니까요. 이런 회사에 투자라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자금을 회수한다고?”
태화는 뭔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분명히 회의에서는 그의 회사에 자금이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사들이 결정한 것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지금 백 사장 되게 많이 실수하는 거야. 그 자금을 빼는 거. 그거 이사들의 결정에 반하는 거라고! 주주가 뭐가 중요해. 그런 소액주주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큰돈이라는 걸 몰라?”
“회장님꼐서 동의하셨습니다.”
“뭐라고?”
유 회장이 아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라도 지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 모든 잘못이 모두 그에게 올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회장님이 그런 선택을 하셨다고? 말도 안 돼. 그래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그래? 내가 직접 회장님을 만날 거야.”
“소용 없을 겁니다.”
백현의 싸늘한 어조에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백현이 진심으로 대하는 일에 대해서 태화가 덤덤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란 없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가볍게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그냥 회사의 본부장으로라도 돌아오라는 회장님의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겁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탐내는 기업도 있으니 거기에 매각을 하면.”
“절대 안 돼!”
태화는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리저리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백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런 태화를 응시했다. 태화가 그렇게 한참 난리를 피우고 나서 다시 백현에게 다가와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그를 노려봤다.
“죽일 거야.”
“저를 말씀입니까?”
“그래.”
“그럼 그러시죠.”
백현의 덤덤한 대화가 태화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태화가 그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곧바로 경비에 의해서 막혔다. 태화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아무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재산을 아내 분께 돌리시죠. 내일부터 바로 집행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자금을 빼낸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주가가 미친 듯 폭락하고 다른 채권자들도 돈을 찾아가려고 할 겁니다. 저는 이 정도로 마지막으로 해드리는 거라고 생각을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백현은 그대로 돌아섰다. 태화가 뒤에서 고함을 질렀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서운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백현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운은 백현을 한 번 보고 그의 손을 놓았다. 백현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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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렇게 했군요.”
나은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나은은 다리를 꼬고 물끄러미 백현을 보다 입을 내밀었다.
“그래도 오빠랑 너무 사이 나쁘게 지내는 것은 안 좋을 텐데. 그 사람 당신에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알고 있죠?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미리 알아야 할 텐데요.”
“당신이 신경을 쓸 일이 아니야.”
“그럴 테죠.”
백현의 차가운 대답에도 나은은 별로 상처를 받지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목을 풀고 멀리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가 자신에게 오자 백현은 미간을 찌푸렸고 나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그게 뭐야?”
“남자면 이러면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거죠.”
나은은 일부러 연기를 뿜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고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칵테일 잔에 던져 넣었다. 연기가 길게 오르고 백현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잔에.”
“어쩌겠어요? 여기는 재떨이도 없는데. 아무튼 알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이제. 오빠는 이제 당신에게 덤벼 들겠죠.”
“당신의 주식이 있으니까.”
“아니요.”
나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은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자 백현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은은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저 무표정하게 바에 엎드렸다.
“나는 재단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귀찮아요. 그런데 그런 것까지 하라고요? 말도 안 돼. 귀찮아. 마음에 안 든다고. 당신이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사장 자리에 앉혀준 거니까 그런 귀찮은 건 모두 당신이 처리를 해야죠. 나보고 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백현은 독한 술을 모두 들이켰다. 나은은 박수를 치며 밝게 웃었다. 백현은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나은에게 놀아나서 그녀가 바라는 대로 뭐든 다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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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퇴근하는 거야?”
“미친 새끼.”
서운이 오는 것을 본 동우가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서운은 문을 열어주는 그를 노려보고 섰다.
“뭐 하자는 거야? 이거 스토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너랑 자고 싶어.”
“미친 새끼.”
동우는 떨리는 눈으로 서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려는데 동우가 문을 붙잡았다. 서운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은 채 그저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경찰 부를까?”
“자자.”
“미친 새끼. 꺼져.”
서운은 동우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리고 문을 세게 닫았다. 그리고 이내 동우도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운은 이리저리 몸을 풀면서 그대로 소파에 푹 꺼지듯 앉았다. 몸에 꼭 맞는 소파는 그녀의 안식이었다.
“백현. 채동우.”
서운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슴을 돌로 누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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