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죄송합니다.”
“아니야.”
백현의 사과에 유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역시 이미 태화의 회사에 더 이상의 자금을 넣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현의 말처럼 그 회사의 자금 투입을 끊으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못할 거였다. 하지만 이미 백현이 내린 결정을 굳이 그가 번복할 이유까지도 없었다.
“그 녀석은 뭐라고 하는가?”
“일단 회장님께서 동의하신 일이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 이상의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 말씀은 잘 듣는 분이니까요.”
“그렇지.”
그나마 태화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태화의 유일한 아들. 그는 꽤나 많은 재산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유 회장만 죽으면 백현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 가지고 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굳이 유 회장의 말을 거역하거나 반대하고 척을 둘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다른 회사에서 원하는 곳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어차피 식품을 주로 다루는 회사가 아니니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나섰다고 사고를 치느니 그쪽 전문 회사에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인수하지.”
백현은 가만히 유 회장의 눈을 바라봤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러게.”
유 회장은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토해냈다. 태화에게 주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망친 회사를 또 어떻게 망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모기업에서 독립을 시킨 회사가 경영이 어려워서 다시 인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위기를 몰고 온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인수를 했으면 해.”
“그 뒤 방법이 없습니다.”
“나은이.”
유 회장의 대답에 백현은 눈썹을 꿈틀했다. 나은은 절대로 전면에 나서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저 재단 일을 관리하면서 미술관 운영에 힘을 쓰며 뒤에 있을 따름이었다. 유 회장은 이미 백현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자네가 설득하게.”
“듣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토를 다는 겐가?”
“죄송합니다.”
유 회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백현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유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자네 말을 들을 거야.”
“알겠습니다.”
백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았다. 나은은 절대로 쉽게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였다. 그녀 나름의 궁리에 결국 백현마저 휘말리고 만 걸 거였다. 하지만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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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회사를 맡으라고요?”
“그래.”
백현의 말에 나은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견이 말이 안 된다는 것 같기도 하고,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나?”
“죽어가는 회사라면서요?”
“그래.”
“그런 걸 준다고요?”
“그래.”
백현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간단히 대꾸했다. 나은은 입을 쭉 내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회사 괜히 맡아서 이상한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아. 뭐가 회생 가능한 회사를 준다면 모를까. 어차피 회사가 인수를 할 거면 그냥 오빠가 운영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오빠가 미워도 오빠에게 뭔가 은혜를 베푸는 게 어때요? 그게 나쁜 선택은 아닐 거 같은데 말이에요.”
“은혜?”
백현은 코웃음을 흘렸다. 백현은 그리고 아무런 것도 담겨 있지 않는 눈으로 물끄러미 나은을 보며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몸을 뒤로 기대서 술을 들이켜는 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람은 그런 기회를 주면 그걸 계단으로 삼아서 다시 나에게 칼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닌가?”
“그렇겠죠.”
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절대로 백현에게 쉽게 고개를 숙일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데 굳이 그 방법을 궁리하고 복잡하게 갈 이유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편한 방법을 택하면 되는 거였다.
“유 회장님의 말씀이야.”
“아. 아버지요.”
나은은 입을 쭉 내밀며 머리를 돌돌 말았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눈을 감았다. 시간은 흘렀다. 하지만 백현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은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은은 눈을 뜨고 길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이완시키며 뒤로 눕듯 기댔다.
“싫어요.”
“유나은.”
백현의 낮은 목소리에도 나은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목을 살짝 가다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랑 다시 살래요?”
“뭐라고?”
백현이 날카롭게 반응하자 나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이라도 빨리 재혼을 하지 그래? 그렇다면 회장님께서도 이상한 미련을 갖지 않으실 텐데 말이야.”
“나는 당신이 좋아요.”
나은은 백현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엷게 웃었다. 백현은 그런 나은의 손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맡지 않는다고 하면 그쪽은 내가 알아서 사장을 선임하지. 일단 당신은 뜻이 없는 걸로 알겠어.”
“그래요.”
나은은 밖으로 나가는 백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고 몸을 뒤로 젖힌 후 깊은 숨을 토해냈다.
“안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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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돼.”
서운은 멍하니 백현을 바라봤다. 지금 백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표정에 백현은 살짝 짜증이 났다. 서운은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아니면 그 회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회장님께서는 나은이를 원하지만 맡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래도 사모님을 설득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백현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백현의 반응에 서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녀가 맡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그녀가 맡는다면 호사가들은 백현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나눌 거였다. 백현에 대해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일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관심이 없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갈 사람이 없어.”
하지만 서운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유태화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몰랐다.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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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
태화는 주먹을 세게 쥔 채로 책상을 내리쳤다. 하지만 백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그를 노려봤다. 태화는 성큼성큼 백현에게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백현은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식품은 지금 위기만 넘기면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될 거야. 다른 기업들도 전부 다 식품 사업에 뛰어드는 거 보면 몰라? 그런데 지금 그 오리의 배를 가르려는 이유가 뭐야! 우리 집안을 망가뜨리려는 거야?”
“당신이 무능력하니까.”
“당신?”
백현의 말에 태화는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백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태화가 움직여줬다. 백현의 미소를 본 순간 태화는 뭔가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한 비서. 봤지?”
“네. 모두 촬영되었습니다.”
“촬영?”
“상습적으로 폭행을 하시는 분이라 저희가 이번에는 처음부터 영상을 좀 찍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저 위에. 이미 CCTV도 설치가 되어 있으니. 따로 찍지 않았더라도 영상 확보는 충분했을 겁니다.”
서운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태화는 이를 악 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서운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사장님께서 더 이상 나쁜 일을 하시면 유 회장님께서도 모두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백 사장님께서도 포기만 하시면 더 이상은 하시지 않을 겁니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요.”
“이거였어?”
태화는 서운을 가리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백현은 목을 이리저리 풀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백현의 판이었다.
“좋아. 그럼 적어도 매각하는 돈 중 일부는 나에게 줘. 어차피 그건 내 회사였으니까. 내가 권리가 있어.”
“당신에게 피해 보상을 신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이는데.”
“뭐라고?”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은 싸늘하게 웃은 채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피가 묻어나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얻을 것을 얻은 상황에서 굳이 태화를 더 자극할 이유도 없었다.
“제가 운영하는 기업에서 들어간 자금. 그거 회수하지 못하면 제가 모두 다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거부터 받아야겠습니다. 유 회장님께서도 이미 다 동의하신 부분입니다. 혹시라도 회장님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이시라면 제가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할 거야.”
태화가 세게 나오자 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능구렁이 같은 유 회장은 아마 태화를 만나면 또 그의 편을 들어주고 말을 만들어낼 사람이었다. 태화가 가능하면 유 회장과 대면하는 기회를 줄여야 했다. 그래야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판이 돌아가고 그에게 유리하게 판이 움직일 거였다. 백현이 어떻게 이 상황을 피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 순간 백현의 방 문이 열렸다. 나은이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어?”
나은은 요란하게 구두 소리를 내며 백현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서운을 보며 일부러 가슴을 비볐다. 그 다음 태화를 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이내 까르르 웃어대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 오라버니가 서방님 얼굴을 망가뜨렸네.”
“미친 년. 이미 이혼한 주제에 어디에 와서 끼 부리고 지랄이야? 지 애미 닮아서 걸레 같은 년이. 어디에서 오라버니래?”
“아. 맞다. 우리 오라버니 못 배워서 천박하지. 큰어머니가 밀려나고 나서 완전 거지처럼 살았잖아. 그리고 맞네. 지금도 거지고. 그래서 지금 내 남편한테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거잖아. 안 그래?”
“미친 년.”
태화는 욕만 내뱉을 뿐 실제로 나은에게는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미 그의 어머니는 버림받은 지 오래였으니까. 나은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유 회장이 안다면 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백현을 노려봤다.
“잔대가리 굴리는 거면 대가리에 총 박아 버릴 거야. 미친 년놈들이 누구를 등신으로 알고 이러는 거야.”
태화가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자 순간 고요가 흘렀다. 백현의 얼굴을 살피던 나은은 그의 얼굴에 생채기가 난 것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현의 얼굴을 살짝 만지다가 곧바로 서운에게 다가가서 뺨을 날렸다. 엄청난 소리가 울리고 백현은 재빨리 나은을 밀쳐냈다.
“뭐 하는 짓이야?”
“비서라는 게 자기 상사 하나 제대로 못 모셔? 미친 개가 날뛰면 네가 몸으로 막아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서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은은 백현을 노려봤다.
“저런 멍청한 년 좋아하지 말고. 나 좋아해. 어차피 두 사람은 아무 것도 못 하는 사이잖아. 안 그래?”
나은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백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손의 차가운 촉감에 백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은은 싸늘하게 웃고 다시 서운을 바라보며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워냈다.
“한 번만 더 이 사람 얼굴에 상처가 나면 그때는 너를 죽일 거야. 내 건 아니더라도 구경 정도는 할 권리가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서운은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금세 붉게 부푼 얼굴에 백현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려고 하자 서운은 뒤로 물러났다. 백현은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나은은 두 사람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둘 영화 찍니?”
나은은 다시 요란한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서운도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백현은 다시 고요 속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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