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미안해.”
“아니.”
백현의 사과에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녀가 백현을 거절한 그 순간 그와 자신의 신분은 달라져버린 거였다. 사실 나은에게 밀어버린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백현의 탓을 할 수 없었다.
“아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시던데.”
“그래.”
백현의 쓴 웃음에 서운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백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은 그런 백현을 본채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지만 할 말은 없었다.
“지난번에 가져다드린 홍삼은 다 드셨나?”
“드시기는. 가져다 드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다 팔아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엄마한테 너무 잘 해주지 마. 네가 너무 잘 해주니까 그게 마치 당연한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니까.”
“나를 키워주셨으니 당연한 거지.”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의 말은 너무나도 아린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백현은 그런 서운의 눈치를 살피고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서운은 애써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집에서 자란 자신들이 연인이 된다는 건 우스웠으니까.
“그럼 언제 가는 걸로 할까?”
“주말에 가지. 주말에.”
“그렇게 알고 있을게.”
서운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멀어졌다. 간단한 것에서까지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지만 그도 서운과 마찬가지로 먼저 손을 내밀 용기 같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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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연애하자.”
“미친.”
동우의 말에 서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지나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동우는 평소와 달랐다. 그의 눈빛에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며 벽에 살짝 기대 서서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가난하잖아.”
“그래도 그 사람처럼 돈만 많고 너 혼자 두게 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네 옆에서 너를 지킬 거야.”
“나를 지켜?”
서운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서운의 반응에 동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서운이 그에게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너는 나를 지키지 못해.”
“적어도 그 사람처럼 너를 이렇게 혼자 들여보내지는 않겠지. 저녁만 되면 불안해. 네가 또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어떤 미친놈이 너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그 미친놈이 너야.”
서운은 혀로 입술 안쪽을 훑으며 동우를 응시했다. 동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지만 비켜날 의지는 없어 보였다. 서운이 그에게 다가가서 팔을 잡으니 동우는 오히려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 동안 네가 최소한의 경계를 들어오지 않아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거야. 나는 네가 우리집 비밀 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도 무서워. 그러니 비켜줄래? 경찰에 신고해서 네가 얼마나 끔찍한 스토커고 나를 지독하게 보는지 말을 하기 전에 말이야.”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만 아니면 아프지 않아.”
서운의 차가운 말에 동우는 비켜났다. 서운은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은 후 큰 소리로 문을 닫은 후 집으로 들어갔다. 동우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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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지 않는다는 게냐?”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아요.”
나은의 말에 유 회장은 미간을 모았다. 나은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서야 하는 일도 있었다.
“네가 지금 나서지 않으면 네 남편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된다. 내가 평생을 일궈 온 회사가 유 씨가 아니라 백 씨에게 가게 돼. 지금 너는 나 보고 그걸 다 보고 있으라는 게야? 그런 거야?”
“그럼 오빠에게 주면 되잖아요.”
나은의 나른한 대답에 유 회장은 주먹을 쥐고 상을 세게 내리쳤다. 나은은 다리를 살짝 꼬고 입을 내밀었다.
“우리 아버지 또 성질 나오시네. 유 회장님.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그 회사 지분 제가 차명으로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알아서 앞에서 모든 것을 해주는 거라고요. 내가 괜히 나서서 욕을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버지는 아버지 딸이 괜히 사람들 욕 먹고 그랬으면 좋겠어?”
“태화를 돕지도 않고. 너한테도 뭔가 다른 말을 한 것이 아니야? 식품 회사 맡으라는 내 말을 그대로 전했어?”
“네. 그대로 전했어.”
나은이 바로 대답했지만 유 회장은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은은 입을 쭉 내밀고 몸을 살짝 뒤로 기댄 후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아버지. 이제 많이 늙었네. 그런 걸 다 불안해하고. 어차피 그 사람 아버지가 보고 고른 멍멍이인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그 사람 바로 나에게 와서 맡으라고 했어. 아버지가 하라고 했다고. 그리고 지금도 다른 생각 안 하는 사람인데 너무 그렇게 예민하게 행동하지 마요.”
“그 녀석 잡아.”
“아뇨.”
나은은 입을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유 회장은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마음도 없는 남자를 붙잡고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 사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형태의 삶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나 자유롭게 살라면서요. 그러면서 지금 나보고 그 사람의 인형이 되라는 건 도대체 뭐야?”
“여자는 그래도 돼.”
“아버지.”
나은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여기에서 더 있어봐야 좋은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유 회장에게 허리를 숙여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태화였다.
“아. 입이 거친 우리 오라버니.”
“네가 여기 왜 있어?”
“아버지 옆에 있는 게 문제야?”
나은은 유 회장의 손을 한 번 꼭 잡고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태화를 향해서 가볍게 손을 흔들고 회장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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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 차명계좌 내 걸로 조금 돌리려고 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좋지만. 뭔가 나도 힘이 있어야 할 거 같아서요. 오빠가 아버지를 따로 만나러 온 것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유 회장님을 만났다.”
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 회장이 겉으로는 태화를 밀어내려고 하지만 은근히 많은 것을 챙겨준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은은 그런 백현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이내 표정을 지우고 백현을 바라봤다.
“내가 고른 남자가 이렇게 배포가 작아. 아버지 그래도 당신 버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유 회장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 오빠라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야. 그 사람이 뭘 할지 모르니까.”
“그렇죠. 그래서 계좌는 어떻게 할래요? 그걸로 내가 내 지분을 조금이라도 확보했으면 하는데. 그러면 조금 당신도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요? 적어도 오빠보다는 내가 당신의 편을 들 테니까.”
“반대일 수도 있지.”
백현의 차가운 대답에 나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하지만 나은은 그 표정을 오래 짓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월요일 변호사와 함께 만나지.”
“바빠요?”
“바빠.”
백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은은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백현을 따라 일어난 후 그에게 가볍게 몸을 기댄 후 셔츠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백현은 헛기침을 하고 나은을 밀어내고 멀어졌다. 나은은 엄지로 입술을 매만지며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이 나를 고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천한 계집에게 가게는 둘 수가 없지. 그건 자존심이 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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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끝나신 겁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백화점.”
서운은 문을 열고 반대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백현은 눈을 감고 있다가 숨을 크게 쉬고는 다시 눈을 떴다.
“어머니 가을 옷 사야지.”
“어머니라면?”
“업무 끝났어.”
백현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서운은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머리도 푼 훈 아랫입술을 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끔찍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은 받을 자격도 없는.
“엄마가 너를 얼마나 많이 학대를 했는데 너는 그런 여자에게 선물 같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래도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거야. 여태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백현의 덤덤한 고백에 서운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 후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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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엄마 얘 뭐야? 더러워.”
“모르겠다. 거리에서 울고 있는 거 데리고 왔어. 망할 놈의 여편네들이 아무도 얘를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더라고. 경찰서에 갔더니 미아 뭐 이야기는 없다고 하고. 안 데리고 가면 그냥 고아원이라는데 그게 말이 되니? 요즘 뉴스에 얼마나 많이 나와? 그런데 가면 사람 아주 못쓴다고 말이야.”
화자의 말에 서운은 조심스럽게 기둥 뒤에 숨었다. 화자는 우악스럽게 서운을 잡아 내서 아이 앞에 세웠다.
“네가 씻겨.”
“어? 내가?”
“그럼 누가 해? 네 엄마는 지금 하루 종일 네년 배에 들어갈 밥값 벌고 오느라 힘들어. 저녁도 해야 하는데 저걸 어떻게 씻겨? 너 강아지 키우고 싶어 했잖아. 네 개새끼라고 생각하고 씻겨.”
화자는 요란스럽게도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운은 잠시 아이를 바라보더니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서운. 너는 이름이 뭐야?”
“...현.”
“뭐라고?”
“백현.”
“백현? 이름이 두 글자야? 성은 없어?”
서운은 자신의 이름과 약간 다른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백현의 손을 붙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끓고 있는 뜨거운 물을 몇 바가지 퍼서 고무 대야에 부은 후, 찬물을 부어서 손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만족할만한 온도가 되자 백현을 바라봤다.
“옷 벗어.”
“싫어.”
“벗으래도.”
서운은 그녀의 모친처럼 거칠게 백현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백현이 속옷 하나만 남고, 그것마저도 벗기려는 순간 백현은 속옷을 꼭 잡고 도리질을 쳤다. 그제야 서운은 백현이 사내애라는 것을 알았다.
“너 남자야?”
“응.”
“그럼 팬티는 입어. 들어가.”
백현은 쭈뼛거리며 대야에 들어갔다. 서운은 익숙하게 백현에게 물을 끼얹고 그의 머리에 비누질을 벅벅 했다. 거품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감지 않은 머리에 서운은 더욱 신이 났다. 그리고 동을 밀어주고 열심히 백현의 몸을 닦았다.
“너는 도망가지 않을 거지?”
“도망?”
“너는 내 강아지니까. 도망가지 마. 내가 앞으로도 이렇게 너 씻겨줄게. 너 목욕 시켜줄게. 도망 가지 마.”
“응.”
백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백현의 대답에 서운은 더욱 힘이 나서 열심히 백현의 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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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라고?”
“응.”
“사내는 별로 쓸 데도 없는데.”
“그래도 기르자.”
서운의 말에 화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애라면 뭔가 집안일에도 보탬이 되겠지만 사내는 그런 일에 있어서 젬병이었다.
“됐어. 안 그래도 너 하나 거두는 것도 힘든데. 얘까지 내가 어떻게 키워? 오늘 시장에 가서 얘 부모 있으면 내가 줘야겠다.”
“그러지 마. 엄마. 응?”
서운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화자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서운은 백현을 쳐다봤지만 백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서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자리에 앉아 입에 밥을 퍼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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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백현.”
서운은 멀어지는 백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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