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어머니 좀 괜찮으세요?”
백현은 화자의 손을 꼭 잡았다. 화자는 그저 눈만 깜빡이는 채로 백현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백현을 살피던 화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백현의 얼굴을 만들었다.
“백현.”
“그래요. 맞아요.”
백현은 미소를 지은 채로 화자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화자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백현은 휴지로 화자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만히 고개를 흔들고 조심스럽게 화자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일이 바빠서 자주 오지 못했어요. 이제 더 자주 오도록 할게요. 어머니께서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계신가봐요. 살이 많이 빠졌어.”
“저 년이 안 줘!”
화자는 고함을 치며 서운을 가리켰다. 서운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현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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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해지셨네.”
“그렇지.”
서운은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백현이 그것을 뺴앗아서 부러뜨렸다. 서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담배갑을 꺼냈지만, 백현은 그것을 가져가서 그대로 구겨버린 후 주머니에 대충 우겨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몸에 해로워.”
“미친.”
서운은 낮게 욕설을 내뱉고 성큼성큼 걸었다. 백현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서운은 백현을 노려봤다.
“뭐 하자는 거야?”
“한서운 정신 차려. 어머니가 저 상황인데 너까지 이러면 도대체 누가 어머니를 지키라는 거야?”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 도안 나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거야? 내가 오지 않은 사이 이렇게 심각해지신 거야?”
“아니.”
서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화자는 이상하게도 백현만 나타나면 정신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어떤 생각 때문일 거였다. 서운은 화자가 백현을 자신보다 더 아낀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돌아가자.”
“어머니랑 자고 가지.”
“아니.”
백현의 제안에 서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화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였다. 지금도 과거의 것만을 겨우 기억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회의야.”
“그래.”
백현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서운은 한 번 생각한 것을 쉽게 접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서운은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백현은 심호흡을 크게 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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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같이 오네.”
백현의 집 앞에 있는 나은을 보고 서운은 고개를 숙였다. 나은은 서운에게 다가섰고 백현이 그녀륾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그러게요.”
백현의 물음에 나은은 가만히 고개를 들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살짝 어깨를 으쓱하고 벽에 몸을 기댔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닌데 너무나도 이상하게 이 여자가 당신 옆에 있으면 화가 나네요. 내가 생각하기에 이 여자는 당신하고 그다지 어울리는 타입의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보다 나아.”
백현의 직접적인 말에 나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현을 피해서 서운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들었다. 백현이 흠칫 놀라자 나은은 웃음을 여전히 띠고는 서운의 얼굴을 만졌다.
“저 사람의 반응이 보여?”
“네.”
“저 사람은 네가 다칠까봐 걱정이 되나. 내가 너를 또 때려서 망가뜨릴 거 같은 생각이 드나봐.”
“아닙니다.”
나은은 손톱을 가볍게 서운의 얼굴이 가져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생채기가 날 수 있을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붙어있는 손톱. 나은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손을 거두어 팔짱을 끼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뭐가 좋을까?”
“유나은.”
“알았어.”
백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나은은 양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뭐야?”
“식품 사업 한다고.”
“뭐라고?”
백현은 침을 삼켰다. 이런 백현의 반응에 나은은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럴 줄 알았어.”
“뭘 이럴 줄 알았다는 거야?”
“얘지?”
나은은 서운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다 곧바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눈을 반짝였다.
“내가 아무리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나가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있는 여자가 그 자리에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봐줄 수는 없지. 게다가 그 여자가 너무 급이 떨어지면 안 되잖아. 당신이 내 남자였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데 겨우 비서에게 간다고 하면 다들 뭐라고 생각을 하겠어? 안 그래? 당신은 내 자존심을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러면 이런 여자를 만나면서 내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리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당신을 귀찮게 하려고.”
나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더욱 차가운 눈으로 서운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고 침을 삼켰다.
“그래서 이 여자가 식품 파트를 맡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개 비서가 감히 사장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것도 당신의 새로운 연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자리에 가게 하면 안 되는 거지.”
“그건 제가 거절했습니다.”
“거절?”
서운의 대답에 나은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은은 다시 서운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날리려는 순간 백현이 붙잡았다. 나은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백현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당신이야 말로 뭐 하는 거지?”
백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에게 화가 난 거라면 나에게 풀어. 엉뚱한 사람에게 그 분노를 털어놓지 말고. 지금 당신 모습 천박해.”
“내가 천박하다고?”
나은의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졌다.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를 당신은 모르는 거니?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그래 놓고서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백현. 당신이라는 남자 도대체 왜 이렇게 잔인한 거라니?”
나은은 백현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토해내고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입을 쭉 내밀다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 안 어울려.”
“네 동의를 받을 사이는 아니야.”
“남매잖아.”
서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어머. 자기는 그게 마음에 걸렸구나.”
나은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박수까지 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지우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부터 한 집에서 살았잖아. 물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산 사이인데. 상대방이 이성으로 보인다고 하면 그거 조금 이상한 거 아닌가? 뭔가 징그러운 거잖아.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았으면 그건 가족이라고 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런데 두 사람 설마 벌써 자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 그런 거라면 너무 놀라울 텐데 말이야.”
“닥쳐.”
결국 백현의 입에서 저급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나은은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만 해야겠네. 나는 당신이 화를 내는 게 그렇게 섹시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나에게도 손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물론 백현은 정말로 매너가 좋은 남자라 그런 일은 안 하겠지만.”
나은은 백현의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그 서류 확인해. 그거 보면 내가 그 식품 회사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제대로 된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꺼져.”
“내일 사무실로 갈게.”
나은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이마를 짚었다.
“미안.”
“아니.”
서운의 대답. 너무나도 짧았다. 백현은 서운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들어갈게.”
“응. 내일 봐.”
백현은 힘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서운도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집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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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걸 왜 맡아?”
“그렇게 됐어.”
백현을 만나고 온 나은은 곧바로 태화에게 왔다. 술을 마시던 태화는 주먹을 세게 쥐고 그녀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회사는 너랑 어울리는 회사가 아니야. 그 회사 내 거라고. 유일하게 아버지가 내게 준. 그런데 너는 그 회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응.”
나은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그대로 손에 든 잔을 벽에 던졌다. 잔이 깨지고 그 유리 파편이 그대로 나은의 얼굴로 날아와서 작은 생채기를 남기고 피가 한 방울 흘렀다. 나은은 뺨을 만지고 피를 확인하더니 웃었다.
“이제 오빠는 내 말을 들어야겠네. 아버지의 인형을 망가뜨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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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뭐야?”
집으로 돌아오니 동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운은 그를 무시한 채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동우가 그녀를 막아섰다.
“비켜.”
“그 여자 뭐냐고?”
“비키라고.”
“한서운.”
동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고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도대체 왜 이렇게 내 일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어. 이건 내 일이야. 네가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꺼져줘. 너 이러는 거 지금 심각한 범죄라는 거 모르는 건 아니잖아?”
“범죄라고 해도 상관이 없어. 나는 네가 힘들어하는 게 싫어. 그 여자 내가 죽여줄 수도 있어.”
“네가?”
서운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물끄러미 동우를 응시했다.
“절대로 그런 일 하지 마. 네가 그따위 짓을 하면 저 사람이 너무나도 힘들어 할 테니까. 나는 저 망할 녀석이 힘들어하는 게 너무 싫으니까. 네가 허튼 짓을 한다면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래.”
동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동우는 여전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서운은 동우를 노려보더니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눈을 크게 떴다.
“뭐 하자는 거야?”
“아프지 마.”
“너 때문에 힘들어.”
“조금 더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서운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녀는 동우를 향해서 손을 들었다. 그러나 피하지 않는 동우에 다시 손을 내렸다.
“변태 새끼.”
“네가 아무리 나를 때려도 괜찮아. 그건 아프지 않아. 나는 네가 아픈 게 싫어. 네가 행복하기 바라.”
“네가 없으면 행복해.”
동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결국 동우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서운은 동우의 발치에 침을 뱉고 집으로 들어갔다. 동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하려는 게 왜 안 된다는 거야?”
동우는 눈을 꼭 감았다. 그의 발치에 물방울 자국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동우의 발에만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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