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네가 회사를 맡고 싶다고?”
“네. 제가 할래요.”
유 회장은 나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엉뚱한 사람이 맡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궁금했다.
“무슨 일이냐?”
“뭐가요?”
“네가 함부로 할 녀석이 아니잖아.”
유 회장의 물음에 나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유 회장은 끙 하는 소리를 낸 후 영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싫다.”
“아버지.”
나은은 입을 쭉 내밀었다. 유 회장은 그런 나은을 물끄러미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은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너 하나만 보고 산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 거 같아서 나는 불안하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노인네가 실언을 한 거니 무시해라.”
“그 여자가 맡을 거예요.”
“이미 떠난 사람이야.”
유 회장의 단호한 말에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유 회장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나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갈게요.”
“앉아라.”
“아니요.”
나은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유 회장을 두고 방을 나가버렸다. 유 회장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흔들고는 나은의 엄마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못나서 당신 딸 하나 제대로 건사를 못하는 군. 당신이 빨리 간 것이 내가 이리 원통할 수가 없네.”
유 회장은 곧바로 끅끅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에서 유 회장은 한참이나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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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퇴근하지.”
“아닙니다.”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나는 회의에 갈 거고. 당신이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습니다.”
백현은 서운만을 남겨둔 채로 사장실을 나섰다.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고 가만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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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각이 없다?”
“없어.”
태화의 단호한 말에 나은은 입을 쭉 내밀었다. 태화가 꽤나 궁금해 할 소식이었는데 그가 반응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그래도 오빠가 내 제안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사람이 하는 거 보다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아?”
“뭐가 나은 거지?”
태화는 미간을 모았다. 나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그 사람이 그 회사를 가져가게 되면 자신의 애인에게 줄 거야. 적어도 유 씨가 가지고 이는 편이 오빠에게는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빠의 패배감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거고.”
“너에게 가는 것이 더 역겨워. 너는 지금 굉장히 내 생각을 하는 거 같은데 그냥 네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네가 그냥 나를 괴롭히고 싶으니까. 그런 거면서 나를 배려하는 척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건 아니지만 오빠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오빠가 어떻게 느끼건, 그건 오빠의 자유지.”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식품 회사를 다시 그가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은의 낚시질에 당하고 나면 다시는 그가 자유 의지로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네가 사장 자리에 오르면 과연 나는 뭘 얻을 수가 있는 거지? 내겐 득이 없을 텐데.”
“퇴직금. 꽤나 두둑한.”
나은의 나른한 목소리에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은의 제안은 그다지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나은은 손가락을 튕기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해야 할 건?”
“두 가지.”
“두 가지?”
태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두 가지나 해야 한다는 건가?”
“하나. 먼저 이사들을 설득해서 내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도와줘. 아버지도 이제 내 편이 아니니까.”
“그런데 나보고 도우라고?”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으시겠지?”
나은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유쾌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한서운을 유혹해.”
“한서운?”
태화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망할 자식 옆에 있는 기분 나쁜 여자를 말하는 거군.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그래야 내가 더 그 회사를 제대로 가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요? 나는 오빠가 가질 수 없는 돈을 줄 생각인데.”
태화는 가만히 나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더니 아랫입술을 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은을 보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지분을 내놔.”
“지분?”
나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태화를 내려다 봤다.
“뭐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네. 내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미워하는 나를 찾아온 거고. 그래놓고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당연하지.”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은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토해내고 입을 쭉 내밀었다.
“나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오빠가 그 일을 만들어줘. 그러면 아버지에게 전해줄게.”
나은의 말에 태화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분명히 말려들면 안 되는데 자꾸만 그녀에게 말려드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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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오니?”
서운은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은에 고개를 숙였다. 나은은 싸늘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럴 필요 없잖아. 어차피 지금 여기에 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 나 완전 경멸하잖아. 아니야?”
“맞아.”
서운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심호흡을 하고 이리저리 목을 풀고 서운에게 다가왔다.
“물러나.”
“뭘?”
“그 자리.”
“무슨 자리?”
서운은 한 마디도 밀리지 않은 채 나은과 마주했다. 나은은 밝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손을 들었고 서운은 그대로 나은의 손을 잡았다. 나은은 힘을 써서 빼려고 했지만 서운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건방지게 누구를 잡아?”
“너야 말로 건방지게 뭐 하는 거야?”
“뭐라고?”
“백현.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너 따위는 감히 나에게 까불지 못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그 사람의 아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함부로 하는 너를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니?”
서운의 말에 나은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은 그대로 나은의 뺨을 때렸다. 나은은 놀란 표정을 짓고 서운을 바라봤지만 서운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이거 놔.”
“나를 죽이고 싶니?”
“죽일 거야.”
“그럼 죽여.”
서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가 나를 죽이면 너는 다시는 백현의 사랑을 받지 못할 거야. 백현은 너보다 나를 사랑하니까.”
“한 집에서 자란 사이가. 남매처럼 자란 사이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사랑하지 않잖아.”
서운은 미소를 지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은을 뒤로 밀쳤다. 나은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 벽을 짚고 섰다.
“지금 네가 나에게 이러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식품 회사륾 맡으며 너는 끝이야.”
“맡아.”
서운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나도 그 귀찮은 걸로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도대체 왜 유 가 일로 우리가 이렇게 복잡해야 하는 거야. 네 엄마가 첩이건 말건 그건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 다만 백현. 그 사람 힘들게 하지 마. 너도 백현을 좋아하고 있다면 알 거 아니야? 그 사람 점점 더 지치고 있다는 거 말이야.”
나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서운을 이길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좋아. 하지만 너에게 좋은 일은 아닐 거야. 내가 더 백현 그 사람 곁에 있을 거라는 의미인 거니까 말이야.”
“당신이 아무리 내 곁에 있어도 그건 아무 의미도 되지 않아. 결국 그 사람의 곁에 더 오래 있는 사람은 나니까. 당신이 아니야. 그러니까 헛소리 하지 마. 당신이 그러면 죽여버릴 지도 모르니까.”
나은은 순간 바닥에 놓인 벽돌을 쳐다봤다. 그리고 서운이 그것을 보기도 전에 그것을 손에 들고 그대로 내리 찍었다. 둔탁한 소리. 그리고 눈을 뜨니 그것을 막아선 것은 동우의 팔이었다. 동우는 그대로 나은의 목을 졸랐다.
“이, 이거 놔.”
“죽일 거야.”
“놓으라고.”
나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서운은 심호흡을 하고 동우의 등에 손을 얹었다. 동우는 나은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동우는 다시 나은을 노려봤다.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달아났다. 서운은 동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뺨을 때렸다. 동우는 그녀의 손을 그대로 받아내고 그녀에게 무너지듯 기댔다. 서운은 비틀거리면서도 그런 동우의 체중을 받아냈다.
“뭐 하자는 거야?”
“당신이 다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멍청해.”
“그래.”
동우의 목소리는 낮고 편안했다.
“당신의 곁에만 있을 수 있으면 되는 거야. 나는 당신의 사랑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아. 그러니까 한 가지. 내가 부탁하는 것만 들어줘. 당신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 당신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
“네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어. 저 여자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네가 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저 여자가 다시는 나에게 덤비지 못할 이유를 만들 거였는데 네가 망친 거야.”
“그래.”
동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불안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동우를 밀어냈다. 동우는 서운을 노려보더니 슬픈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달아나지 마.”
“더러워.”
동우는 팔을 벌려 서운을 품에 꼭 안았다. 서운은 그를 밀어냈지만 단단한 동우는 밀려나지 않았다.
“당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나는 오직 당신만 있으니까.”
“나는 네가 필요없어.”
“당신은 내가 필요해.”
나은은 있는 힘을 다해서 동우를 밀어냈다. 결국 동우는 뒤로 물러났다. 나은은 다급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날과 다르게 고리까지 다 걸고 문에 기대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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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구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동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서운. 당신은 나에게 기대. 그 사람이 아니야. 당신을 보지 않을 그 사람 말고 나에게 오면 되는 거야.”
동우는 가만히 문을 만졌다. 그리고 가만히 그 문의 차가운 느낌을 느끼며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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