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창고/지독한 연애[완]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장]

권정선재 2016. 10. 5. 23:25

2

오빠가 갔다면서요?”

그래.”

 

나은은 백현에게 종이 가방을 밀었다. 그것을 힐낏 본 백현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지?”

오빠한테 주세요.”

 

나은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백현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다시 밀어냈다.

 

? 당신이 직접 주지. 도대체 나를 중간에 끼고 무슨 쇼를 하겠다는 거야? 나 그런 거에 취미 없어.”

아니요. 당신이 해야만 해요.”

 

나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은의 단호한 태도에 백현은 더욱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백현이 그런 표정을 짓건 말건 나은은 그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 종이 가방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가 직접 오빠한테 드리면 뭔가 다른 생각을 하실 거예요. 저에게 돈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그 회사 그 자리 마음에 들지 않나요? 그 정도면 된 거 같은데요?”

어차피 당신 회사 아닌가?”

그런가요?”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못 마땅한 듯 테이블을 기다란 검지로 두드렸다. 나은은 교태스러운 웃음을 흘린 채로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백현의 눈치를 살폈다. 백현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정말 남자 좋아해요?”

 

나은은 유쾌하게 웃으며 물었고 백현의 눈썹은 가늘어졌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너무 자기 몸을 지키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에요. 자꾸 그러니까 여자로 뭔가 자존심이 상할 거 같아.”

자존심 같은 소리.”

 

나은은 다시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축이며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목을 풀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거슬렸다. 나은은 분명히 지금 백현을 자극하려고 이 모든 행동들을 하는 거였다. 그가 이런 행동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은은 백현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여자였다. 나은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마치 잊고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나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서운이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그 녀석이 뭐?”

사귀나요?”

 

나은의 질문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돌려서 무언가를 묻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늘 정공법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지만 백현이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당신이 낄 일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여자가 당신 좋아하는 거 알죠?”

 

나은의 도발적인 질문에 나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은은 이내 표정을 지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뭐든 다 안다는 그 표정.

 

그 표정은 뭐지?”

당신도 알잖아요.”

 

나은은 미소를 지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몸을 뒤로 젖히고 라운지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너무 궁금했다. 아마 그들도 겉으로는 다정해보이지만 이렇게 차가운 분위기의 테이블도 존재할 거였다.

 

뭐 당신하고 엮이면 그 여자가 불행해질 거 같아서 그러는 거라면 그러지 마요. 그게 그 여자를 더욱 아프게 할 테니까.”

당신이 신경을 쓸 일이 아니야.”

그렇겠죠.”

 

나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독한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술이 괴로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현실적인 것.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은 좋았다. 나은은 그런 백현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만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턱을 타고 천천히 내려갈 때 백현이 그녀의 손을 붙들고 싸늘하게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당신 불행할 거야.”

알아.”

 

백현은 나은의 손을 놓았다. 나은은 자세를 고쳐잡고 이리저리 목을 풀더니 이내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많이 불행할 거야. 당신이 생각을 한 것보다. 당신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이 불행하기를 바라니까.”

 

그제야 백현은 고개를 들어 나은을 바라봤다. 나은은 박수를 치며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현의 기분이 상한 것과 다르게 나은은 너무나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은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백현을 바라보고 혀로 입술을 축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나 가짜로 한 결혼이지만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잘생긴 남자랑 사는 거 흔한 기회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잘 지켜요.”

 

나은은 가볍게 백현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불쾌했지만 나은에게는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지키지 않으면 그건 사라질 거야. 당신이 너무나도 지키고 싶은 그거.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거거든요.”

뭘 말하는 거지?”

뭐든?”

 

나은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현은 그런 나은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나은은 잠시 뒤를 돌아 백현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완전히 나가고 나서야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가볍게 넥타이를 풀었다. 숨이 막혔다.

 

역시나 저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괴롭군.”

그렇게나 힘드십니까?”

.”

 

준수는 백현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호박빛으로 반짝이는 술을 바라보는 백현의 눈이 슬퍼졌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를 위로하기도 전에 백현은 잔을 비웠다. 사람들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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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는 거야?”

너 여기서 뭐해?”

 

서운은 동우를 보기가 무섭게 미간을 찌푸렸다. 동우는 그런 서운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집 문을 열었다.

 

너 기다리고 있었어.”

돌아가.”

 

서운은 물끄러미 동우를 응시했다. 하지만 동우는 미소를 지은 채로 벽에 기대 서있을 뿐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갈 거라는 거 알고 있잖아.”

꺼지라고.”

갈 거야.”

미친 새끼.”

 

서운은 그대로 집에 들어갔다. 동우는 문을 닫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 가볍게 고리를 한 번 당겼다. 그리고 문이 제대로 닫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늘 그런 것처럼 너무나도 익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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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

 

집에 들어선 서운은 낮게 욕설을 한 번 더 내뱉었다. 늘 그녀의 경계에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 동우의 존재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늘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옆집 남자. 그녀의 숨을 막히게 하는 존재였다.

 

개자식.”

 

하지만 이 집을 떠날 수는 없었다. 이 집은 백현이 구해준 곳이었고 백현의 집과 너무나도 가까운 곳이었다. 서운은 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창가에 섰다. 그리고 건너편에 보이는 백현의 집을 바라봤다. 아직 불이 꺼져 있었다. 백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커튼을 치고 욕실로 향해서 물을 틀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머그 가득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욕조 테두리에 앉아 물을 만지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함 뒤에 감춰진 씁쓸함이 혀 끝에 아렸다.

 

백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르르한 사람이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자 서운은 속옷을 벗고 욕조에 앉았다. 약간 뜨거운 물. 피부가 곧바로 굵어졌지만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서운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와인을 손에 든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살짝 눈을 감았다. 배를 탄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느낌. 서운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유일한 사치를 즐기며 여유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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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가 찾아갔다고?

잘 처리했습니다.”

 

유 회장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쓰러운 눈으로 백현을 바라본 채로 혀를 찼다. 그가 원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토록 장난감처럼 부려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이미 모든 사람들이 백현을 자신들의 입맛에 맛게 이용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계속해서 내 사위였으면 좋으련만. 그리도 나은이랑은 마음이 맞을 수가 없는 겐가?”

 

백현이 멋쩍은 미소를 짓자 유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내 사위가 되는 것이 뭐가 싫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가고 싶어서 그리 안달을 하고 있는데. 자네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그리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가?”

.”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백현에 유 회장은 미간을 모았다. 유 회장의 앞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대답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은과 참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나은의 과거와 참 닮았다. 그래서 백현과 나은을 엮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백현과 같이 있는다면 이저의 나은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 다르게 이미 두 사람은 헤어진 후였다.

 

내가 그 녀석과 이야기를 해보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없다?”

 

유 회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백현은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유 회장이 알고 있는 것보다 백현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는 사람일 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 유 회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집에 있을 텐가?”

오늘은 집에 돌아갈 겁니다.”

그래. 그럼 가보지.”

 

유 회장은 이제 대화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백현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유 회장은 그런 백현의 뒤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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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은 집에 들어서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베란다에 섰다. 서운의 집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늘 그렇듯 익숙하게 어두컴컴한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그리고 물을 털고 그대로 욕조에 들어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태화.”

 

역겨운 이름. 그를 괴롭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가 어쩌면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유일한 기회를 날려버린 사람이었다. 순간 집에 전화가 울렸다.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서운일지도 몰랐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집에 있는 걸 안다면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그저 이 정도 관계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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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의 안건은.”

됐어.”

 

백현은 서운의 말을 듣지 않고 손을 들었다. 어차피 서운이 하는 이야기는 대충 정해진 이야기였고 그가 들을 것은 없었다. 회의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서운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거 내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그 영감들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게 생각을 하고 반대하겠지.”

그럴 겁니다.”

 

서운이 곧바로 대답하자 백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회사에는 그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모두 그의 목을 조르려는 사람들이었다. 유 회장도 그를 그저 지켜보고 있을 따름,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도와줄 수 없었다.

 

유태화는?”

오실 겁니다.”

젠장.”

 

서운은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백현의 욕설을 들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서운의 태도에 백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듣더라도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문제라도 되는 건가?”

 

서운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넥타이를 풀었다. 목이 갑갑했다. 숨이 턱하니 막힐 거 같았다. 회의에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회장님은 오시나?”

회장님께서 오시지 않습니다.”

그래.”

 

결국 유 회장도 그가 유태화랑 제대로 붙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회사에는 생각보다 유태화의 편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의 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 보여줘야 할 차례였다.

 

그럼 가지.”

넥타이를.”

 

서운은 백현의 넥타이를 다시 매만졌다. 백현의 뜨거운 냄새가 훅 끼치자 서운은 고개를 숙였다. 백현은 그런 서운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짓다 이내 표정을 지웠다. 서운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