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한 발자국 뒤에서 보이는 것들
“선재 말이 사실이니?”
“그게.”
우리는 건너편의 선재의 가게를 바라봤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정이 미간을 모았다.
“그런다고 헤어져?”
“네?”
우리는 지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순정은 너무나도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중이었다.
“원래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남자가 원래 그런 동물인데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뭐라고요?”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저 지금 어머니께서 저에게 사과를 하실 줄 알았어요.”
“사과?”
순정의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졌다.
“내가 도대체 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니?”
“그러게요.”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왜 그런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사과를 하실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적어도 재필이가 저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선재 오빠의 입에서 들으셨으니까. 미안하다고 하실 줄은 알았어요.”
“남자는 원래 그래.”
“남자는 원래 그렇다고요?”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저보고 그냥 나가라고 했어요. 그 이유도 말하지 않고. 뒤늦게 안 이유가 여자가 생겨서였다고요.”
“그래서 그게 너에게 무슨 문제라도 된 거니?”
“뭐라고요?”
“네가 여태 재필이를 그렇게 만든 거잖아. 아니야? 네가 재필이가 하는 일을 전부 다 옳다고 해주고. 네가 그렇게 애 말을 다 옳다고 했으면 계속 옆에 있어야지. 귀찮다고 그냥 버리는 게 어디에 있니?”
“제가 버렸다고요?”
우리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손바닥이 아플 정도였지만 우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다.
“저 먼저 갈게요.”
“어디를 가?”
“할 이야기가 남으셨어요?”
“재필이랑 다시 만나.”
“뭐라고요?”
우리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보다 조금 더 날카롭게 나왔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지금 농담을 하시는 거죠?”
“농담이라니?”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는 거죠. 재필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서 헤어진 거라는 이야기 방금 들으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식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신 거죠? 너무하시네요.”
“어차피 너도 그 나이에 다른 남자 만나기 어려운 거 아니니?”
“네?”
“여자 나이 스물아홉이면 이제 다 된 거야.”
우리는 침을 삼켰다. 순정의 말은 듣고 있기 괴로웠다. 도대체 왜 힘들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가려고요.”
“어디를 가? 너 그러다가 다시 재필이랑 잘 되면 어떻게 하려고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그럴 일 없습니다.”
“너 그 나이에.”
“아뇨.”
순정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온 음료를 모두 마셔버렸다.
“재필이를 만나는 동안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아서요.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누구를 못 만날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도 바람을 피웠니?”
“아뇨.”
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만 귀하다고 하셔도 이러시면 안 되는 거죠. 어머니. 아니지. 아주머니. 상황 똑바로 보세요.”
“아, 아주머니?”
순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동안 저에게 잘 해주신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에게 함부로 말씀을 하셔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랑 재필이는 이미 헤어지기로 합의를 봤고. 저는 앞으로도 선재 오빠 가게에 올 거예요. 제가 재필이보다 더 좋아하는 가게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더 이상 이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거든요.”
“모욕이라니?”
순정은 자신의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너 정말 후회 안 하겠니?”
“네.”
우리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후회는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재필을 만난 건지 자신이 너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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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 하는 녀석이야?”
“내가 뭐?”
선재의 핀잔에 재필은 미간을 모았다.
“여기에 도대체 이모를 모시고 온 이유가 뭐야?”
“엄마가 형 가게 가보고 싶다고 해서 온 거야. 다른 생각은 없어. 형이야 말로 왜 자꾸 우리를 들여?”
“뭐라고?”
“형 뭐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
“미친.”
선재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 벽에 기대 재필을 노려봤다.
“네가 우리를 본 시간도 12년이지만 내가 우리를 본 시간도 12년이야. 이 시간 동안 알던 사람하고 하루만에 갑자기 보지 않는 게 우습지 않아? 그리고 우리랑 내가 친하게 지내는 게 뭐가 어때서? 너야 말로 너무 우습게 행동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 그런 시선 역겨우니까.”
“형 행동이 이상하니 그러지.”
“나가.”
재필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선재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재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형 정말.”
“내가 도대체 왜 너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내 가게에서 나가.”
“형 나 안 볼 거야?”
“반드시 볼 이유는 없지 않나?”
“뭐라고?”
재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누구 하나 그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자꾸 이렇게 와서 내 가게 망가뜨리는 거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당장 나가. 나중에 얘기하자.”
“좋아.”
선재는 재킷을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그렇게 나오면 내가 무서울 거라고 생각해? 이모한테도 여쭤보라고. 뭐라고 하시는지. 아마 형이 이상하다고 할 걸? 아무튼 몰라. 형은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야.”
재필이 나가고 선재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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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벌써 나와?”
우리는 카페에서 나오다 재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걸음을 옮겼다. 재필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이거 놔.”
“어디 가냐고?”
“이거 놓으라고!”
우리가 고함을 지르자 재필은 놀라서 그녀의 손을 놓았다. 우리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너는 사람이 놓으라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거야? 왜 놓으라고 하는데 그걸 꼭 잡고 있어?”
“그러니까.”
“여자가 손을 놓으라고 말을 할 때는 그 손 꼭 잡고 있는 게 남자다운 거 아니야. 그거 범죄야.”
“범죄는.”
재필은 말끝을 흐리면서 손을 뒤로 감췄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도대체 뭐니?”
“내가 뭐?”
“도대체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을 드린 거야?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 왜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건데?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왜 너랑 다시 만나야 하는 건데?”
“엄마가 그래?”
재필이 어깨 너머로 카페를 바라보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엷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너처럼 모자란 새끼랑 그 동안 연애를 한 내가 미친년이지. 네가 사람 될 거라고 생각을 한 내가 병신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비켜 나 피곤해. 집에 갈 거야.”
“이야기 좀 하라고.”
“거기 좀 보내주죠?”
“팀장님.”
정식은 재필의 앞을 막아섰다. 재필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두 사람 뭐야?”
“지난번에 이미 알려드린 거 같은데요. 제가 서우리 씨를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까?”
“좋아하고 있다고요?”
재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정식은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온기는 힘이 있었다.
“헤어지고 나니 서우리 씨처럼 좋은 여자가 없어서 자꾸만 이렇게 미련을 갖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여자에게 이러는 거 실례 아닌가?”
“남의 여자?”
“아. 그렇다고 해서 당신처럼 서우리 씨를 소유물로 생각한다는 거 아닙니다. 필요하면 갖고. 남이 가진 것이 너무 질투가 나서 가지려고 하는. 그런 유치한 사람과 다른 마음이라는 거죠.”
재필이 주먹을 뻗었지만 정식은 여유롭게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정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렇게 저급한 것을 하는 겁니까?”
“뭐라고?”
“당신이 이러면 서우리 씨가 실망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까?”
정식의 말에 그제야 재필은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의 얼굴에 보여지는 표정. 재필은 손을 내렸다.
“서우리. 너 저런 늙다리가 뭐가 좋아?”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해줘.”
“뭐라고?”
“그리고 너처럼 한 눈을 팔지 않아.”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것 자체가 너무 우스운 일이었다.
“임재필. 제발 정신 차려. 더 이상 나랑 너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이러지 마. 너 정말 별로야.”
우리는 이 말을 남기고 먼저 돌아섰다. 정식도 짧게 고개를 숙인 후 우리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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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숙였다. 창피했다. 정식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바보였나봐요.”
“도대체 왜 서우리 씨가 가면 안 되는 곳이 있는 겁니까? 서우리 씨는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냥 연애를 그만 한 것이 전부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피해야 한다는 게 더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고개를 들어 정식을 바라봤다. 정식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우리 씨.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우리 씨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우리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팀장님.”
우리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니 모든 것은 그녀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 가운데 들어있다고 해서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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