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멋있어요.”
“그런가?”
나은의 빈정거림에도 백현은 여유로울 따름이었다. 나은은 묶은 머리를 푼 후 백현의 앞에 앉았다.
“당신 뭐 하자는 거야?”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나에게 이럴 게 아니라 회장님께 말씀을 드리지.”
“정말.”
나은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혀를 살짝 문 후 가만히 백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 참 달라진 거 알아요?”
“뭐라고?”
“당신은 이제 그 여자랑 어울리지 않아.”
나은의 차분한 대답에 백현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봤다. 날이 좋았다. 이런 날에 나은과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회장님을 어떻게 움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버지 일로 인해서 당신을 놓을 생각은 없어요. 내가 한 번 손에 넣은 것을 절대로 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나보다 당신으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한서운이랑 사귀려고.”
백현의 말에 나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서 가만히 나은을 바라봤다.
“내가 그 여자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니 당신이 뭔가 말도 안 되는 미련을 갖고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당신이 그 여자를 만나게 그냥 둘 거 같아요? 당신이 그 여자를 만나는 게 나에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그렇게 급이 떨어지는 여자. 내가 그냥 둘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당신과 급이 다르기는 하지.”
백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앉은 후 가만히 나은을 응시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신.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당신에게 말을 하고 싶은 건 절대로 당신에게 가지 않을 거라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한서운과 연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어. 내가 그 여자를 얼마나 아프게 하건, 그 여자가 나로 인해서 힘들건. 그런 것은 아무런 이유도 되지 않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가지 않아. 설사 내가 한서운의 곁에 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는 거야. 이게 내 진심이야. 그러니 제발 당신이 더 이상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련하게.”
백현의 말에 나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때와 다르게 진지한 백현의 말에 나은은 불안해졌다. 한 번도 백현은 이렇게 차갑게 그녀를 밀어낸 적이 없었다. 밀어내더라도 이런 정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은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감성적이네.”
나은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백현의 얼굴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나은은 그제야 얼굴이 굳었다.
“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네가 불쌍해.”
“뭐라고?”
나은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백현의 말이 너무나도 단호했다.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
“돌아가.”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해도 좋아.”
나은은 그 자리에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지만 백현은 더 이상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빌미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했다. 결국 나은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백현은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은의 말에도 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은이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문은 닫혀버렸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나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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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나 하지.”
“네?”
백현의 말에 서운이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퇴근 후에 일이 남으셨습니까?”
“너랑 밥 먹고 싶다고.”
백현의 편한 말에 서운은 앞의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기사는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뭐 하자는 거야?”
“뭐가?”
“농담이라도 하자는 거야?”
“아니.”
백현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어색한 표정으로 서운을 돌아봤다.
“내가 그 동안 너무 엉청해서. 이제라도 그 모든 멍청한 일들을 다시 돌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 그러니까 당신에게 뭔가 기회를 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내게 기회를 달라고.”
“기회?”
서운의 목소리가 뭔가 묘하게 갈라졌다. 서운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될 일이었다.
“우리는 가족이야.”
“가족?”
서운의 대답에 백현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너랑 나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사람인가? 우리 두 사람 그냥 남이야. 한 집에서 자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관련도 없어.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자신의 호적에 나를 올려주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기도 했어. 나는 너희 집에서 너와 같이 자라고 있지만 결국 부모가 없는 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을 하니 그게 어쩌면 어머니의 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도 너를 지켜줄 남자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 그러니까 우리는 남이야.”
“아니.”
서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백현은 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지켜야 했고 키워준 강아지. 그런 존재와 연애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왜 내가 네 마음을 계속 거절했던 건데? 그건 너랑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거였어. 이제 와서 그것을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진심인가?”
“진심이야.”
서운의 덤덤한 대답에 백현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서운은 다시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백현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서운을 바라봤다. 서운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가?”
“이제 우리 두 사람을 막아서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 당신이 도대체 왜 그렇게 나를 밀어내기만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한서운.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건가? 내가 당신을 지키지 못할 거라고. 너를 아프게 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
서운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서운의 반응에 백현은 뭔가 툭 끊기는 느낌이었다.
“너는 한 번도 나를 우선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하고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너. 유나은이라는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거 아니었잖아. 유나은이 하지만 버려진 것을 내가 다 봤어.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하라고?”
“너는 달라.”
“아니.”
백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서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의 장난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고르게 된다면 네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그래.”
“거짓말.”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이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사내인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서운은 서류를 소리가 나게 덮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백현. 내가 너를 사랑해. 그리고 사랑했고 사랑할 거야.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일단 해.”
“싫어.”
“한서운.”
“기사님 저 좀 내려주세요.”
백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기사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백현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서운은 차에서 내려버렸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을 뭔가 콱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강 기사 내가 뭐 실수하는 건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은의 사람이었던 사람. 지금은 백현의 사람이지만 백현의 사람이 아닌 사람. 강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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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자.”
서운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동우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운은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
“한서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선택할래. 내가 가질 수 없는 거. 내가 가지면 망가지는 거 고르지 않을 거야.”
“그게 나야?”
“응.”
서운의 대답에 상처를 입을 법 했지만 동우는 그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서운을 부축했다.
“왜 이렇게 땀이야?”
“걸어왔어.”
“어디서부터?”
“모르지.”
동우의 다급한 목소리와 다르게 서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동우는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불덩이였다. 동우는 재빨리 서운의 집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단 한 번도 그가 들어온 적이 없는 공간. 서운은 그런 동우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나를 사랑하니?”
“사랑해.”
동우는 조심스럽게 서운을 그녀의 침대에 내려놓았다.
“지독할 정도로.”
“지독하게 사랑한다.”
나은은 가만히 동우의 말을 따라했다. 그리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백현의 집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나 한심하지?”
“아니.”
동우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집은 완벽하게 어둠이었다. 동우는 그 어둠에서도 익숙하게 서운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옷을 벗겼다. 서운은 그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동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서운은 미소를 지었다. 동우가 자신의 속옷 앞에서 머뭇거리는 게 우스웠다.
“보고 싶었던 거 아니니?”
“어차피 보이지 않아.”
“그러게.”
서운은 조심스럽게 동우의 손을 이끌었다. 동우는 천천히 서운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뜨거워.”
“너를 안고 싶어.”
서운은 동우의 목을 끌어당겼다. 살짝 달콤한 맛이 나는 키스. 동우는 조심스럽게 서운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셔츠도 벗었다. 서운은 동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른 몸. 그리고 차가웠다.
“시원해.”
“당신 지금 열이 너무 많이 나.”
동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서운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동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마저 나를 버리면 나는 죽을 거야.”
“당신을 버리지 않아.”
동우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서운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서운의 속옷 후크를 풀었다. 탄력 있는 서운의 가슴이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동우는 서운의 목을 핥았다. 서운의 입에서 낮게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응. 간지러워.”
동우는 서운의 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쇄골을 머금었다. 뜨거운 온기. 그리고 향기. 약간의 땀내. 동우는 혀로 그녀의 쇄골을 맛본 후 조금 더 내려왔다. 그리고 한 입에 그녀의 가슴을 머금었다. 혀로 단단히 선 서운의 젖꼭지를 유린했다. 서운은 시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동우는 손을 뻗어 그런 서운의 손을 잡아주었다. 깍지를 낀 채로 동우는 다시 서운의 눈을 응시했다.
“나를 안아.”
동우는 천천히 서운의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서운에게 남겨진 마지막 하나까지 벗겨냈다.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은 서운을 본 동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든 서운을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수건을 가져온 동우는 밤새 서운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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