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나은은 검지로 가만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상황에서 그녀를 위해서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너를 오라고 하는 건데도 오지 않는다? 너는 내 돈이 무섭지 않은 거니?”
‘유 사장님께서 가지고 계신 돈은 두렵지만 유 사장님 자체는 두렵지 않습니다. 유 사장님은 악한 분이 아니시니까요. 지금도 너무 외로워서 저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거신 거 아닙니까?’
나은은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봤다. 영재의 말이 옳았다. 지금 자신은 너무 외로워서 전화를 건 것일지도 몰랐다.
“그걸 다 아는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오지 않는 건가? 나는 지금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말이야.”
‘지금은 업무 중입니다.’
“강영재.”
‘죄송합니다.’
영재의 대답. 나은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숨을 짧게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적어도 자신이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다 백현 곁의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였다.
“알겠어. 내일 출근하면 나에게 좀 오지.”
‘오늘 늦은 시간이라도 갈 수 있으면 가겠습니다.’
“그래.”
나은은 그리고 영재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묘한 설렘. 그러나 이건 유쾌하지 않았다.
“백현. 그리고 강영재.”
나은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남자들만 좋아한다는 게 너무 우스운 일이었다.
“유나은. 너 왜 그러니?”
나은은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서늘한 기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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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나오시는 겁니까?”
“벌써 나오면 안 되는 건가?”
“아닙니다.”
백현의 까칠한 대답에 영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차에 탔다.
“어디로 갈까요?”
“술집. 지난 번 간 곳.”
“알겠습니다.”
영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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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아?”
“아니.”
집으로 돌아온 서운은 동우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동우는 그런 서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응시했다.
“힘들어 보여.”
“너 때문이야.”
“아니.”
동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동우는 물끄러미 서운을 바라보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 때문이 아니야.”
“채동우.”
“나에게 당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제발 나를 밀어내지 마.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당신이 나를 구원할 거라고 했잖아.”
“구원.”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자신은 그 말에 붙잡힌 사람이었다. 그럴 것이 없는 데도 그랬다.
“싫어.”
“한서운.”
“도대체 네가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러는 건데? 너 나한테 이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
“있어.”
“무슨 자격?”
“네가 구했으니까.”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우에게서 백현이 보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백현이 거기에서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어. 당신이 나를 살렸으니까. 당신은 앞으로 나를 책임져야 하는 거야.”
“그게 이런 방식은 아니야. 그러니 돌아가.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럼 죽을 거야.”
동우의 차가운 대답. 서운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물끄러미 동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고는 그의 뺨을 만졌다. 살짝 거칠한 얼굴. 서운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그를 밀어냈다.
“나를 힘들게 하지 마.”
“나를 버리지 마.”
“나에게 이러지 마.”
“나를 버리지 마.”
서운은 고개를 푹 숙였다. 동우는 그녀의 얼굴 밑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운을 바라봤다.
“제발.”
“네가 이러면 나 너무 힘들어.”
“알아서 그러는 거야.”
동우는 손을 내밀어서 서운의 얼굴을 만졌다. 그 낯선 촉감에 서운이 움찔하자 동우는 자신이 더 놀랐다. 하지만 서운에게 내민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거둘 수는 없는 손이었다.
“내가 이러지 않으면 당신은 또 백현. 그 사람 때문에 힘들 거니까. 그거 내가 막을 거니까.”
“너는 못 막아.”
“막아.”
“아니.”
서운은 힘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 잡고 심호흡을 한 후 동우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동우도 순순히 물러났다.
“너는 절대로 나를 움직일 수 없어.”
“한서운.”
“나는 백현을 사랑해.”
“거짓말.”
“정말이야.”
동우는 그대로 백현의 입에 뜨겁게 입을 맞췄다. 뜨거웠다. 하지만 서운에게서 뜨거움 이상은 없었다.
“이제 확실하다.”
“뭐?”
“너와는 미래가 없어.”
서운의 말이 너무 단호해서 백현은 순간 머뭇거렸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이 순간 설레는 것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나 백현을 죽일 수도 있어.”
“차라리 죽여.”
서운의 말은 서늘했다.
“그러면 내가 적어도 백현을 보고 살지는 않겠지. 하지만 백현이 사라지면 나도 죽을 거야. 알지?”
동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그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운을 살리는 것은 오직 백현이었다.
“백현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나도 세상에서 사는 의미가 없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니야?”
“그래.”
동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 그는 서운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는 서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 그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
“그런데 아프네.”
“아프라고 한 말이야.”
서운에게 자비라고는 없었다.
“그러니까 감히 네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너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니까.”
“사랑해.”
동우는 다시 서운의 무릎을 안았다. 그리고 서럽게 울었다. 서운은 그의 등을 소리가 나게 때렸다.
“꺼져.”
“사랑해.”
“꺼지라고.”
서운은 동우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동우는 잠시 후 몸을 뒤로 물러나서 물끄러미 서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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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그래.”
걱정하는 영재의 표정에 백현은 손을 흔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하지만.”
“내일 보지.”
“네.”
영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영재는 그대로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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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백현은 집에 들어가려다 그대로 멈췄다.
“도대체 뭐야.”
결국 자신에게만 아무 것도 없는 거였다.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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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온 거니?”
“네.”
나은은 영재를 보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영재의 얼굴을 만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러면 내가 뭐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이미 저를 좋아하시잖아요.”
영재의 단호한 대답에 나은은 침을 삼켰다. 영재는 그런 나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미친 새끼.”
“들어가도 됩니까?”
“아니.”
“들어가겠습니다.”
영재는 나은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후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나은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그를 보고 작게 웃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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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운이 아니라 네가 왜.”
서운의 집을 두드려서 나온 동우를 보며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지만 동우는 덤덤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닌가?”
“왜?”
“그거야.”
백현은 주먹을 쥐었다. 도대체 왜 동우가 여기에서 나오면 안 되는 것인지 합리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지금 한서운하고 지독한 연애를 하고 있는 거라고. 당신만 없으면 그냥 연애가 되겠지.”
“너는 한서운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그냥 너 하나 행복하자고 지금 한서운을 괴롭게 하는 거. 그 사람 곁에서 나를 치우는 거 우스운 거 아닌가?”
“돌아가.”
서운은 동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에게 너는 필요하지 않아.”
“한서운.”
백현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고 가만히 동우의 목에 매달렸다.
“내가 힘들다고 할 때 언제든 와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당신이 아니라 채동우야. 당신도 알잖아.”
“네가 나를 부른 적 있어?”
백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벽을 짚고 허탈한 표정을 지은 후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구해달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잖아. 나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도대체 내가 뭘 할 수가 있다는 거야? 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뭘 하라는 거냐고.”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채동우는 내게 있어.”
“그건.”
백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옳았다. 늘 동우는 서운의 곁에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돌아가.”
“한서운.
“돌아가.”
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물러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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