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마음을 나누다.
“그래서 그냥 거기에 두고 왔다고요?”
“네.”
지웅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살짝 미간을 모았다.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아니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그냥 거기에 사람들을 두고 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우리 언니 똑똑해서 괜찮아요.”
세연의 대답에 지웅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혀로 아랫입술을 적시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일어난 거니까요.”
“뭐가 그렇게 싫어요?”
“네?”
세연의 물음에 지웅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연은 볼을 부풀린 채로 물끄러미 지웅을 응시했다.
“지금 보면 언니가 그렇게 한 게 되게 싫다는 거 같아서요. 사무장님. 은근히 이상하신 거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라가 나서자 지웅은 그녀를 막아섰다.
“아닙니다. 대신 내일 아침은 같이 가죠.”
“당연히 그래야죠.”
윤한은 뭔가 한 마디 더 하려는 세연의 팔을 이끌고 멀어졌다. 나라는 그 뒤에서 혼자 식식 거렸다.
“아니 아무리 우리가 승무원이었다고 하더라도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지금 비행기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거냐고요. 애들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지 마.”
지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나라는 한숨을 토해내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이게 다 사무장님이 너무 친절하셔서 그런 거라고요. 다들 사무장님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라니까요?”
“자기나 그러지 마요. 하나하나 다 안 나서줘도 내가 알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가서 쉬어요. 나는 괜찮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나라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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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잡아와요?”
“도대체 거기에서 사무장하고 싸우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도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침착하게 잇는 것은 전부 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한 거라고요. 거기가 없었으면 벌써 우리들은.”
윤한의 반응에 세연은 입을 내밀었다. 윤한의 말이 모두 옳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한 편 아니에요?”
“네?”
세연이 자신을 가리키자 윤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한 편이죠.”
“그럼 똑바로 해요.”
세연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때리고 텐트로 들어갔다. 윤한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고 그 옆 텐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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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배우가 된 거예요?”
“그냥 신기하잖아요.”
윤태는 무릎을 안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고 싶은 게 되게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그거 다 하고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죠. 그런데 배우라는 직업을 가만히 보니까. 내가 생각한 것을 다 할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드라마에서는 요리사도 될 수 있고, 검사, 판사, 경찰, 간호사, 목수, 뭐 역사 속 인물까지 다 할 수 있잖아요. 아. 이게 내 꿈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죠. 꽤 잘 풀리기도 했고요.”
윤태의 말처럼 그의 배우 인생은 꽤나 잘 풀린 편이었다. 다른 배우들이 다 겪는다고 하는 슬럼프도 없었고. 2년차 징크스라고 불리기도 하는 서포모어 징크스도 겪지 않았다. 꽤 탄탄한 배우였다.
“그런 배우를 내가 넘어뜨린 거야?”
“뭐. 돌아가면 다르겠죠.”
“그렇겠죠.”
지아는 혀를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론의 반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여배우랑은 정말?”
“네.”
지아의 질문이 끝이 나기도 전에 유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빠르게 대답을 할 이유가 있나?”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또 이상한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저 그런 거 정말 싫습니다. 불편해요.”
“뭐. 그러던지.”
지아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발로 바닥을 툭툭 찼다. 먼지가 잘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데 말 편하게 해요.”
“네?”
“그래도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윤태의 말에 지아는 밉지 않게 그를 노려봤다. 윤태는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내가 진짜 이윤태 씨 약점 하나 잡아서 제대로 먹여야겠어. 이런 식으로 나만 당할 수는 없어.”
“저처럼 깨끗한 배우가 어디에 있어요? 군대도 현역으로 갈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헛수고 하지 마세요.”
“아. 네.”
지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보다는 이게 좋았다.
“나는 여기 정말 좋다.”
“특이하시네요.”
“뭐가?”
“이런 곳 안 좋아하실 거 같은데.”
“편하잖아.”
지아는 입을 꼭 다물고 볼을 부풀렸다. 윤태는 무심결에 그런 지아의 얼굴을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뭘 하건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아. 기자라는 것도 사실 그냥 성적 맞춰서 한 거고. 남들 다 취업하니까 한 거니까.”
“그런 것 치고 기자는 누구나 하고 싶은 직업 아니에요? 뭔가 대단하고. 막 그런 직업 말이죠.”
“아니.”
지아는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살짝 랜턴을 발로 찼다. 날벌레들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달라붙었다.
“연예부는 그렇게 오래 붙는 사람도 없고. 누구나 하고 싶으면 크게 문제가 없으면 할 수 있으니까. 원가 매체도 많고. 나는 그냥 돈만 주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래도 신문사가 돈은 제대로 주거든. 밀리지도 않고. 뭐 윤태 씨 같은 사람하고 적이 될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거고.”
“저는 제가 가장 좋아하고 믿는 기자님이 강 기자님이었으니까. 그랬으니까 더 놀라고 당황한 거죠.”
“그래서 미안하다고 여기 내려온 거잖아.”
지아가 절벽 위를 가리키자 윤태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도 그를 따라 밝게 웃었다.
“그런데 어두운 건 왜 싫어?”
“네?”
순간 윤태의 표정이 사라지자 지아는 아차 싶었다. 사람들은 각자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미안.”
“아니요.”
윤태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쉽게 물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날카롭게 구는 것도 우스웠다.
“어머니께서 재혼을 하셨어요.”
“재혼이요?”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새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안 좋아보이시면 저를 옷장에 가두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꺼내주기 전까지 절대로 그곳에서 낭로 수 없는 운명이었죠. 그렇게 어둠이 너무나도 자주 찾아왔어요. 어둡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그리고 나중에야 새아버지는 그 사실을 아셨어요. 하지만 저를 구하시기에는 너무 늦은 거죠.”
“그러니까. 새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네.”
지아는 놀라서 입을 가렸다가 곧바로 손을 내리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윤태는 입을 내밀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가요.”
“이해가 가다뇨?”
“그냥 어머니도 새아버지께 버림을 받고 싶지 않았던 사람인 거니까요. 그 방법이 틀리긴 했지만. 뭔가 겁이 많이 났을 거예요. 다시 한 번 버림을 받는다면이라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하셨죠.”
지아는 물끄러미 윤태를 바라봤다. 윤태는 그런 지아의 시선이 불편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지아가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왔다.
“힘들었죠?”
“아니요. 지금 생각을 하니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죠. 그냥 어두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도?”
이런 말을 하면서 윤태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지아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그런 윤태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걱정 마요. 기사 안 쓸 테니까.”
“아니.”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걸 해서 위안이 된다면 괜찮은 거 아니겠어요?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해요. 말했잖아. 이윤태 씨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 왔다고. 이 정도는 해야 빚을 더 제대로 갚는 거죠.”
“그렇지만.”
“괜찮다고요.”
윤태는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지아의 곁에 붙었다. 지아는 랜턴을 자신들의 발치로 해놓고 조금 더 윤태와 가까이 앉았다.
“나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내가 쓴 기사로 인해서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걸 보고 놀랐어요. 아 내가 하는 일이 무조건 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
“아니요.”
윤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지아의 탓만 하기에는 그 역시 빌미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준이 형은 난리를 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썸을 탄 것까지는 사실이니까요.”
“썸?”
“썸인가? 아무튼. 뭐 서로 호감을 갖는 그런 사이.”
“어머.”
지아가 몸을 살짝 때고 자신을 보자 윤태는 볼을 부풀렸다.
“그렇다고 강 기자님이 원하시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또 기사 쓰시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도 뭐 일단 나가야 가능한 거니까. 그 전까지는 일다 유보.”
지아의 말에 살짝 긴장했던 윤태는 곧 그녀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깨닫고 밉지 않게 그녀를 노려봤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지아는 미소를 짓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계곡이 가까워진 거 같지 않아?”
“네?”
윤태도 그제야 지아의 말처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아와 윤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이 불어나네.”
“그 이야기는?”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아는 아랫입술을 물고 상류와 하류를 바라봤다.
“일단 밑으로 가자.”
“네?”
“어디로든 뚫렸겠지.”
지아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윤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좀 천천히.”
“너 그러다 물귀신 된다.”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 지아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윤태도 아랫입술을 물고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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