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장. 지아의 어깨에 달린 것
“미안. 아무래도 나는 가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알아요.”
지웅의 부탁에 재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제가 가려고 했어요. 형은 뭔가 나에 대해서 믿음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인 거 같아.”
“그런 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러지.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위험할 수도 있는데 가라고 하는 거니까.”
지웅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들 이 섬에서 지치고 있는 거 같아.”
“형이 제일 지친 거 같은데?”
“그런가?”
재율의 지적에 지웅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내가 제일 지쳤네.”
“그러니 형이야 말로 스스로를 좀 챙겨요.”
“고맙다.”
“고맙기는.”
지웅은 재율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어차피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버드 스트라이크라고 해서 무조건 다 추락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그럼. 그걸 살릴 수도 있지. 아마 한쪽 엔진만 고장이 난 걸 텐데. 뭔가 급하게 착륙을 하려고 한 거야.”
“착륙이라.”
재율은 아랫입술을 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섬의 저쪽에 뭐라도 있으면 좋겠네.”
“조심해.”
“뭘 조심해요?”
“그럴 게 있어.”
지웅의 말에 재율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형은 지금 뭘 알고 있는 거예요?”
“뭘 알고 있긴.”
“형만 알고 있는 게 있는 거잖아요. 아니지. 지금 형이 하는 말은 형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강지아라는 사람하고 이윤태라는 사람도 알고 있는 거겠지. 세 사람이 도대체 뭘 알고 있어요?”
“모르겠다.”
지웅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율은 입을 쭉 내밀고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말을 못해주는 이유가 있겠죠.”
“미안해.”
“아니에요.”
지웅의 사과에 재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거였다.
“저라도 뭔가 숨기곤 했을 거예요. 모든 것을 다 공유한다고 해서 그게 공유가 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지웅은 한숨을 토해내고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고 싶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을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거고. 무조건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을 해야지.”
“그게 뭔데요?”
“정리.”
“정리요?”
재율은 알 수 없는 지웅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정리요?”
“아마 이 해변을 떠나야겠지.”
“왜?”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제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거. 진짜 겨울이 온다면 이 바다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울 거야. 일단 추운 겨울의 바람을 막아줄 것도 없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렇겠네요.”
재율은 입을 쭉 내밀고 어색하게 웃었다. 계절이 달라지는 중이었다. 위험한 계절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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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갈 거야.”
“됐어.”
“뭐가 된 건데?”
“물도 싫어하면서.”
윤태의 지적에 서준은 침을 삼켰다. 그가 물과 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런 대접은 서운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은 아니잖아.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거야. 그럴 거라고.”
“형. 형이 갔다가 괜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
“왜 무슨 일이 생겨?”
“그리고 여기에도 남자가 있어야지.”
윤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구지웅 사무장도 안 간다고 하니까 형도 안 가서 이상한 거 하나 없어. 안 가라면 안 가는 거지.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안 가는 형이 이상한 건 아니니 말이야.”
“그래도 너무 한심하잖아.”
서준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남들이 다 하는 거.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거. 이 섬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
“누가 형보고 아무 것도 아니래?”
“그런 거 다 알아.”
“아니야.”
서준의 힘없는 대답에 윤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형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겠어? 나 싸가지 없는 건 형이 더 잘 알고 있잖아.”
“하긴.”
윤태의 말에 서준은 입을 내밀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태가 얼마나 무례하고 생각도 없이 말을 하는 지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그거 아파.”
“아프라고 한 말이야.”
윤태가 가슴을 움켜쥐면서 울상을 짓자 서준은 씩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어.”
“하나도 안 위험해.”
“네가 어떻게 알아?”
“이쪽에서 가는 거야. 그리고 표재율 군, 라시우 군. 그리고 권윤한 씨까지 가는데 뭐가 위험해.”
“아주 대규모 탐험대네.”
“그렇지.”
서준은 한숨을 토해냈다.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영 편하지 않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갑자기 또.”
“어쩌다 우리가.”
서준의 말에 윤태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누구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일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된 거지. 어쩌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한 건 아니야. 누구라도 그렇겠지.”
“젠장.”
“너무 그러지 마라.”
“알아.”
윤태의 위로에 서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그의 얼굴이 구겨진 것이 펴질 수는 없었다.
“그냥 너무 답답해서 그래.”
“나도 그래.”
“네가 여기에 있을 애가 아닌데.”
서준이 갑자기 자신의 팔을 붙들고 푸념을 늘어놓자 윤태는 혀로 입술을 적시고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에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어? 다들 자기가 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너처럼 유명한 사람도 없고. 너처럼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는 거잖아.”
“에이.”
서준의 말을 끊고 윤태는 미간을 모았다.
“형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
“안 해.”
“그래도.”
“알았어.”
“다른 사람들이 서운해 할 거야.”
평소와 다른 윤태의 모습에 서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너무 달라진 거 알아?”
“내가 뭐?”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무시하던 게 너야.”
“에이. 내가 언제.”
윤태는 웃으면서 대충 넘기려고 했지만 서준의 말에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아. 지금의 네 모습이 오히려 좋다는 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는 거야.”
“무리하는 거 아니야.”
“강 기자 때문이야?”
서준의 입에서 지아가 나오자 윤태는 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서준은 지아를 이상할 정도로 싫어했으니까.
“형. 너무 그러지 마라. 강지아 기자 좋은 사람이야.”
“그 여자 하나도 안 좋아.”
“나보다는 좋은 사람이야.”
윤태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형. 너무 그러지 마요. 강지아 기자도 좋은 사람이니까 너무 그렇게 뭐라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네가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뭘?”
서준의 지적에 윤태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내밀었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그가 이해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이 서준이었는데 서준이 자꾸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냥 잘 살고 싶은 거야.”
“잘 사는 거?”
“응. 잘 사는 거.”
서준은 윤태의 말을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태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서준이 이해를 하고 못 하고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중요한 거였다.
“그리 위험하지 않은 것일 테니까. 형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리고 내가 알아서 잘 한다는 거. 알았지?”
“그래.”
서준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는 혀를 내밀고 어색하게 웃었다. 웃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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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면 안 돼요?”
“안 돼.”
세연의 물음에 지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왜요?”
“너무 위험해. 그곳에 뭐가 있을지 나도 몰라.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내가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어.”
“언니 말처럼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하나도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언니. 나도 같이 가요. 여기에서 할 일이 없어요. 이제 물고기도 안 잡히고. 뭔가 심심한 일상이라고요.”
“심심해?”
지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떴다.
“맹세연 씨. 정신 차려.”
“언니.”
갑자기 바뀐 지아의 태도에 세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 왜 그래요?”
“우리는 지금 이 섬에 놀러온 게 아니잖아. 그런데 자기는 뭔가 놀러온 것처럼 너무 쉽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맹세연 씨. 우리 지금 여기에 쉬러 온 게 아니야. 우리 여기에 살려고 하고 있어.”
“알아요.”
세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지아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
“아니에요.”
지아의 사과에 세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언니의 말이 옳아요.”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
“네.”
“너무 힘들어.”
지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먼저 나서기 전에는 섬의 저편으로 갈 생각을 아무도 안 했을 테니까.”
지아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모든 걸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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