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장. 달이 뜨렷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이야.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춘향이가 어찌 하다 그리 된 것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모른다.”
몽룡의 말에 방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홀로 남원 고을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대감 마님이 나가떨어지는 그 순간에 지킨 것이 춘향이랍니다.”
“그것이야 당연하지.”
“당연이요?”
방자는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편입니다. 그래서 도련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허나 이것에 대해서는 도련님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춘향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도련님도 비명횡사하셨을 겁니다. 이리 남원 고을에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
방자의 지적에 몽룡은 순순히 동의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학도의 모습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망할 사또는.”
“그 사또가 춘향 아가씨에게 힘을 주었지요.”
“힘이라?”
“이 마을 아낙들이 다르다는 것을 정녕 모르십니까?”
방자의 말을 듣고 나니 몽룡은 특이한 것을 느꼈다.
“기생이 없구나.”
“게다가 여인네들이 여인네들만의 일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곳의 여인네들은 밭일도 하고 남정네들이 부엌도 드나들지요. 이 모든 것이 다 춘향의 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지한 것이 바로 사또고요.”
“별스럽구나.”
몽룡은 혀를 차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춘향을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허나 이미 혼인하기로 약조를 했던 몸. 이렇게 나를 외면하고 피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그러하느냐?”
“사또 곁에 있는 것이 더 신기하지요.”
“무어라?”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방자의 대답에 몽룡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도대체 왜 지쳐?”
“도련님.”
“치워라.”
방자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몽룡은 손을 저었다. 이런 식의 말을 방자에게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너를 동무처럼 대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의 동무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 행동을 하는 게야? 너는 나의 동무가 아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하고 싶어도 너는 내 동무가 아니니 말을 가려야 할 것이야.”
“대동세상이 올지도 모르죠.”
“뭐라고?”
“농입니다.”
몽룡이 발끈하자 방자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몽룡의 눈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이곳은 변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알면 다 죽임을 당할 것이야.”
“그래도 달라지지 않겠지요.”
“달라지지 않다니?”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곳에 다시 돌아온 것도 춘향 아가씨 덕이니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몽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서 살 적에 만난 여인이 어느 대감의 후처일 줄 감히 누가 알았던가? 그리고 몽룡의 희롱에 놀아나는 그 여인네도 우스운 이였으니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하란 말인가? 누구 하나 나에게 관직을 내려줄 이가 없단 말인가?”
“모르지요.”
“계십니까?”
그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몽룡의 얼굴이 밝아졌다.
“춘향이구나.”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방자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섰다. 춘향과 향단이 나란히 섰다. 방자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어인 일이십니까?”
“몽룡 도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도련님.”
“괜찮다.”
방자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떨어지는 몽룡의 허락에 춘향은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웃기지도 않아.”
향단의 말에 방자는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우리 아가씨가 이전처럼 천기가 아닌데 어찌 저리 꼿꼿하게 구는지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방자 놈아.”
“이것이.”
“뭐가?”
손을 들었던 방자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쥐방울만한 계집이었던 아이가 이미 너무 커버렸다.
“되었다.”
“뭐가 되었느냐? 방자 네 놈도 영 맹탕이 되어버렸구나.”
“내가 너보다 오라버니인데.”
“오라버니?”
방자의 말에 향단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향단의 반응에 방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웃는 게야?”
“그럼 웃기지 아니 웃을 수가 있니?”
“내가 너보다 오라버니가 맞는데 어이 웃어?”
“나이만 많다고 오라버니니? 방자 놈. 네 놈이 얼마나 어수룩하니 행동을 하는데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향단의 이런 말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방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
“어찌 이러누.”
“달이 뜨렷다.”
방자의 말에 향단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계집애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내가 사내애란 말이냐?”
향단의 톡 쏘는 대답에 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입을 살짝 내밀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여인으로 보인단 말이다.”
“여인?”
잠시 멍하니 있던 향단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방자의 가슴을 세게 때리고 괘를 저었다.
“무어라는 게야?”
“뭐가 말이냐?”
“네가 어찌?”
“뭐가?”
“되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던 향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고 바닥을 쳐다봤다. 방자는 빙긋 웃었다.
“네가 좋다.”
“뭐라는 거니?”
“그래서 도련님이 춘향 아가씨를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하기를 바라. 그래야 너랑 나도 계속해서 볼 수 있을 터이니. 그러지 않으면 아마 너와 나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
방자의 진지한 말에 향단은 침을 삼켰다. 방자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그녀 역시 묘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대단하구나.”
“무엇이?”
“저 방탕한 사내를 예까지 다시 데리고 오고.”
“모두 춘향 아가씨의 덕이지.”
“아니 다행이다.”
향단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방자는 그런 향단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래서 나와 혼인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몽룡의 말에 춘향은 인상을 찌푸렸다.
“농으로라도 함부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춘향의 말에 몽룡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도련님. 도련님께서 남원 고을을 떠나시고 저 홀로 이 곳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는 그 동안 수많은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혼인이요?”
춘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자 몽룡은 침을 삼켰다.
“그래서 나를 거절한다?”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춘향의 대답에 몽룡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면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온 것이야?”
“사또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사내가 무슨?”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것이 어떠느냐 물으십니다.”
“뭐라?”
몽룡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애들이나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건방지구나.”
“도련님.”
“그 자가 도대체 무어인데 내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이런 신분이라고 그리 만만한 것이야?”
“도대체 왜 그리 생각을 하시는 겝니까? 이 집을 지키셔야지요. 더 이상 아무 것도 못하고 그러시면 아니 되지요.”
“괜찮다.”
“도련님!”
“그럼 네가 내게 시집을 오지 않으련?”
몽룡의 말에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찌 이리 되셨습니까?”
“무어라?”
춘향의 말에 몽룡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도련님이 이리 바뀌실 줄은 몰랐습니다. 도련님은 늘 좋은 분일 거라고. 그리 믿었었는데. 이리도 못난 분이 되셨습니다.”
몽룡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지만 춘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몽룡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이 말입니까?”
“너는 내가 알던 춘향이 아니다.”
“시간이 지났지요.”
“그렇다고 이리 될 것이냐?”
“그렇습니다.”
춘향은 그저 덤덤하게 답할 따름이었다.
“저는 더 이상 과거의 관기도 아니옵시고. 도련님과 같은 사람인데 어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신분이 변했다.”
“신분은 없는 것이지요.”
춘향의 말에 몽룡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갔다.
“그래서 그 자의 종이 된 것이냐?”
“종이라뇨?”
“변학도. 그 자의 말을 모두 들어주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언성이 높아진 몽룡과 다르게 춘향은 그저 차분하고 다시 또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할 따름이었다.
“도련님께서 지금 저를 어찌 보실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시고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사또께 도움을 드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래.”
몽룡은 입을 쭉 내밀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네 말은 모두 맞겠지.”
“그렇습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지요.”
“무엇을 말이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말입니다.”
춘향은 이 말을 남기고 싱긋 미소를 짓고 방을 나섰다. 몽룡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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