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 학도의 마음
“나에게 왜 그러는 것이냐?”
묵묵히 걷던 몽룡은 조용한 목소리로 춘향에게 물었다. 춘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몽룡을 바라봤다. 춘향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주춤주춤 따라 걷던 몽룡은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내가 너에게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이리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야? 내가 너에게 그리도 큰 잘못을 한 것이더냐?”
“그런 것 없습니다.”
“허면? 도대체 왜 나는 안 되고 그 늙은 사또는 된다는 것이냐? 내가 그 사또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도령께서 지금 착각하시는 것이 있는데 저는 사또께서 사또라서 사모하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
“그 분 자체를 따르는 것입니다.”
“나 참.”
춘향의 대답에 몽룡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사나운 눈으로 춘향을 응시했다.
“도대체 그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그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그러는 것이야. 도대체 왜?”
“그 동안 계시지 않았으니까요.”
춘향의 간단한 대답에 몽룡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춘향을 보고 손을 내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가씨!”
“향단아.”
향단은 춘향의 앞에 서서 몽룡을 노려봤다.
“도대체 왜 이제야 나타나서 그리 훼방을 놓는 겝니까?”
“무어라?”
“돌아가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춘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몽룡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몽룡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저 망할.”
몽룡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늦은 시각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이하려고 이리 돌아다니는 게냐? 향단이 네가 아프면 내가 얼마나 슬플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아가씨야 말로 제대로 행동 하시어요.”
“뭐라고?”
향단의 되바라진 말에 춘향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향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향단이도 이제 시집을 가야 할 터인데.”
“아가씨도 아직 가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찌 갑니까? 말도 안 되는 말씀은 하지 마셔요. 그리고 얼른 들어가셔야지요. 몽룡 도련님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아가씨를 두고 떠나신 분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 그랬던 것 아니었더냐?”
“그래도 한 번 연락도 하지 않는 이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한답니까? 그 전에 편지라도 한 번 있었으면 제가 이리 행동하지는 않죠. 하지만 도련님은 아가씨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랬지.”
향단의 말이 옳았다. 몽룡은 그녀에게 연락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그녀를 지켜준 것은 학도였다.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도대체 왜 도련님을.”
“그만.”
향단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듣기 좋은 말도 그리 길게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 그만 하거라. 나도 사또께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그 분은 좋은 분이고 그 분은 나를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니까.”
“그럼.”
“그만 하래도.”
향단이 다시 말을 이으려고 하자 춘향은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이건 나의 일이다.”
“그렇지요. 저 같은 천한 것이 어찌 감히 아가씨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하다니. 너나 나나 마찬가지인 걸. 아무튼 알겠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내게 뭘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향단도 이리 말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라고 어찌 말을 할지 그녀가 모를 바가 아니었다. 춘향은 어색하게 웃으며 먼 곳을 쳐다봤다.
“도대체 어이 하여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 댁 도령에게 그리 함부로 굴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사또께서 더욱 잘 아시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그 댁 도령을 괴롭히지 마세요. 그 댁이 이 고을에서 주상보다도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내가 어찌 모르겠소?”
학도는 슬픈 눈으로 춘향을 가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그런 눈으로 응시하는 학도를 보며 춘향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 사람을 따라서 남원으로 돌아오면 안 되는 거였다. 그녀의 모친이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그녀가 더 이상 천기로 살지 않아도 되게 했을 때 그녀는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모친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처음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한 사랑에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학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춘향의 손을 잡았다.
“내가 더 높은 이였다면 그대가 이토록 마음고생을 하게 만들진 않았을 거요. 그대에게 더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내가 너무나도 미안하오. 겨우 고을의 사또가 도대체 무슨 노릇이란 말이오?”
“그리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평생 따르기로 한 낭군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제가 어찌 견디겠습니까? 그 이들이 이토록 낭군님을 괴롭히니 제가 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절대로!”
춘향의 말이 끝이 나기 무섭게 학도는 있는 힘껏 책상을 내리쳤다. 평소에 그녀에게 보이지 않던 모습에 춘향은 미간을 모았다. 학도는 그런 춘향을 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대가 나로 인해서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오. 나는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소.”
“당신이 너무 답답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조금만 움직이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다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그것을 해주지 못하게 해요? 내가 이 남원 고을까지 당신을 따라온 것은 당신께 내조를 하기 위해서 온 거에요. 이렇게 당신에게 짐이 되기 위해서 따라온 것이 아니라고요.”
“그대는 짐이 아니오.”
학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춘향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춘향은 슬픈 눈망울로 가만히 학도를 응시했다.
“그네들은 그리 대해주실 필요가 없는 이들입니다. 사또가 그렇게 밀릴 필요가 없다고요. 지역에서 힘이 세면 무엇을 합니까? 결국 그들도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적당히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또 나를 그리 지키지 않으려고 한다면 사또께서도 힘이 들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오? 내가 어찌 그대를 그 승냥이와도 같은 것들에게 먹이로 던지겠소?”
“제가 그리 미덥지 못하십니까? 제가 그들의 속에 있다한들 그들에 굴복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사또께서 이리 저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 말씀입니다. 저는 그리 약하지 않아요.”
“그대가 약하다 한 적은 없소.”
학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춘향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서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무엇을 말입니까?”
“이몽룡에 관해서.”
“다 알고 있지요.”
무슨 말을 하려던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몽룡이 다른 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돌아온 것인지. 그리고 그녀를 왜 찾는 것인지.
“여색을 그리 밝힌다는 것을 듣지 않았습니까?”
“허나 저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돌아왔다.”
춘향의 말은 옳으면서도 틀렸다.
“만일 그 자가 이곳에 돌아와서 그대부터 찾았더라면 그대가 그리워서 이곳 남원 고을로 왔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은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 거라고.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소. 그 자는 그대가 이미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그렇지요.”
춘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게도 수절을 지키면서 들렸던 몽룡의 소식은 계집을 품었다. 살림을 차렸다더라.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그런 아픈 말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제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으리란 말씀입니까? 저는 일개 여인일 따름인데 말입니다.”
“저와 함께 하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학도의 제안에 춘향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천기입니다.”
“이제 아니지요.”
“허나 제가 감히 사또를 마음에 담으면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모두 제가 천기였다는 것을 기억할 겁니다. 사람들이 원래 그런 법입니다. 너무나도 잔인하게. 잔혹하게 원래 그런 법입니다.”
춘향의 대답에 학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아르게 다가오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대는 나를 믿지 않는 겝니까?”
“나를 믿지 않는 겁니다.”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
“예. 저는 그리 안정적인 삶을 살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왜?”
학도의 안쓰러운 목소리에 춘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무리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 없었다.
“이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지요. 천기가 이제 그냥 평범한 여인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허나 더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학도는 다시 한 번 춘향의 말을 따라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행복하지 원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학도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그대를 지킬 방도가 그리 많지 않소.”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다.”
학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따라하자 춘향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어찌 그리 제 말을 따라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대의 모든 것을 다 마음에 담고 싶소.”
“부끄럽습니다.”
“그대는 내게 귀한 사람입니다.”
학도의 말에 춘향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저 농으로 가벼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운 이였다.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해준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였다.
“어찌 저에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도대체 무어라고. 제가 도대체 무엇을 해드릴 수 있다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소.”
“사또.”
“고맙소.”
학도의 말에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대체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모든 걸 다 잃었던 순간 그대가 내 앞에 나타났소. 그래서 나는 그대를 위해서 뭐든 다 해주고 싶소.”
“이미 모든 것을 해주고 계십니다.”
“아니.”
학도는 고개를 흔들고 춘향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소. 허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가 바란다면 이곳에서 달아나게 해주겠소.”
“어디로요?”
“한양이건 탐라건. 청이건 저 멀리 색목인들이 사는 나라건. 나는 그대를 위해서 뭐든 다 해줄 수 있소.”
“고맙습니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가만히 물고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럴 수 없습니다.”
“어찌 하여.”
“이몽룡 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 홀로.”
“예. 그것이 여인의 삶이지요.”
그 동안 춘향 홀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던 학도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의 선택을 따르겠소.”
“감사합니다.”
춘향은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학도는 그녀의 모든 것을 오롯이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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