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 장. 그 시절 이야기 하나
“네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이다.”
“허나. 저는 수절을 지켰습니다.”
“수절?”
몽룡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정녕 그렇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냐?”
“도련님!”
춘향은 큰 소리로 몽룡을 불렀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몽룡이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내 수청을 들겠느냐?”
“싫습니다.”
춘향의 대답에 학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살짝 내밀었다.
“어찌 그러하느냐?”
“저에게는 정인이 있습니다.”
“정인?”
학도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으냐?”
“무섭지 않습니다.”
“어찌?”
“나쁜 분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래?”
학도의 입가에 미소가 빙긋 걸렸다. 학도는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관기가 되어서 이리 내 명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차라리 벌을 받겠습니다.”
“그래?”
학도는 턱수염을 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가라.”
“예?”
“아니 수청을 들지 않겠다고 하는 여인을 억지로 취하는 그런 악취미는 없다. 그리고 사실 네 절개가 워낙 대단하다 하여 그것이 궁금해서 물은 것이야. 그러니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사또.”
춘향은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생각을 했다. 자신은 감히 사또를 거절할 자격이 없는 몸이었다.
“그러니까.”
“가래도?”
춘향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럴 줄 알았다. 학도가 묘한 소리를 흘리자 춘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사내들이란 무릇 이론 모양이었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하더라도. 아무리 덤덤한 척을 하더라도 그러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또. 저는.”
“참판 댁 딸이었다지?”
“예? 그것을.”
돌아가신 부친이 참판이었다. 그래서 이런 신분이 될 것이 아닌 것을 새로 부임한 사또가 어찌 알았을꼬.
“내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두 다 듣지는 못하겠으나 그대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소.”
“사또. 그것이.”
“아니.”
춘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을 살짝 내밀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관기로라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뭐 역적이나 그러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어머니가 기생이라서 그런 것이거나, 부친께서 돈을 좀 해드셨을 거 같은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으니. 결국 모친이 기생인 게로군.”
“그것이.”
“되었네.”
춘향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였으나 학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춘향에게 흥미가 없다는 듯 홀로 술을 따라 마셨다. 춘향은 거기에 한참이나 서있었다. 나가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지 않나?”
“예?”
“가도 되네.”
“그럼.”
춘향은 혹여나 학도의 말이 바뀔 것을 걱정하며 그대로 사또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한 분이야.”
이상한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 하지만 이 느낌이 그리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 그녀였다.
“이상한 분이야.”
춘향은 뒤에서 학도가 자신을 부를까 종종걸음으로 관아를 나섰다. 이 모습을 무영이 보고 있었음을 듣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대도.”
향단은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가 그리 쉽게 춘향을 보내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다행입니다. 참말로 다행입니다.”
“무슨 소란이야?”
심란한 마음에 마실을 다녀오던 월매의 얼굴이 굳었다.
“춘향아.”
“엄마.”
“도망이라도 온 게야?”
“예?”
월매의 말에 춘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월매의 얼굴은 심각했다.
“웃지만 말고. 말해 이것아. 우리가 지금 도망을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가라고 하셨어.”
“누가?”
“사또께서.”
“뭐라고?”
월매가 지나치게 놀라는 표정을 짓자 춘향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것인지.
“엄마. 왜 그러우?”
“아니 그 양반이 기생이 필요하다고 해서 네가 불려간 것인데. 도대체 어찌 너를 보내준단 말이냐?”
“아버지가 참판이냐 묻더이다.”
“아버지 이야기를?”
“응. 그러더니. 이런 일을 하기 싫으면 그냥 가라고 해서. 내 그냥 왔소. 이것도 무슨 잘못이야?”
“아니. 잘못은. 잘못이지.”
월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관기가 함부로 관아를 벗어나고 그러면 아니 되는 것이었다.
“혹여나 사또가 나중에 어떤 마음을 먹을지 알고 그리 함부로 움직이고 그러는 것이야. 그러면 아니 되지.”
“엄마.”
“내가 다시.”
“가지 마.”
월매가 집을 나서려고 하자 춘향은 월매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향단도 월매의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지 않소? 지금 사또가 얼마나 공명한 분인지. 다 알고 있는데. 어찌 그렇습니까? 그러니 참으세요.”
“참말이야?”
“그럼. 내가 엄마한테 농을 하우?”
월매는 입을 꾹 다물고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춘향을 쳐다봤다. 춘향은 밝은 미소를 드러냈지만 월매는 휘적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춘향은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말 좋은 분입니다.”
“그렇지.”
향단의 말에 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불려갔을 때만 하더라도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만 해도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사또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을 그리 함부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참 다행이구나.”
“유명하기도 합니다.”
“유명해?”
“예.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도 많고. 억울한 이의 목소리도 잘 들어준답니다. 그리고 지주와도 맞서구요.”
“저런.”
춘향의 얼굴에 걱정이 순간 스쳤다. 지주와 다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은.”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렇지.”
춘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 그저 이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다행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사또가 좋은 분이었으면 좋겠다.”
“좋은 분이래요.”
“처음만 좋은 분이면 뭐하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또가 좋은 분이어야 하는 거지. 아니 그러니?”
“뭐.”
춘향의 지적에 향단은 입술을 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또?”
“이 마을 이야기를 듣고 싶네.”
“예?”
고을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는 사또는 처음이었다.
“어차피 이곳을 곧 떠나실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하신 겁니까?”
“사소해?”
“예. 사소합니다.”
“아니지.”
학도는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저 멀리 마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고을이 좋아.”
“남산 분이라 들었습니다. 저 멀리 한양에서 오신 분인데 이곳이 좋고 그런 것도 있으십니까?”
“그런 것도 아는가?”
“그러믄요.”
“신기한 일일세.”
학도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나에 대해서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미 마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군.”
“혹여 이것이 불쾌하시다면.”
“아닐세.”
춘향이 당황하며 말을 덧붙이자 학도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런 것을 가지고 불쾌하거나 그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야.”
“그렇습니까?”
“아. 나 홀로 한 말이니 말을 너무 함부로 했다 생각하지 마시게.”
학도의 말에 춘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대하는 사또는 그 동안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무슨 말인가?”
“저는 기생입니다.”
“아닐 수도 있지.”
“예?”
“나는 사실 관기라는 것이 필요한가. 그것이 궁금한 사람일세. 사람이 사람을 꼭 그리 대해야 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순간 춘향의 머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여기저기 서학이 마귀처럼 사람들 사이에 깃든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것이.”
“아닐세.”
학도는 그런 춘향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쉬고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서학을 배워볼까 생각도 했다만 이 나이가 되어 뭔가를 더 배운다는 것 자체가 흥미가 없기도 하고, 그것을 나에게 차근차근 알려줄 이도 없었네. 그러니 그리 겁을 낼 이유는 없어.”
“어찌 아셨습니까?”
“이상하게 그대의 마음이 다 보이는군.”
학도의 말에 춘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모든 순간이 긴장되고 다시 또 긴장되는 그녀였다. 춘향의 어색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학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저 멀리를 쳐다봤다. 춘향도 어색한 마음을 누르고 학도와 함께 저 멀리를 함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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