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 장. 그 시절 이야기 셋
“이게 내 이름이라고?”
“그렇대도요.”
“어머나.”
춘자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손으로 자신이 쓴 글씨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먹이 채 마르지 않았건만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이것이.”
춘자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막순이 춘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이 촌스럽게 왜 울고 그래?”
“내가 촌년이라 이렇지라. 어찌. 어찌 내가 이리.”
“앞으로 더 많이 배우셔야 합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마을 아낙들을 쳐다봤다. 그저 자기 이름만 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감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만 둬라.”
“엄마.”
“그만 둬.”
월매의 단호한 반응에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월매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게야?”
“엄마. 여인들이라고 해서 글을 배우지 말라는 법이 없소. 그런데 어찌 엄마는 글을 배우지 않으려는 게요?”
“더러운 서학에라도 빠진 게야?”
“엄마!”
춘향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학에 빠지면 온 집안 식구가 다 죽임을 당하는데 내가 그럴 리가 있소? 엄마는 무슨 말을 그리.”
“그런데 어찌 이리 된 것이야.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글을 배우면 위험한 것이야. 배운 사람들이 그 동안 무슨 일을 당하는지 다 보지 않았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배우면 위험해.”
“엄마. 아니에요.”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운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배워도 괜찮았다.
“이게 엄마 이름이야.”
“뭐?”
“이게 엄마 이름이라고. 엄마 딸이 쓴.”
춘향은 월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월매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월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이게 엄마 이름이라고. 내가 살면서 내 손으로 엄마 이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소. 그래도 이리 내가 엄마의 이름을 쓰니 얼마나 다행이 아닌가? 이제 엄마도 엄마 손으로 엄마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 할머니 이름도 쓰고 싶고.”
“엄니 이름을 내가 쓸 수 있다고?”
“그래.”
“정말로?”
“그럼.”
월매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춘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향단이 재빨리 붓과 종이를 들고 왔다.
“이걸 쥐어봐.”
“어찌.”
“얼른.”
월매는 울음을 삼키며 붓을 잡았다.
“잡았다. 엄마가 붓을 잡았어.”
“그리고 이리 써보는 거야.”
춘향은 월매의 손을 움직여서 천천히 외할머니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박막례. 한 자, 한 자, 쓰일 적마다 월매의 눈에 눈물이 더욱 가득 차올랐다.
“이거여. 할머니 이름. 박막례.”
“박막례.”
아들도 없는 집이었다. 제사 하나 모실 양반이 없었다. 무덤은 아마도 쓸쓸히 잡초로 뒤덮였을 거였다. 그나마 있는 자식이라고는 월매 하나이니 이름 하나 기억을 하고 남길 수 있는 이 없었다. 아니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참말로. 내 엄마 이름이여?”
“그려.”
“엄니 이름이라고.”
월매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크게 쉰 후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이것이 내 엄니 이름이네. 이것이 내 엄니 이름이야. 엄니. 엄니 이름이야.”
월매는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이제 자신이 엄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너무나도 다행이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것은?”
“천자문이네.”
“사또.”
학도가 내민 책에 춘향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됩니다. 이것은 진정 아니 됩니다.”
“어이 하여 그런가?”
“사또. 언문은 누구나 배우라고 세종대왕께서 반포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내들만 배울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여인들이 배울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그저 여인인가? 그리고 이미 반가의 규수들도 이것을 배우고 있네. 남자 형제들이 수학을 할 때 같이 수학을 하는 게지. 그러니 그대도 그리 겁을 내지 마시게. 그리 문제가 있지 않아.”
“허나.”
“괜찮으네.”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혹 내가 그대에게 뭐 나쁜 것이라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게야? 내가 그대를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지만.”
춘향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학도가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그저 편안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천자문이요?”
“그렇대도.”
“어머.”
향단은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춘향의 책을 들춰보았다. 그리고 이내 흥미를 일었는지 입을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이게 좋아요?”
“그럼 좋지.”
“뭐가 좋소?”
“왜?”
춘향은 책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남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사내들보다 못나다고 생각을 했어. 내가 사내들에 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허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 거지.”
“나는 그냥 다른 사람 하는 게 낫겠소. 이것을 어찌 외웁니까? 이 다음에 또 다른 것을 배울 거 아니오?”
“그렇겠지. 효경도 배우고 명심보감도 배우고. 또 이런 것이 뭐가 있지?”
“됐어요.”
향단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게 무슨?”
“왜? 재미있지 않으니?”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게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왜 그래요?”
춘자는 남편의 다리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이 미친 여편네가 집안 일은 돌보지도 않고 이리 글만 배우고 다닌다고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거지.”
“뭐 하는 일이오?”
“미친.”
춘향이 나서자 춘자의 남편은 더욱 사나워졌다.
“네 년이 이리도 온 마을 여편네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어. 네 놈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아는 게야?”
“여인들이 글을 배우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닌데 도대체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일단 진정을 하시고.”
“진정? 진정!”
“아저씨.”
“서학에 빠진 더러운 계집.”
“뭐라고 했냐!”
월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대로 춘자의 남편을 떠밀었다.
“더러운 계집! 더러운 계집?”
“어디 손을 대오? 천한 기생 출신이 어디 참판 하나 잘 꼬여내서 애라도 낳으면 신분이 오를지 알았소? 이리 글을 배우기 좋아하면 사내를 낳아야지. 사내를 낳지 않고서 지금 뭐 하는 게요?”
“이봐요.”
“더러운 년들. 이리 와.”
“안 돼. 안 돼!”
춘자가 이리 끌려가지만 누구 하나 춘자의 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다. 춘자의 남편은 너무나도 사나웠다.
“아무도 오지 않는구나.”
“그러게요.”
향단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다들 이리 되는 것인지.”
“남편들이 오지 말라고 하겠지.”
춘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치우자.”
“하지만.”
“어차피 오지 않아.”
춘향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종이를 거두기 시작했다. 향단도 그런 춘향을 따라서 종이를 거두기 시작했다.
“오늘도 오지 않네요.”
“그렇겠지.”
춘향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치우자꾸나.”
“아가씨.”
“아무도 원망하지 말아.”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겁이 많은 사내들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여러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것은 없습니다.”
학도의 대답에 관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턱수염을 만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인이 글을 배우는 것이 잘못입니까?”
“잘못이지.”
“아닙니다.”
학도의 대답에 관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혹시?”
“아닙니다.”
“조심하시게.”
학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깐깐한 사람이기는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이것저것 편의를 많이 봐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네를 노리는 사람이 많아.”
“그렇습니까?”
“농이 아니야.”
“저도 농이 아닙니다.”
학도의 대답에 관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그리 많은데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어. 왜 이러는 것인가?”
“저는 그저 모든 사람들이 다 같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저 그런 것인데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어찌 사람이 같아?”
“저는.”
“됐네.”
관리는 딱 잘라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허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자네가 원하는 대동 세상은 오지 않네.”
학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걸세.”
학도의 눈이 당황한 채로 흔들렸다. 하지만 관리는 술을 마실 따름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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