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 장. 이리 오너라
“다녀오겠습니다.”
방자의 말이 있었지만 몽룡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몽룡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집을 나섰다.
“무슨 단장이니?”
“뭐가요?”
춘향의 물음에 향단은 발끈했다.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머리 곱게 빗고. 얼굴도.”
“머리야 빗어야지요.”
향단은 발끈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지.”
“아가씨는 오늘 사또 댁에 안 갑니까?”
“가야지.”
“그럼 얼른 가십시오.”
“왜?”
춘향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 담겼다.
“나 없는 사이에 방자랑 만나서 무얼 하려고?”
“뭐라는 겁니까?”
“아니다.”
춘향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향단은 입을 쭉 내밀고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 이상하십니다.”
“내가?”
“예. 아가씨요.”
“그래?”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상하다고 하는데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바로 돌아오마.”
“알겠습니다.”
향단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나가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떡을 준비해 놓았다.”
“떡이요?”
“그래. 방자 혼자 밥 주고 너는 멀뚱히 기다리지 말고. 같이 떡이라도 먹어라.”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내가.”
“아가씨.”
춘향의 말에 향단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춘향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쭉 내밀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너는 귀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뉘가 밥을 먹는 것을 도대체 네가 왜 기다려야 한다니? 그러지 마라. 네가 그러면 내가 괜히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내 말을 알겠니?”
“예. 알겠습니다.”
향단은 혀를 살짝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춘향의 배려가 작아보였지만 너무 고마운 그녀였다.
“좋아 보입니다.”
“다행입니다.”
춘향의 칭찬에 학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가져온 책을 춘향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대가 좋지 않다고 할까 그것을 조마조마하고 있었는데 그대가 책을 좋다고 해주니 다행입니다.”
“이런 책을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신대애라라고 읽으면 되는 건가요?”
“일단 거기에 적힌 것이 그것인데 정확한 발음은 그것이 아닐 겁니다. 불란서 사람들의 말이 있기는 하나 어려워 읽지 못하고, 영국인들의 글이 있기는 하나 정확히 발음을 알지 못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리도 청어로 번역이 된 것을 보니 우리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대가 좋아하니 좋습니다.”
“네?”
“아닙니다.”
춘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자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춘향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가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불편하게 한 것이오?”
“아닙니다.”
춘향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학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연히 춘향을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책은 내가 더 주문하겠소.”
“필사는 어떨까요?”
“필사요?”
춘향의 말에 학도는 입을 쭉 내밀었다. 필사가 좋기는 하나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춘향의 눈빛은 서늘했다.
“언문으로 받아쓰면 됩니다.”
“누가요?”
“학생들이요.”
“학생들이 말입니까?”
학도는 턱수염을 만졌다. 어려운 일일 거 같았다. 하지만 춘향이 하고 싶다고 하는데 굳이 안 된다고 무조건 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알겠소.”
“정말입니까?”
“내가 그대에게 거짓을 고한 적이 있소?”
“없습니다.”
춘향은 책을 품에 꼭 안고 고개를 저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또. 정말 고맙습니다.”
“어서 가시오. 조심히.”
“예. 고맙습니다.”
학도는 멀어지는 춘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영이 그런 학도의 곁으로 다가와서 미간을 모았다.
“다른 책을 더 구했다고 하시지요.”
“되었네.”
“허나.”
“되었어.”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이 저리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이 반짝여서 가는데 내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습니까?”
무영은 그런 학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내가?”
“쉽게 흥분도 하지 않으시고, 타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의 그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말은 전에 내가 어찌 했단 말인가?”
학도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달라지고 있었다.
“고작 여인이다.”
“사또께서 연모하시는 연인이지요.”
“연모라.”
학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뛰는 것이 연모였다. 이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구나. 연모구나.”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더욱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받아라.”
“뭐니?”
“꽃이다.”
“누가 꽃인 걸 몰라서 하니?”
향단은 입을 삐쭉 내밀고 사납게 대꾸했다.
“이 꽃이 어인 일이냐는 말이다.”
“너 주려고 가져 왔다.”
“뭐?”
방자의 말에 향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주기 위해서 꽃을 가지고 왔다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참말이냐?”
“그런 것으로 농을 하는 이도 있더냐?”
“아니.”
향단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좋으면서도 괜히 좋다고 내색을 하기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떡이나 먹어라.”
“무슨 떡이냐?”
“아가씨가 너 오면 먹이라고 하더라.”
“춘향 아가씨가?”
“당연한 말을.”
향단은 입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내가 모시는 아가씨가 또 있다니?”
“하여간 그리 까칠해서 뉘가 너를 데리고 갈지 모르겠다. 그래서 너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니?”
“내가 시집을 가건 못 가건 방자 네 놈이 왜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이냐? 이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데리고 가야 할 거 같으니 하는 말이다.”
방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향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는 게야?”
“떡이 맛있다.”
“모자란 놈.”
향단은 이리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방자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장이 두방마질 쳤다.
“계집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일이었어? 염통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으네.”
방자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향단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하누.”
그러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시집이라.”
향단은 꽃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집이라.”
“이제 이름은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방자가 손으로 자신이 쓴 글을 만지는 것을 보며 춘향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 번도 제 손으로 제 이름을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쓰게 되다니.”
“참 신기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누구나 글을 배우면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쓰고, 부모의 이름을 쓰고, 감동을 합니다. 신기하지요? 아무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두 자에서 석 자인데. 고작 그것이 그리 감동입니까?”
“그렇지요. 짧은 글이지요.”
하지만 짧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의미까지 짧은 것은 아니었다. 한 평생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해내는 거였다.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춘향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향단아.”
“예. 아가씨 준비했습니다.”
향단은 보따리를 들고 부엌에서 나타났다.
“가져 가시지요.”
“무엇입니까?”
“도련님과 드실 간단한 음식입니다. 오늘 저녁하고 내일 아침 요기는 될 것입니다. 낮은 도련님도 알아서 하시겠지요.”
춘향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같이 드십시오. 꼭. 맛있는 거라고 다 몽룡 도련님만 드리지 말고. 아셨지요? 그러면 향단이가 속상해합니다.”
“아가씨!”
“알았다.”
향단이 새된 비명을 지르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다시 방자를 보며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셨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지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방자는 고개를 숙이고 멀어졌다. 춘향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향단은 그런 춘향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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