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장. 그들의 선택 4
“네가 네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내 딸을 아낀다. 그리고 내 딸을 아끼는 만큼 네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낼 수밖에 없어.”
“그건 다른 문제죠.”
재희는 곧바로 항변했다.
“다른 승객들이 있어요. 평범한 국민들이 있다고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는 거잖아요.”
“모르겠구나.”
대통령의 장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때로는 이유가 필요하다. 명분이 있어야 해.”
“국민이 명분이 안 되나요?”
“안 되지.”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에 재희는 한숨을 토해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이런 것들이 꼬인 걸까?
“아빠가 총리를 그렇게 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은 유리했어요. 결국 문제를 만든 것은 엄마에요.”
“맞다.”
대통령의 장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아니었더라면 문제는 정말로 간단했을 거였다.
“네 엄마가 끼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섰을 거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늦었어.”
“뭐가 늦어요?”
“시간.”
“뭐라고요?”
“시간이 너무 흘렀어.”
재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 되기는 했다. 이제 한 달 보름. 사람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가능성.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사람을 구하는 일을 막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사람인데 왜 그래요?”
“자기 일이 아니니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잖아요.”
재희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럼 자기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거잖아요.”
“아니.”
대통령의 장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자신은 정치에 몸을 담았지만 국민들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은 일은 그저 남의 일이라고. 누군가의 추모까지도 막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그러니까요.”
하지만 재희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장인 어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재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도대체 왜 그래요?”
“뭐가?”
“할아버지는 그러시면 안 되는 거죠.”
재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지는 정의로우셔야죠.”
“나는 정의로웠다.”
“아니요.”
재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할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지금 할아버지는 정의롭지 않았다.
“사람들을 구해야 해요. 사람들을 지켜야 해요. 그게 올바른 정치인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요.”
“그럼 네가 해라.”
“뭐라고요?”
“네가 나서라.”
“할아버지.”
재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런 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 건데요?”
“네가 나서면 내가 도와주마.”
“뭐라고요?”
“너의 정의를 펼쳐라.”
재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정의라는 것. 이것을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네가 생각하는 그 정의. 그것을 펼치게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너는 지금 반대를 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재희는 숨을 크게 쉬었다.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재희는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제가 나서면 달라질까요?”
“내가 있다.”
“할아버지가 뭔데요?”
“적어도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의원들. 그들은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만든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가 너를 전면에 내세워서 네 아비를 도우면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겠지. 결국 네가 아버지를 용서한 뭐 그런 그림이 되니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재희는 침을 삼켰다. 마치 자신이 찾아와서 이 모든 제안을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두려웠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좋아요.”
“정말이냐?”
“네.”
재희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뭐라도 당장 해야만 하는 거였다.
“그렇게 하죠.”
“그래.”
대통령의 장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녀에게 손을 내밀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전 국무촐리 오동호의 이름을 걸고 너를 도우마. 네가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해주마.”
“할아버지만 믿을게요.”
동호는 인자한 눈으로 손녀를 쳐다봤다.
“너도 간다고?”
“안 돼요?”
“아니.”
세연의 말에 지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말이었다.
“고마워서 그러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세연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윤한 씨가 가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서 그냥 가는 거야?”
“네.”
“하지만.”
지아는 무슨 말을 하려다 침을 삼켰다. 윤태도 자신을 따라서 그냥 이 섬을 나가려고 하는 거였다.
“알아요. 하지만 어차피 제가 별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거라면 그냥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지.”
지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입장이 없다면 타인의 입장을 따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섬. 어차피 있으면 죽을 거예요.”
“왜?”
“뭐가 없잖아요.”
세연은 섬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지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은 원래 그들이 있던 섬과 달랐다. 몰이 샘솟는 것을 찾기는 했지만 너무 적은 양이었고 채소도 전혀 없었다.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
“언니 믿고서도 가는 거예요.”
“그래.”
지아는 더욱 밝게 웃었다. 누구 하나 자신을 더 믿어준다고 하면 힘들기는 하지만 동시에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맹세연 씨와 권윤한 씨도요?”
“네. 나갈 거예요.”
지웅은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원래 이 섬의 사람들의 입장은 알지 못했지만 꽤 많은 수가 나가는 거였다.
“유리하긴 하군요.”
“그렇죠?”
지아의 대답에 지웅은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모았다.
“그래도 무조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섬들이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죠.”
지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섬으로 갈 수 있을지. 그것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두렵지 않아요?”
“네?”
지웅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말은 할 이유가 없었다. 지웅은 입을 꾹 다물고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준비하죠.”
“괜찮을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처음에는 지아를 도와주지 않을 것 같던 지웅의 말에 지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웅은 그런 지아의 눈치를 깨달았는지 씩 웃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나는 승무원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강지아 씨가 무슨 선택을 하건, 그대로 그것을 믿고 따라줘야 합니다.”
지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웠다. 누군가의 믿음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나저나 거짓말을 좀 하기는 해야 할 거 같아요.”
“네? 무슨 거짓말이요?”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지웅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화기요.”
“전화기를 못 가지고 가게 해서요? 그런 거라면 놓고 갈게요. 괜히 사람들하고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아니요.”
지아의 대답에 지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웅은 지아의 눈을 보며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무조건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이 섬에서는 더 이상 우리가 어떤 신호도 받지 못하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다른 섬으로 가라고요?”
“당연하죠.”
지웅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숨을 크게 쉬었다. 긴장이 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웅의 말이 옳았다. 원래 섬으로 가는 것은 전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무조건 새로운 섬으로 가세요. 그게 강지아 씨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더 좋은 겁니다.”
“너무 위험하네요.”
“그렇죠.”
지아의 말에 지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에서는 챙겨줄 수 있는 음식도 너무 적었다.
“몇 명이 갈 거 같죠?”
“일단 저랑 이윤태 씨. 그리고 라시우 군. 표재율 군도 갈 거 같죠? 그리고 세연이랑 윤한 씨. 또 강봄. 이렇게요.”
“적지도 많지도 않군요.”
“네. 그렇죠.”
“아 나라는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가 같이 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으면서도 너무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은 크게 내키지 않았다.
“직접 정하게 해야죠.”
“그렇죠.”
지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나라를 억지로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만 했다.
“결국 승무원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남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보다 많으면 제가 남고 둘을 보내고, 만일 반대의 경우라면 이 섬에 성진아 승무원을 남길까 합니다. 그게 현명하니까요.”
“따를까요?”
“모르죠.”
지웅의 간단한 대답에 지아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침을 삼켰다.
“그래도 긴장이 되네요.”
“그러게요.”
섬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기회를 잡는다는 것. 이것은 무조건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어떤 변수가 생길지 그 누구도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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