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 장. 새 날이 온다.
“의외로군.”
“아닙니다.”
학도의 말에 춘향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미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몽룡 도련님이 한 번 하면 제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군.”
학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내가 물은 것은.”
“아니요.”
학도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허나.”
“제가 다른 고을에 가서까지 글을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위험한 일이라.”
학도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주 약간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을 하기에는 이곳에서 그대가 글을 가르치는 것도 그리 안전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요.”
춘향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오.”
“허나.”
“그곳은 계집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소.”
“그렇겠지요.”
춘향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다른 고을에서만 그럴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한양에서도 양반가의 자제들이 아니었더라면 여인네들이 글을 배우는 것은 사치일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지체가 높으신 양반네 따님들을.”
“그럴 일이 없지요.”
학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춘향은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나 사또. 제가 이곳에서 이리 뿌리를 내렸는데. 이제 와서 다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것입니까? 아이들에게 이것이 또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래서 이몽룡이 있는 것 아니오?”
“도련님이요?”
“아이들을 잘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일단 더 지켜보고. 아이들이 이몽룡. 그 사람에게도 믿음을 가진다면. 그렇다면 새롭게 하시죠.”
“일단은.”
“그렇게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춘향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끄러미 학도를 응시했다.
“그래도 저에게 말씀을 너무 높이지 마십시오. 사또께서 그러시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집니다.”
“나는 그저 한 고을의 사또일 뿐이나. 그대는 수많은 이들을 사또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소.”
“사또로 만들 수 있는 힘이라니.”
“가르치는 것.”
“아.”
춘향은 입을 살짝 벌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저 해주는 말이라고 해도 너무 고마웠다.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가시지.”
“싫다.”
향단의 말에도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남원 고을을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이더냐? 향단이 너도. 가끔 보면 너무 생각이 없어.”
“그래도 이 고을에서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고을에서 아가씨에게 마음 하나 둘 곳이 있었습니까? 아직도 아가씨를 보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르십니까?”
“되었다.”
“아가씨!”
“되었어.”
향단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리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대놓고 뭐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 고을 사람들에게도 시간을 줘야지.”
“뭐 얼마나 더요? 엄니가. 그렇게 되신 것.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 분이 얼마나 좋은 분이셨는데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데. 그것은 아니었지요. 아닙니까?”
“모두 어리석은 일을 한다.”
춘향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도 마음이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화를 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가 바보가 아니고, 네가 바보가 아니 듯.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허나 그것이.”
“틀릴 수도 있지.”
춘향은 향단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것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조건 밀어내기만 하라고. 외면하라는 것은 아니야.”
“아가씨는 어찌 그렇소?”
“무엇이?”
“어찌 그리 아무렇지도 않소?”
“아무렇다. 뭉개져.”
춘향은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혀를 살짝 내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너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허나 내가 무너진다고 해서. 내가 주저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위로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아가씨.”
“나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요.”
향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고맙다.”
춘향은 향단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이런 속에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너 말고 누가 있겠니? 네가 있으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지.”
“고맙습니다.”
춘향의 말에 향단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춘향도 그런 향단을 물끄러미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으로 올라오시랍니다.”
“어렵다.”
“허나.”
“아직은 안 된다.”
학도의 단호한 말에 관리는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 고집을 부릴 거요? 임금이 저리도 기다리는데. 이것은 불충이 아닌가?”
“아무리 불충이라고 한들. 내가 지금 다스리고 있는 고을 사람들이 있는데 그저 버리고 가라는 것인가?”
“그것이야 다른 좋은 사람을 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자네가 천거하면 다 받아준다고 하셨네.”
“아니.”
학도는 더욱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자리를 대신 할 사람은 그의 눈에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 홀로 천거한다고 될 일이 아니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이곳 남원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달라질 수가 있는지. 나는 아직 그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임금이 더 이상 기다릴 거라고 생각을 하는가? 한양에서 임금의 편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그거야.”
“임금을 몰아내려는 사람들도 있네.”
학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소문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여인 탓인가?”
“아닙니다.”
“그럼 내가 그 여인을 한양으로 데리고 가겠네.”
“그리만 하십시오.”
학도의 목소리가 곧바로 범처럼 울렸다. 관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무엇이?”
“사또.”
“되었네.”
학도는 무영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나. 임금께서는 그리 마음이 작은 분이 아니야. 그러니 그러지 말게나.”
“홍길동. 그 분도 이리 와서 사또를 설득하고 가신 것이고. 임금도 한 번이나 오시고, 그리고 다시 또 이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그리 가벼이만 여기며 무조건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보다 사또께서 더 잘 아시는 것이 아닙니까? 아시면서도 어찌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알지. 알아.”
학도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뭔가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자신이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 그 사람들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여기에서 성과가 보이지 않나?”
“허나 사또.”
“조금만 더.”
“사또.”
“제발 조금만 더.”
학도의 간절한 표정에 무영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역시 학도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 그를 채근할 수 없었다. 학도는 이런 무영의 마음을 안 것인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
“신기하다.”
“신기해요?”
“그래.”
몽룡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또 보람이 있었다.
“이틀 내리 아이가 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해. 그러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신기하다.”
“다행입니다.”
“응?”
“도련님의 얼굴이 밝아지셨으니 말입니다.”
“내가?”
“예.”
몽룡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 그게 신기했다.
“그러하냐?”
“예. 들어가십시오.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방자가 부엌으로 들어가고 몽룡은 방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유성댁이 멀리 보였다. 몽룡은 곧바로 그리 나갔다.
“유성댁.”
“예. 도련님.”
유성댁은 여전히 까칠했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약간이나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몽룡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면 되겠나?”
“예?”
“밥을 해주는 삯말일세.”
“아.”
유성댁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몽룡이 자신을 붙들고 이런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이.”
“내 이제 더 이상 유성댁을 그냥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아무튼 그래서 얼마를 내면 되나?”
“제 아이를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됩니다.”
“응?”
몽룡은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막돌의 이름이 최막돌이라는 것이 떠오르고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아이가?”
“모르셨습니까?”
몽룡은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유성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왜 모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그리고 제 아이의 스승에게 이 정도야 간단한 일이지요.”
“어쩐지 그대와 닮았네.”
“욕 같은데요?”
“욕이 아니라.”
몽룡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유성댁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몽룡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몽룡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칭찬을 듣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 참 묘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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