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삼 장.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영 생각이 없는 건 아닌가 봅니다.”
“향단아.”
“사실 아닙니까?”
향단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몽룡 도련님만 돌아오시지 않았으면 아가씨께서 이리 고민을 하시지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사또도 계시고.”
“절대 아니다.”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말이 안 될 소리였다. 학도는 자신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 분의 성정이 얼마나 훌륭한데, 내가 그 분의 곁에서 가당키나 하다는 말이더냐? 말도 안 된다.”
“허나 아가씨께서 아니 되실 이유란 또 무엇입니까? 저는 아가씨의 그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되었다.”
춘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런 소문도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조심하거라.”
“아가씨.”
“너도 사또의 은혜를 입은 이가 아니더냐? 그런데 어찌 나 같은 것과 사또를 엮는다는 말이야?”
“아가씨도 이제 더 이상 천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른께서도 참판이셨으니 그것만 보더라도.”
“되었다.”
춘향은 손을 저었다. 아버지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은 더욱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그쪽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졌다. 그 일을 가지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너는 어찌 그러니?”
“아가씨께서 안쓰러워 그러죠.”
“내가 왜?”
“몽룡 도련님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분이다.”
“아가씨.”
“참말 좋은 분이다.”
춘향은 힘을 주어 말하며 향단의 눈을 응시했다.
“네가 그 분을 원망하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분의 아픔을 너는 모르지 않니? 그 분의 아픔은 정말 크단다. 그러니 그 분이 그리 행동을 하는 것도 나는 이해를 하고 알 수가 있단다.”
“허나 그 마음이 도련님 혼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도 마님을 잃으셨습니다.”
“나의 죄지.”
“아가씨.”
“그만.”
춘향은 책을 펼치며 미간을 모았다.
“그만 하자.”
“도대체 무얼요?”
향단은 춘향의 책을 덮었다.
“향단아.”
“늘 이러십니다.”
“무엇이?”
“이렇게 피하고, 또 피하고. 이래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무슨 말을 나눈다는 말입니까?”
“대화를 하기 싫어.”
“뭐라고요?”
“이건 내 일이다.”
“아가씨.”
춘향의 단호한 태도에 향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늘 상냥하게 향단과 모든 말을 하던 춘향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저의 일과 아가씨의 일. 이렇게 명확히 구분이 되었다고 하실 수가 있습니까?”
“너는 방자와 혼인을 하면 그만 아니더냐?”
“어찌. 어찌.”
“나는 내 일이 있다.”
“아가씨께서 행복해지시기 전에 제가 시집을 갈 거라 그리 생각을 하셨소? 그런 거라면 틀리셨습니다.”
“향단아. 나는 그저.”
“안 갑니다.”
향단의 태도가 격해지자 춘향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러라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사과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더 행복하시라. 그렇게 하시는 말씀인 겁니다.”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해.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도련님이 좋아.”
“왜요?”
“왜라니?”
“왜 좋으십니까?”
향단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향단이 보기에 춘향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 분이 무엇을 했다고요? 아가씨께서 힘드실 적에 모든 것을 다 해준 사람이 바로 사또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또의 마음을 그리 무시하는 겁니까?”
“사또는 좋은 분이다. 그래서 내가 갈 수 없는 것이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니. 나는 부족하니.”
“그럼 도련님은요?”
“아, 이해를 하시겠지.”
춘향은 잠시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치고 향단의 눈을 응시했다.
“책 좀 읽자.”
“마음대로 하십시오.”
향단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춘향은 뭐라 한 마디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한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녀석도 참.”
춘향은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히 하십시오.”
“무엇을?”
“춘향 아가씨 말씀입니다.”
방자의 말에 몽룡은 미간을 모았다. 방자가 어찌 이리 괘씸한 말을 하는 것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네가 왜 이러는 것인지는 아나 굳이 네가 이럴 이유는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무엇이?”
“춘향 아가씨를 잡으실 마음이 있습니까?”
“잡다니.”
“도련님.”
자신의 말을 질문으로 답하는 몽룡을 보며 방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몽룡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공연히 왜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와 춘향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야.”
“지금 그것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도련님의 그 어설픈 행동. 그 애매한 행동들이 춘향 아가씨를 흔들고 있으니. 그것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무엇이 말이냐?”
“정말 모르십니까?”
몽룡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자신도 자신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방자에 이런 말을 들으니 불편했다.
“춘향 아가씨께서 가여우십니다.”
“방자야.”
“도련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까? 이 천한 것도 느끼는 것을 도련님은 느끼지 않으시는 겁니까?”
방자의 간곡한 물음에 몽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역시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문제였다.
“사또가 춘향 아가씨에게 한양에 가자고 하셨답니다. 그 기회를 아가씨는 망설이고 계신답니다.”
“보내라는 말이냐?”
“당연하죠.”
“싫다.”
“뭐라고요?”
“싫단 말이다.”
몽룡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싫다.”
“어째서요?”
“좋아.”
“예?”
“춘향 그 사람이 좋다.”
몽룡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참 자격이 없는 말이었다. 그 오랜 시간 외로이 두고 말도 안 되는 거였다. 허나 사실이었다. 좋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외면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좋았다.
“춘향이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런 것은 하나 중요하지 않아. 나는 그 사람이 좋아. 너무 좋다.”
“그럼 그 마음을 표현을 하십시오. 이리 애매하게 계시고 그러지 마시고 말입니다. 지금 그런 도련님의 행동으로 인해서 아가씨께서 얼마나 힘들어 하시는지 아시면서도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나선다고 뭐 하나 달라질까?”
“당연하지요.”
“아니.”
몽룡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자의 눈을 응시했다. 방자는 놀랐다.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몽룡의 눈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은. 다시 이전의 그 눈을 담고 있었다.
“도련님.”
“나는 그 사람을 보면 아파. 춘향이를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보내십시오. 그렇게라도 해서 춘향 아가씨를 나은 환경에 두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달라지느냐?”
“달라지지요.”
“내가 가란다고 갈 이가 아니야.”
방자는 무어라 답을 할 수 없었다. 이건 몽룡의 말이 옳았다. 몽룡이 가란다고 해서 춘향이 떠날 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적극적으로 권하고 또 권하셔야지요.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처를 주라고?”
몽룡은 미간을 모았다.
“싫어.”
“그럼 어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모르겠다.”
“그게 무슨?”
“정말 모르겠어.”
몽룡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를 먹고, 양반이라고 방자 앞에서 젠체하면서 모른다는 것이 한심했지만 어절 수 없었다. 이게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어떤 종류의 진심 같은 것이었다.
“춘향이가 나를 어떻게 볼지, 그 모든 것이 두렵다. 그리고 내가 감히 그 아이에게 다가가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사또라는 작자에게 춘향이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춘향 아가씨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렇지.”
몽룡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도련님.”
“모르겠어.”
몽룡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도. 또 누군가를 놓아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지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버거웠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느냐?”
“춘향 아가씨를 생각을 하십시오.”
“응?”
“놓아주십시오.”
“놓으라.”
몽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의 말이 옳을 것이었다. 춘향을 높아주는 것. 그게 옳은 것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는 그게 맞는 것이지.”
“도련님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알아.”
몽룡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니 생각을 하는 것이지.”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더 시간이 지났다가는 춘향 아가씨께서 한양으로 가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양이라.”
모두가 꿈을 꾸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춘향이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제야 몽룡은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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