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장. 진실 3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기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행복했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행복하고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몸은 행복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상유가 가지고 있는 기계는 자신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했는데. 상유와 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게 전부였는데. 그 마음이 컸던 모양이었다.
“행복하지 않다?”
“그럴 리는 없어.”
상유의 반응에 존은 고개를 저었다.
“둘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속이 부글부글 끓여서 못 견디는 것을 보면 좋아하는 게 맞는 거거든.”
“행복하다고?”
“그래.”
존은 턱을 긁적였다.
“내가 보기에 둘은 너무나도 행복해.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지 마. 그런 의심이 정기연 씨를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거 같으니까.”
“신기해.”
“뭐가?”
“나보다 더 인간들을 잘 아는 거 같아.”
상유의 말에 존은 입술을 내밀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상유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기.”
“미안합니다.”
기연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상유가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기연 씨가 틀린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실망도 하지 않았어요. 행복할 겁니다. 다만 내가 떠날 생각에 그런 거지.”
“그래도.”
기연은 아랫입술을 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 그 어느 순간보다 행복해요.”
“알고 있습니다.”
상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고 밝게 웃었다.
“그만 둬.”
“뭘?”
앙상하게 마른 선재를 보며 아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저대로 가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였다.
“너 그만 둬야 해.”
“뭘요?”
“상유 지키는 거.”
“그럴 수 없어요.”
선재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쥐었다가 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거의 끝이네.”
“소멸일 거야.”
“그렇죠.”
“권선재.”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다음 세대로 닿는 것.”
“다음 세대라니.”
아름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선재는 물끄러미 아름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누나도 알고 있죠? 두 사람이 이미 저 아래에서 한 번 인연을 맺고 나서 다시 만났다는 거?”
“그거야.”
“뭐 선배한테는 말하지 마요.”
선재의 여유로운 태도에 아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우리 지금 되게 이상한 거 같아.”
밥을 먹다가 기연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둘 다 말을 안 하고.”
“그러게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너무나도 어색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굳이 그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기연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조금 더 박상유 씨를 좋아하고 있다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여줄 수 있을 텐데요.”
“지금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정기연 씨가 내게 다 말을 해주니까요.”
“그래요?”
“그럼요.”
“그럼 다행이다.”
기연은 손뼉까지 치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살짝 헛기침을 했다.
“불안하게 느끼게 해서 미안합니다. 나로 인해서 스스로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아니요.”
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정기연 씨.”
“내가 말을 했죠. 박상유 씨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을 거라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거야.”
“아닐 겁니다.”
“맞아요.”
기연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이니까.”
“그게 무슨?”
“박상유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이대로 다 끝을 내버리려고 했으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어떤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행동을 했으니까. 내가 한 행동은 정말 그런 거니까.”
기연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자신이 생각을 해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던 상황이었다.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느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글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먼저 물어봐준 게 바로 박상유 씨였고요. 박상유 씨가 있어서 나는 지금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지 않아도 알았을 겁니다. 그것이 약간 더 시간이 걸리고 조금은 느리겠지만 알았을 겁니다.”
“아니래도요.”
기연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서 지레짐작은.”
“정기연 씨.”
“고마워요.”
기연은 상유의 눈을 응시하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아직도 내가 만나는 이 사람. 아니 이 남자가 천사라는 거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고마워.”
“아직도 못 믿습니까?”
“그럼요.”
기연은 혀를 내밀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 같은 애가 무슨.”
“왜요?”
“평범하니까.”
“특별해요.”
“왜요?”
“나를 만났으니까.”
상유는 이렇게 말하고 날개를 펼쳤다. 새롭게 생기던 두 개의 날개가 확실히 생겨서 기연의 눈에도 보였다.
“이제 네 장이구나.”
“그러게요.”
날개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것. 이것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일어나고 있고 그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였다.
“그렇구나.”
기연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 정말 곧 떠나는 거죠?”
“네. 그럴 겁니다.”
“그래요.”
기연은 입술을 꼭꼭 물었다. 부정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누가 뭐래도 현실이었다.
“그럼.”
“아직은 안 됩니다.”
기연이 다시 손을 내밀자 상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뭐 하는 거예요?”
“박상유 씨야 말로 뭐하는 거예요?”
“왜요?”
“어차피 갈 거잖아요.”
기연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차피 떠나야 하는 거면서 왜 내가 미련을 가지게 그렇게 애매하게 행동을 하는 건데요?”
“그런 거 아닙니다.”
상유는 고개를 저었다. 미련을 갖게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끝을 내는 건 아니었다.
“정기연 씨. 나는 정기연 씨와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왜요?”
“놀러갈래요?”
“네?”
갑작스러운 상유의 제안에 기연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 정기연 씨와 나 둘 모두에게 추억 같은 게 필요할 겁니다. 그 시간을 견디고.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죠. 아닙니까?”
“그럴까요?”
“그럼요.”
기연은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실일 거였다. 자신이 견디게 하는 힘. 그게 필요했다.
“좋아요.”
“그래요?”
“네. 좋아요.”
기연은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상유의 인사에 노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저야 말로 이렇게 귀한 분을 모실 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뭐가 귀합니까?”
“귀하지요.”
상유는 어색하게 웃은 채 턱을 긁적였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물끄러미 노 신부를 응시했다.
“고맙습니다.”
상유의 인사에 노 신부는 싱긋 웃었다.
“저기.”
성당을 떠나려는 상유를 신부가 붙잡았다.
“이거.”
“뭡니까?”
“왠지 드려야 할 거 같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성경.
“이건 귀한 것 같은데.”
“귀할 겁니다.”
신부는 이를 드러내고 밝게 웃었다.
“이 성당의 시작부터 있던 물건이니까요.”
“이런 걸 왜 저에게.”
“필요하실 겁니다.”
상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 수 없는 일들.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들. 결국 다 하나의 뜻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상유는 어색하게 웃었다. 굳이 거절할 것도 없었다. 주는 것이니 받고. 이것의 의미에 대해서만 다시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고맙습니다.”
“저야 말로 제 미음이 흔들리는 순간에 오셔서 제 믿음이 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까?”
“그럼요.”
“그럼 잘 한 거네요.”
“물론입니다.”
그래도 저 위에 부끄럽지 않을 일을 하나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하는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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