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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품 분석

권정선재 2010. 12. 22. 04:33

 

광대가 되고 싶은 천재

 

- ‘이기호소설 분석 -

 

 

 

 

 

 

1. ‘이기호의 소설이 독특한 이유

 

이기호라는 작가의 이름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도 모르는 작가이다. 비록 실험적인 소설을 쓰고 인터넷에 연재 등을 하기는 했지만 상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작가로써의 삶이 긴 편도 아니니, 오히려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호는 흥미로운 작가이다. 기존의 작가들과 완연히 다른 이기호만의 이기호스러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독특하다고 말을 할 수 있으며, 어느 한 편으로는 괴짜스럽기도 하다.

보통 대중문학의 작가들이 일정 시기를 거치면 문단과 타협을 한다거나, 다소 그의 독특한 생각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기호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상상력을 더욱 자유분방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까지 상상력이 강해도 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그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스타일의 글들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단순히 팔리기 위해서 쉬운 글. 아니면 유행을 타고 있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점 역시 그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 더욱 신선하다는 점일 것이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상업적이어야 한다는 시선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책을 내고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두곤 한다. 이 정도 이상은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이렇게 자신의 고집만을 부리는 소설이라면 팔리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까지 많이 나가지 않겠다 하는 등의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기호는 그런 작가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나 그의 문학의 특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에게 그러한 부분은 그리 큰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 역시 들게 만들고 있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한 가지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을 때, 그에 따라 당연히 부가적인 것들이 따라올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기에, 그의 소설에는 재미가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재미가 보장이 되어 있기에 탄탄한 스토리라는 느낌도 받게 된다.

 

실험적인 소설도 많이 쓰고 있는 그는, 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고 있으며, 다수의 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앞으로의 대한민국 문학을 이끌어나갈 인재로도 꼽히고 있다. 해외에 번역 등이 많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대해 공부를 하는 사람 등은 그의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소설이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이상의 어떤 의미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재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상업 소설이라는 것을 쓰는 그의 애매한 위치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면서, 그가 양쪽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작가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현대 한국 소설들이 주로 보이는 경향을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오늘날의 작가들이 인간 심리를 바탕으로 상상에 의존하는 소설들을 쓰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이기호는 철저하게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상이라거나, 미래에 관한 것은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는 현실적이라는 느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분명히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시대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를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그 속에는 오늘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그의 소설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신화적인 요소 역시 사용을 하고 있다. 소와 인간의 결합이라거나,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소설도 쓰면서 그 어떤 작가와도 어울리지 않는 독보적인 자리를 잡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쓰게 되면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다거나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인데, 그의 소설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가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그의 가치를 높여준다.

 

사실 이기호라는 작가는 아직 인기 있는 대중 작가의 위치에 있다고 말을 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욱 많으며, 현대 작가 중에 그는 책이 많이 팔리는 작가의 축에도 들지 못 한다. 그러나 공지영과 함께 다음에서 연재할 기회를 얻은 그는 [사과는 잘 해요]라는 작품을 통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 시켰으며, 그의 소설이 읽을 만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아주 재미있는 소설은 아닐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은 독자들이 시간을 때우기에라도 괜찮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을 한 것처럼, ‘이기호의 소설에는 독특함이 살아있고, 대중적이면서도 실험적이고, 기존의 문단과도 닿아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한 결론일 수도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인 것처럼, 가장 이기호스러운 것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문학적인 의미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 있어서 자신감이 있으며,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려고 한다.

일부 대중소설 작가들이 독자의 위에서 군림을 하면서 독자들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점과 명확하게 구분이 되며, 독자들이 자신의 글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부분을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있게 둔다는 점은 특이한 점일 것이다. 이러한 점은 소설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며, 단순히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문학이라던가 글을 읽을 때처럼, 그 속에 담겨 있는 어떠한 의미와, 그 의미를 통한 성찰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느낌 역시 들게 한다.

 

 

 

2. ‘이기호소설의 독특함

 

 

2-1 독특한 대화방식

 

[나쁜 소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소설은 다른 작가의 소설과는 다르게 대화형 소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끼리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단편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은 이같은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나 [나쁜 소설]과 같은 경우는 적극적으로 독자에게 대화를 걸면서 독자로 하여금 소설에 더욱 몰입을 하게 만든다.

기존의 소설들이 독자를 수동적인 역할에 두는 것과 다르게, 능동적으로 행동을 하게 만들면서 소설을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않고 친근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행동은 굉장히 불친절한 행동일 수도 있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그 동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방법을 가지고 소설을 대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독자들은 책 읽기라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을 할 수도 있으며, 어렵게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기에 그의 소설은 가치가 있으며, 의미가 있다.

 

[나쁜 소설]은 여태까지 나타났던 그 어떤 소설보다도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누군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부제 때문에 생기는 특성이다. [나쁜 소설]은 독자가 소설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특징을 하나 더 가지게 되는데, 바로 화자와 청자가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작가가 화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고, 독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청자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쁜 소설]의 경우 독자가 소설을 읽게 되면 화자가 되고, 반대로 듣게 되면 청자가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누가 듣고는 어쩌면 아주 크지 않을 문제일 수도 있다. 실제로 모든 소설들은 독자가 읽기 때문에 화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특이한 이유는 듣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이 구절은 이 소설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단순히 소설이란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의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설이라는 것은 사실 누군가와 소통을 나누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하기 싫어서 읽는 경우가 보편적인, 사람들 간의 대화를 오히려 차단을 하는 효과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기호[나쁜 소설] 같은 경우는 이렇게 사람들 간의 거리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친밀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음성으로 누군가에게 전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말을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서로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도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요리 레시피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 소설은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먹지 않을 흙 요리법을 알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레시피라는 특성상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면서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작가는 실제로 요리사와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며 소설을 읽게 된다.

방송 등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 요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온 사람은 단순히 요리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요리만 단순히 가르치게 된다면 굉장히 지루하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아주 딱딱한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요리 프로그램 등에서는 요리사가 적극적으로 이 요리에 대한 옛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자신이 어떻게 이 요리를 만들게 되었는지 역시 이야기를 하곤 한다.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요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은 소통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친해질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에, 등산과 목욕. 그리고 식사가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색다른 의미이다. 생존이라는 것과 직결이 되어 있는, 식량이라는 것을 나눈다는 것은 이 사람을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있으며, 내가 정말로 이 사람을 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주고 싶은, 소설 속 화자는 독자들을 걱정을 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나쁜 소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액자식 구성이라는 것이다. [나쁜 소설]의 경우 누군가에게 읽어주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이 되고, 다시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구현하고 있다. 명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첫 번째 액자이고, 또 몇 가지 액자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쁜 소설]은 명백히 액자형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형식에 눈에 보이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역시 레시피를 알려줌과 동시에, 왜 흙을 먹게 되었느냐를 이야기하는 액자식 소설 형식을 갖추고 있다. 레시피를 알려주는 나라는 존재와 함께, 어떻게 흙을 먹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다시 하나의 틀로 독자들에게 소설을 더욱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대화형 소설이기는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소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작가가 직접 소설을 쓰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소설은, 여러 법칙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짝 액자의 형태를 끼워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전기 형식을 띄고 있으면서, 과연 작가가 화자일까? 아닐까?에 대한 궁금증 역시 함께 가지게 한다. 또한 위의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틀 속에 사연을 집어넣는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의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단순히 소설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소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꼼꼼하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게 된다.

2-2 독특한 소재와 독특한 구성

 

[버니]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의 경우 글의 스타일에 있어서도 그 누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의 등단작인 [버니]와 같은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소설 [최순덕 성령충만기]이다.

이 중 [버니]는 랩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소설들이 서술 형 등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을 하고, 인물들이 대화를 하는 것과는 다르게, 랩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고 소통을 하고 있기 떄문이다.

 

내 별명은 바구니 물을 담으면 물이 새고

쌀을 담으면 쌀이 새는

대나무로 만든 가벼운 바구니

내 머리가 가벼워 내 별명은 바구니 (후략)

 

이러한 구절을 반복적으로 삽입하면서, 마치 단편 소설 전체를 하나의 돌림노래와 같이 만들고 있다. 그리고 한 장을 제외하고는 매 장이 끝날 때마다 반복 삽입하면서, 더욱 음악적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문체 역시 독특하게 구성한 점이 눈에 띈다. 흔히들 랩에서 라임이라고 하는, 각운을 맞추고, 읽을 때 리듬감을 주는 것 등이 소설에서 적극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을 소리내어 읽게 되면, 의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리듬을 살려 읽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버니]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설정 가운데 하나이며, [버니]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그딴 거 몰라, 백제가 뭔지, 근초고왕이 누군지, 아무것도 몰라, 검이 칼이라는 건 알아, 일본도 알아, 브레이크 댄스도 알아, 브레이크 댄스는 ᄈᆞ삭해, 백 동키즈 킥이 무엇인지, 베이비스와잎스가 무엇인지, 원 핸드 동키즈가 무엇인지, 그런 건 잘 알아, (후략)

 

이러한 문체적 특징은 [버니]‘이기호의 실험적인 정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물론 [버니]가 더욱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랩이라는 소재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버니]가 아니었다면, 이 랩이라는 형식의 소설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처럼 어색하고, 작가는 물론이고 읽는 독자들까지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버니] 속에서 랩이라는 소재는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래퍼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은 결국 다시 누군가에게 소통을 하게 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 인물이, 랩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확실히 새로운 스타일이며,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만일 주인공이 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하게 된다면, [버니]라는 소설에서 랩이 쓰이는 것은 훨씬 더 낯선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소통을 원하고, 그것이 랩이기에 [버니]는 랩이라는 형식이 딱 맞게 느껴지고 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이보다 더 독특한데, 마치 성경처럼 구성을 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

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

하노니

2 이는 대저 믿는 자에게 내

린 성령충만의 산 역사요 증거더라

3 서울 땅 아현동에 스물두

살 된 처녀가 한 명 살았으니

그 이름이 최순덕이더라

4 순덕은 이미 그 어미 뱃속

에서부터 하나님의 규례대로

흠 없이 산 자이니 성경으로

글자를 배우고 회당을 놀이터

삼아 자라난 자이더라

5 순덕의 아비와 어미 역시

믿음이 신실한 자들이니 그

아비는 교회 버스 운전사요

그 어미는 교회 사찰 집사이

거늘 온 가족이 집에서 보는

시간보다 교회에서 접하는 시

간이 더 많았더라

6 순덕의 어미는 언제나 딸에

게 일러 가로되 순덕아 순덕

아 하나 밖에 없는 내 딸아 세(후략)

[최순덕 성령충만기] 역시 [버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면, 성경이라는 특성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느낌을 주는 이야기이기에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문체는 기존의 소설에서 감히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로, 내용에 있어서의 특이함이 없더라도, 이미 스타일만으로도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을 한 것처럼, 똑같은 소설을 단순히 스타일만 다르게 했다는 이유로 이것이 좋은 소설이거나 특별한 소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단순히 문체만 특이해서 소설의 의미가 강하게 되는 거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만의 차이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때 그 가치가 있고 참신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참신함은 3-1에서 다룬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에서도 나타나는데, 요리 레시피라는 독특한 점은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갖게 만든다. 순서가 있다는 점은 독자들이 차근차근 따라오게 만드는 특징도 있다. ‘이기호소설 전반에 흐르는, 일방적으로 작가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모습이 역시나 독특한 소재와, 그와 걸맞는 이야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소설들에 있어서는 소재에서는 그리 큰 특별함을 보이지 않는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 계집 아이가 몸 파는 곳으로 와서 일을 하다가, 가수가 된다는 설정이나, 어쩔 수 없이 흙을 먹게 된 이후 거기에 중독이 된 사내. 미친 듯 종교에 구원을 원하는 여자의 모습은 사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소재들을 랩이나 성경 등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바꾸면서 이기호의 독창성은 빛을 발하며,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는 새로운 소설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2-3 독특한 생각펴기

 

[백미러 사나이] [머리칼 전언]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백미러 사나이]의 경우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흔히 어른들이 말씀을 하는, ‘나는 뒤에도 눈이 달렸으니 허튼 짓 하지 마라.’가 실현된 모습으로, 머리 뒤에 눈이 달린 한 청년의 이야기다. 소재 자체로도 독특한 이 소설은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대와 어울리면서 사회소설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을 다루면 지나치게 뻔한 스토리의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시대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그 동안 너무나도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기호작가의 [백미러 사나이]는 여태까지 나왔던 사회운동 시대의 소서로가는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단순히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을 넘어서 재미를 확실하게 보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를 볼 수 있는 사내라는 사실은 그 어떤 판타지 소설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욕망일 수도 있다. 사람이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볼 수 없기 때문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곳, 우리가 공포가 다가오더라도 느낄 수 없는 머리 뒤에 눈이 달렸다는 설정은,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을 하는 기본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은, 시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소설이며, 시대의 모습은 또 하나의 눈으로 더욱 또렷하게 세상을 그리고 있다. 화염병을 던지는 마지막 모습은 소설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통해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 그가 가질 수 없었던 것. 그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졌기에 그 모든 것을 다시 잃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어렴풋이 닮아있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바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면 그것을 가장 유용하게, 혹은 물질적으로 사용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사람들의 바람이나 소망은 너무나도 부질 없는 것이며 결국에는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능력을 악용하기에 주인공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회 운동 시대의 모습을 놓치지도 않고 있으며, 그 당시의 사람들이 살고 있던 제대로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는 점 역시도 그려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이런 힘든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뒤를 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당신은 앞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당신의 앞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으라는, 시대를 똑바로 보는 눈으로 기르라는 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머리칼 전언]은 다소 공포스러움을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한 소녀가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은 소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머리카락은 소녀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소녀의 명령을 고스란히 따르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인간의 길들여지지 않는 욕망을 상징하고 있는데, 성욕을 상징하고 있다. 만일 이 성욕을 억제한다면 소녀는 식욕이라는 또 다른 기본적인 욕구의 행태로 그것을 드러낸다.

현대인들에게도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눌러야 하는 순간이 있고, 소녀의 무쇠 머리핀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세상이라는 곳과 타협을 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기운을 억지로 누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머리카락의 유혹에 무너지게 되는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있다.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성욕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욕이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이다. 생존과도 연관이 되어 있으며,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성욕 역시 식욕이라는, 진정 기본적인 욕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소녀는 진실로 중요한 식욕이라는 것을 잃고 성욕이라는 일시적인 쾌락에만 몰두하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소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녀가 바라는 욕구의 형태는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소녀의 머리핀은 어느 한 시점에서 바라보면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 머리핀이 가지고 있는 것은 소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핀이 없게 되면 소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결국 소녀의 것이 아닌 자체의 인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다소 신화적인 성격이 있는 소설이다. 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이러한 모습과 다르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세상에 타협을 하지 못 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던 터전을 잃게 된 한 여인의 모습은, 사회라는 커다란 폭력 아래에 무릎을 꿇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도 닿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줄 영웅을 원하고 있지만 영웅은 부재하며, 그들의 고통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색다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정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 피켓을 든 채 구경을 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는 다르게 거기서 소주도 마시고 김밥도 먹는 다수라는 것들이 가진 이기적인 힘에 대해서 작가가 폭로하는 것은, 소설의 배경과 상관없이 오늘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결국에 세 개의 소설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상의 모습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또렷한 제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왜곡 현상인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꿰뚫고 그 본질을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일그러진 욕망이라던가, 잘못된 사회에 대한 인식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서 등장을 하는 인물들은 사회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인간상 역시 왜곡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의 아둔하면서도 어리석은 현대인들과 닮아 있는 모습에 그들의 이야기는 상상의 세계 속의 환상적인 모험 같이 들리게 되며, 결국 그 아이러니는 현대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거울이 될 수 밖에 없다.

 

 

2-4 독특한 평범함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원주통신] [사과는 잘 해요]

 

여태까지 이기호라는 작가가 독특하는 시각을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기호가 특이한 소설만을 쓴 것은 아니다. 대중과 닿아 있는 현실과 닿아 있는 작품 역시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물론 그의 평범한 소설들은 다른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과 같다고만은 이야기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평범한 소설들은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독특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있기도 한, 그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은 오늘날 젊은 세대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트렁크 팬티인지 반바지인지를 모를 것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스 배관을 타고, 그로 인해서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는,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촌극은 정체성의 모호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청년들을 비꼬고 있다. 이 소설에서 팬티의 정체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팬티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며,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서 정해지는 그것의 정체이다. 한 마디로 아무리 그것이 진실 된 의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서 변질되는 현실을 꼬집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 팬티의 의미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팬티일 수도 있고 반바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팬티 스스로가 아니다.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구다. 라고 말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규정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너무 신경을 쓰는 나머지, 자신의 진짜 존재를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미지라거나 캐릭터 등을 자신이 스스로 규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데?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 등의 시선으로 밖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인간상을 나타내며, 결국 자신의 의지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닿아 있는 측면이 존재하게 된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의 경우 추억과 관련이 된 이야기이다. 삼촌이 어느 날 종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가 남긴 것은 오직 차 한 대 뿐이었다. 그리고 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삼촌의 흔적을 쫓아다니는 나는, 점점 삼촌의 삶을 알게 되고, 삼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타인에 대해서 조금 더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경우 가까운 사람은 무조건 잘 아는 사이라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은 없는, 그러한 현실과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로 잘 아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은, 나와 맞는 그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모습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그의 전부라고 생각을 하며 그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물으면, 아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의를 하고 멋대로 그 이미지를 만들곤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며, 정말 당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그런 사람이 맞는 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원주통신]이기호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토지]박경리작가를 소재로 사용을 하면서 현실성을 탈리고 가만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문체 역시 그리 어렵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친구의 모습 등은 그저 평범한 인간의 군상을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특별할 것 같은 청춘도 결국 다른 사람과 하나 다를 것 없으며, 겉으로는 많은 꿈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 번 저지르지도 못하는 청춘의 모습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결국 자신이 만든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 모습에 겁이 나서 제대로 행동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아마 안 되었을 거야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주인공은 오늘날 20대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닮아있다.

 

인터넷에서 연재가 된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있지만 지나치게 묵직하며, 블랙코미디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공지영[도가니]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자신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모르는 두 장애인의 모습 때문에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에도 발생한, 장애인 복지시설 폭행 사건이 다시 한 번 연결이 되면서, 소설 속의 상황이 그저 과거의 한 번 뉴스였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방송이나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사과를 잘 해야 혼나지 않는다는 두 청년은, 사과를 잘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사과를 해주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며, 다소 끔찍하게 보이는 일도 행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저 사과를 했을 뿐이고, 이것은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 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어울리는 일을 했을 뿐이고, 이 소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것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잘못된 사람들인 것이다. 두 주인공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들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잘못한 점을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 한다. 늘 변명을 만들며, 누군가의 핑계를 대고 자신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 비록 습관에 의해서 시작이 된 사과이기는 하지만 두 주인공의 사과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반성을 주며,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결국 사과를 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의미를 성찰을 해보고, 누군가에게 잘못을 한 점이 있는 지를 곰곰이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며,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되새기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일들은 어렵지 않게 느끼고 담담하게 해낸다는 것은 하나의 성취감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일이며, 현대인들이 반드시 해결을 해야 할 중요함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3. ‘이기호는 천재다.

 

김영하작가와 마찬가지로 이기호작가는 앞으로의 대한민국 문단을 이끌어갈 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김영하작가가 해외에 번역도 되고, 상품성이 좋은 작가로 시선을 끌고 있다면, ‘이기호는 한국 문단과 독자들에게 관심을 받으며 방송이나 영화계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소설에는 독특한 감성이 있다. 시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그것을 비켜나간다. 그리고 묘하게 비켜나가는 줄 알았던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그 문제의 본질을 뚫고 있다.

자칫 적나라해서 뻔뻔해질 수도 있는, 뻔뻔하기에 식상할 수도 있는 사회적인 주제들을 그는 독특한 문체와 실험적인 도전으로 색다르게 바꾸어 버린다. 똑같은 민주화 운동의 이야기가 아닌 뒤통수에 눈이 달린 사내의 이야기로, 나라와 다수의 폭력 아래 무릎을 꿇는 한 여인의 삶을 소의 아이를 낳은 신화의 여인으로, 글도 배운 적 없고 공부도 한 적 없지만, 신앙심 하나로 모든 것을 이야기를 하는 한 여인의 삶 등은, 오직 이기호이기에 가능한 색다른 도전일 것이다.

이기호는 그 어떤 작가보다 광대적인 기질이 다분한 작가이다. ‘김탁환같은 탁월한 이야기 꾼도 있지만, ‘이기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익살꾼에 가까운 편이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 새로운 것이 없으며, 어느 하나 독창적인 것이 없다. 하지만 이기호가 풀어내기에 그의 소설은 모두 독창적이며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이기호의 소설들과 똑같은 소재를 다른 작가가 썼다면 오나벽하게 다른 작품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소설은 더 잘 쓴 소설일 수도 있고 문학사적인 의미가 더 큰 소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기호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소설의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기호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 단순히 시대의 모습이라거나 현대인들을 다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단편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이기호라는 작가가 창조한 하나의 세계가 오롯이 담겨있고, 각각의 단편들에는 모두 완벽히 다른 세계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작가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가장 아래에는 뻔한 이야기를 재미없게 풀어나가는 작가,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없게 풀어나가는 작가, 다음은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작가, 가장 위에 있는 것은 빤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작가라고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누구나 다 예측을 할 수 있기에, 자칫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 독자를 유린해야 한다는 생각에 작가 스스로 발이 걸려 넘어질, 그런 작품을 잘 쓰는 작가가 가장 뛰어난 작가라는 것이다. ‘이기호는 그러한 의미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이다. 일본의 오쿠다 히데오를 연상시킨 듯 유쾌함이 묻어나고 있으며, 그의 글에는 많은 의미가 되새겨져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글처럼 보이더라도 독자로써, 읽으면서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광대다. ‘이문열이나 박완서같은 사람이 작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이기호는 글재주라는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을 농락하는 광대이기 때문이다. 빤한 이야기도 빤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재주가 있는 그는 한국 문학계에 있어서 허리를 차지할 것이 라고 생각된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원로, 중견작가들에 이어서, 자신의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피는 젊은 작가들의 사이에 있는, 말 그대로 허리를 담당하며 시대의 아픔도 그려낼 줄 알고 상상력의 나래도 펼칠 수 있기에 이기호는 그 어떤 현존하는 한국작가보다 더 우수하며 뛰어난 작가이다.

현대문학사에서 그런 만큼 그의 위치는 아주 중요하다. 단순히 재미만을 쫓는 것은 아니면서도,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소설을 쓰고 있다. 현대에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줄어가고 있다는 점을 살필 때, 그런 사람들까지 모두 자신의 독자들로 가져오면서도, 작품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기호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가적 모습은 앞으로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모습이며, 기존의 작가들도 닮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이 되다. 무조건 힘이 잔뜩 들어가서 관념적인 내용으로만 가득 담긴 상징 소설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재미가 있어서 대중들과 소통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좋은 소설이 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그 작품은 좋은 작품으로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다수가 읽을 수 있는, 조금 더 편안한 소재와 편안한 문체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도 좋은 소설은 아니다. 소설 속에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며, 독자들이 생각을 할 여지 역시 넓혀 두어야 한다.

이기호라는 작가가 젊은 사람들에게 나름의 반응을 이끄는 것은 그가 젊은 작가라는 것도 있겠지만 그의 글이 굉장히 감각적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기호와 같은 작가는 젊은 독자들이 재미와 신선함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 일본 소설로 향했던 발걸음을 다시 돌리고 있다. 한국 소설도 재미있다 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그 속에서 생각을 할 것도 만들어주는 작가인 이기호는 현대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았을 때, 그는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소설들을 바라보면 마치 그는 광대처럼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한다. 일부의 코미디처럼 저급하게 무조건 웃기고 보자 식의 웃음이 아니라, 그 속에 굉장히 많은 철학이 담겨 있으면서도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기에 단순히 읽으면 그만인 것. 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기호라는 작가의 소설은 소설이라는 것을 넘은, 삶의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기호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수성이면서도 그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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