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나쁜 게 아니다!
- ‘이기호’의 [나쁜 소설] -
※나쁘다 : 1. 좋지 아니하다. 2. 옳지 아니하다. 3. 정신 건강에 해롭다.
1. ‘이기호’는 누구인가?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월간지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버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09년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나쁜 소설]의 특징
소설이라는 것은 읽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쁜 소설]의 경우 부제가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일 정도로 기본 소설의 특징과는 완벽히 차이를 보인다. 원래 소설이라는 것은 소리를 내어 읽기 보다는, 속으로 읽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나쁜 소설]의 경우 오디오용 소설이라는 특징을 설정하고 있다.
구조 역시 매우 특이하다. 기본의 소설이, 화자가 있고 거기에 대응하는 청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쁜 소설]은 그 기준이 모호하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어준다면 독자는 화자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 읽어주기를 바란다면 청자가 된다. 보통의 소설들이 명확하게 이것을 구별을 하면서, 소설이란 읽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 이라는 새로운 정의에 어울리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나쁜 소설은 앞에서도 말을 한 것처럼 오디오용 소설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읽을 필요도 없으며, 읽지 않는다고 해서 소설을 이해를 하는데 어려움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읽지 않는 소설이 더욱 소설 다우며 가만히 더 많은 의미를 생각을 할 수 있기도 하다.
소설 자체의 구성도 특이하다. 소설은 크게, 소설을 소개하는 부분, 소설로 들어가는 부분, 주인공이 되는 부분, 소설을 읽어주는 부분, 나오는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얼핏 보면 액자 소설과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액자의 바깥이고, 안인지의 구분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명확함보다는 이 소설이 어떻게 느껴지는 지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더욱 큰 특징이다.
즉, 이 소설은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은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구성들은 그저 부차적인 부분에 그칠 뿐이며, 독자들이 읽을 때는 그 구분을 또렷히 구분하지 않더라도 내용을 이해를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오히려 독자들이 조금 더 자신의 생각을 반영해서 읽게 된다면 더욱 흥미롭게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소설을 나쁘다고 지칭을 하면서 시작을 하는 소설은 없다. 일부 좋지 않은 소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소설들 역시 자신의 소설을 나쁜 소설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진행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의 소설을 나쁜 소설이라고 지칭을 하면서 독자들과 소통을 할 수도 있으면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비판의 의식을 먼저 제한하고 들어가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나쁜 소설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게도 된다.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특징이 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려고 하다가도, 그 사람이 먼저 자신을 자책을 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저절로 화가 누그러 들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소설보다도 난해하며 새로운 특징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이 소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뭐가 이렇게 나쁜 소설이 다 있냐고 물으려돈 독자들 역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채 욕을 꺼내기도 전에 작가는 먼저 자신의 소설을 낮추고 있고, 독자들의 입장은 다소 누그러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나쁜 소설이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나쁜 소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다소 문제가 있을 수가 있다. 위에서 설명을 한 것처럼 나쁘다는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쁜의 의미 외에도 옳지 아니하다. 라는 뜻이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을 이 소설에 대입을 해서 보면, 기존의 소설의 형식을 옳은 것이라고 두고, 기존의 소설과 형식이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이기에 옳지 않은 소설. 즉 나쁜 소설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쁘다는 의미는 소설의 수준이나 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작가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높게 사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최면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빌려오기도 했다. 진짜로 최면에 빠지는 것 같은, 그리고 최면에서 나오는 것 같은 상황을 주면서 독자들이 차근차근 소설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독자들이 쉽게 책장을 넘기면서 후루룩 소설을 읽는 것을 방지하면서 소설을 조금 더 몰입을 해서 읽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작가가, 좋습니다. 좋아요. 등의 발언을 자꾸만 반복을 하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작가는 적극적으로 독자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고 있으며, 독자 역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하는 작가에게 발을 맞추며 함께 소설을 읽게 되고, 소설에 대해서 더욱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3. [나쁜 소설]의 구성
1) 소설을 소개하는 부분
보통 글의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구조다. [나쁜 소설]을 설명해주는 부분으로, 소설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중간중간 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돋보인다.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면서, 이 소설에 참여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나쁜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분이며, 최면술사가 최면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에게 일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상하게 소설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고, 또한 소설을 제대로 읽고 들을 수 있는 장소까지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작가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직접 참여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보통의 소설들이 이 단계에서 주인공이 누군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과는 다르게 누가 주인공인지도 말을 해주지 않고, 이 소설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2) 소설로 들어가는 부분
본격적으로 소설로 들어가는 부분을 작가는 직접 일러주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소설과 같은 구성으로 들어가기 전이다.) 최면술사가 최면을 유도하는 장면과 흡사하게 구성이 되어 있다. 먼저 몸을 이완시키고, 소설을 듣는 사람이 작가의 페이스에 호흡을 맞추게 도와준다. 네, 좋아요. 등의 어조로 반복하면서 청자가 직접 따라하도록 확인을 하고 있으며, 읽기 편하게 쉼표가 많이 사용되고 문장의 길이가 짧게 구성이 되어 있다.
몸이 이완이 된 이후에는 총 10단계를 거쳐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하고 있다. 실제 최면에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과 유사한 단계를 거치며 독자가 소설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3) 주인공이 되는 부분
보통의 소설들이 주인공을 따로 설정하고, 독자에 따라서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것과는 다르게, [나쁜 소설]은 독자 (혹은 청자)가 무조건 주인공이 되도록 설정을 해두었다. 앞부분에 함께 독자와 함께 주인공을 관찰하면서, 일단 주인공과 독자 사이에 거리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거리감을 두는 것과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하며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모습을 한 번 더 상상하게 만들고, 주인공과 독자 간의 거리를 한 발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그렇게 독자가 주인공의 이미지를 상상한다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주인공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게 만들면서, 독자가 더 주인공의 입장이 될 수 있게 주인공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나쁜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설정이 다시 나타나는데,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독자는 다시 소설의 첫 부분을 읽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다소 비판적인 시선으로 소설을 감상하게 된다.
독자가 소설에 대해서 낯설게 느끼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있으며, 소설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소설의 역할을 보여주지 않고 다시 주인공의 일상을 보여주고, 소설로 인해서 벌어질 일은 조금 후로 미뤄놓는다. 작가는 여기서 주인공의 캐릭터를 상세하게 설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세한 설명을 통해 독자가 더 이상 주인공이 낯설게 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소설을 복사해서 누구에게 읽어줄까를 생각하면서 소설은 다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4) 소설을 읽어주는 부분
소설은 35P부터 갑자기 진짜 소설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인물이 등장하고 그가 사건을 만들어나간다. 진짜 소설과 같은 모습은 통화부터 시작이 된다. 소설을 읽어줄 만한 사람을 그 누구도 찾지 못 하고, 결국 여관방에서 아가씨를 불러서 ‘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소설은 또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아가씨에게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을 하게 된다. 이전과는 다르게 말을 더듬기도 하면서, 다소 긴장된 어조로 읽는다. 또한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들려주던 것과 다르게, 소설 속의 소설과 같은 부분에서는 아가씨와 대화를 하면서 조금 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든다.
아가씨와의 대화 부분은 이 소설의 낯섦을 더 낯설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나’와 아가씨가 함께 성행위를 맺는 듯한 묘사를 그려내면서 마친다. 이 부분은 굉장히 자극적이면서도 어쩌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느낌을 주기에, 읽는 사람들이 전혀 낯설거나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들게 만든다.
5) 나오는 부분
소설로 들어갈 때는 열을 세던 작가는, 소설을 나올 때는 다섯만 세고, 여태까지 소설에서 있었던 일들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읽어주던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을 읽던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는 도입부분에 읽어줄 사람이 없으면 녹음을 해서 스스로 들으라는 것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독자를 조롱하고 있다. 마치 시처럼 끝을 맺으면서 독자를 위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롱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문장은 온전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지도 않은 채, 쓸쓸한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이 불친절함은 [나쁜 소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며, [나쁜 소설]을 나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나오는 부분은 굉장히 독특하다고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들어가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지 않은 것과는 반대로 나오는 부분에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소설이 끝이 나고, 어느 부분에서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몰입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4. [나쁜 소설]의 인물
[나쁜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단편이라는 것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인물들은 명확히 구분이 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주인공의 다양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인물들은 아주 작은 인물부터 아주 큰 인물까지 있지만 결국 하나의 인물의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실제로 사람들은 하나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은 아주 약간씩 다르기는 하더라도 누군가가 보기에 완전히 달라지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쁜 소설]의 경우 더더욱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소설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하는 지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어떤 인물이 어떠한 역할을 맡는 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심지어 읽는 독자의 역할이 청자인지 화자인지도 적혀 있지 않기에, 이 소설에 등장을 하는 인물들이 과연 하나의 인물일까?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 보인다.
1)화자
화자는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태까지의 소설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는 한 편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독자를 이리저리 요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화자는 반대로 독자이기도 하다. ‘이기호’가 실제로 설정을 한 것처럼, 소설을 읽게 된다면 화자는 독자 자신이 되고, 명확한 경계가 구분 되어 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나쁜 소설]은 실제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으면서도, 시나리오나 대본이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한 특성과 정확히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도 보이지 않는 화자의 특성은 어느 정도 닿아 있는 모습을 보인다.
2)주인공
주인공은 화자와는 다르게 다소 약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나이 제한에 걸릴 때까지 제대로 직업도 없는 사람이며, 홀어머니에게서 용돈을 받아쓰는 캥거루족이다. 소설을 읽어주고 싶어도 그 누구에게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그나마 믿던 애인 역시 부르지 못하는 사내다.
아가씨와 대화를 할 때 유난히 말줄임표를 많이 쓰며, 더듬거리는 모습은 그의 소극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드러낸다. 또한 책을 소리 내어 덮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장면 역시 그의 소심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세를 낮춘 후 바로 고개를 들지도 못 하고, ‘한참을 정지해’ 있다가 고개를 들게 되는데, 그는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이미지에 고정이 되어 있지도 않다. 화자처럼 정확히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도 묘사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 묘사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이 나쁘게 그려져 있지도 않다. 그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3)기차 속 여인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며 ‘윤대녕’의 소설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주인공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리를 피하게 된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야박스러운 사람이지만, 보편적인 독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기차 여행을 가다가 뜬금없이 말을 걸고, 답변이 없는 데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주인공이 더 기이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가장 비중도 적고 과연 이 인물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인물 역시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주인공의 소심한 성격, 주인공의 성격 중 소심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옛 애인
주인공이 생각을 했을 때, 가장 소설을 들어주기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무려 사 년이나 지났지만 가장 크게 남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주인공의 소설을 들어주지 않는데, 그 이유를 작가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독자에게 넘기고 있다.
작가는 명확하게 옛 애인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그녀의 성격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그녀의 배경 역시 자유롭게 설정함으로 소설을 읽는 재미를 주는데 이용하고 있다.
역시 이 역할 역시도 소설에서 굉장히 모호하게 드러난다. 애인이 있었어! 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애인의 모습은 드러나지도 않고, 결국 애인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인가? 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해결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애인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한 가지 성격일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소설을 읽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5)여관 직원
자포자기 하고 있던 주인공에게, 다시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희망과 같은 것을 준 인물이다. 그 역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리 적극적이지 못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흔히 아가씨를 붙이거나 할 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 역할은 주인공이 원래 가지고 있는 성격과도 닮아 있다. 때로 강하게, 여자에게 덤비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천성이 말을 더듬을 정도로 소심한 주인공과 쏙 빼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가씨를 보내는 모습은 주인공의 악한,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
6)아가씨
주인공의 소설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솔직하며,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다. 소설 안에 인물 중 가장 현실성이 있게 느껴지는 것 역시 그녀이다. 그녀는 직업여성이지만, 가식적으로 누군가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다소 천박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흥미가 가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처음에는 주인공을 경계하지만, 그가 소설을 읽어주면서 점점 그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와 성관계까지 맺고 있다.
7) 어머니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주인공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실패한 인생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라는 이유로 끈질기게 그를 붙잡고 있다. 이런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과도 닮아 있기에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희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기에 더욱 간절하면서,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기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게다가 보통의 어머니가 아닌 홀어머니라는 설정을 부가하면서, 더욱 강인하면서도 연약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안타까운 인물이며 혼자이기에, 보통의 어머니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이고, 그에게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아들이 소설을 읽는 것을 알면 이리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보면 강인한 면모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이 어머니라는 것도 주인공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라고 믿으며 따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인물은 우리가 흔히 믿는 신이나 하늘이 벌을 내릴 거야!의 하늘과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5. [나쁜 소설]은 나쁘지 않다.
[나쁜 소설]이 나쁘다는 내용은 소설 본문에서도 나오고 있다. 아가씨의 대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아, 씨발, 뭐 이리…… 나쁜 소설이 다 있냐……” 라는 부분이 그 부분이다.
[나쁜 소설]은 기존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르며 낯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서 독자들은 나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쁜 소설]은 익숙하지 않기에 쉽게 접근할 수도 없고 쉽게 이해가 가지도 않는다. 정확히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불명확 속에서도 재미라는 점을 놓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실험적인 면모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거북스럽지 않고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보통의 소설과는 다른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소설에 녹아 있는데, 작가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부분, 그리고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소설을 체험하는 부분이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흥미 때문인지 소설은 드라마화 되기도 했었다.
소설은 대화라는 것을 통해서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록 소설을 읽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것만 하더라도 충분한 소통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주인공이 소통을 하려고 애쓰는 부분, 소설을 읽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애쓰지만 그 누구도 찾지 못하는 부분,은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위에 아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만 진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곁에 있을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소설]은 나쁜 소설이 아니라, 다른 소설이다. 기존의 소설이 일방적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면, [나쁜 소설]은 적극적으로 독자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을 하고, 독자가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대화를 건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나쁜 소설]은 소설 속에서 이상을 그리는 것과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꿈도 이상도 없이, 애인도 없는 주인공의 남루한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친숙함을 느끼기도 한다. 바로 곁에서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기도 하며, 어머니께 계속 실망만 안겨주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기에 [나쁜 소설]은 나쁘지 않고 좋은 소설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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