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3
“너도 참 대단하다.”
희준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동안 알고 있던 선재는 이렇게 끈질긴 녀석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보니 확실히 진심은 아니더라도 뭔가 흥미가 생기기는 생긴 모양이었다.
“그 사람을 일찍 퇴근 시켜주면 안 되냐?”
“장난하냐?”
희준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너한테는 그 사람이 단순히 유희용으로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여자한테는 이게 직업이다. 뭐, 얼마나 이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기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뭐, 그렇겠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선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과는 확실히 다를 거였다.
“그나저나 너 사고 쳤다며?”
“무슨 사고?”
“오늘 인터넷도 안 했냐?”
“어?”
“다음 메인에 뜬 기사나 확인을 해 봐.”
선재는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그리고 잠시 미간을 모았다. ‘탑 배우 권선재, 신인 여배우 원주연에 독설.’ 선재는 신중하게 기사를 클릭했다. 상황은 그와 주연 사이에 있었던 일 그대로였지만, 마치 그 혼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듯한 내용이었다. 댓글을 클릭하니 모두 자신을 욕을 하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상황도 모르면서 악플이나 달고 있는 것들.
“매니저가 말을 안 해?”
“그나저나 빠르네. 오전에 있었던 일인데 벌써 기사가 다 나고 말이야. 우리 드라마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나한테 관심이 많다는 건가? 그 여자애한테는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요즘 원주연 인기 최고잖아.”
“최고면 뭐하냐?”
선재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순간 잠시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이 영원히 갈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라니, 확실히 불편했다.
“우리 아버지가 너 다시 묻더라. 아직도 레스토랑 체인점 낼 생각이 없는 거냐고. 낼 생각만 있으면 아버지가 전담하고 싶으시대.”
“됐습니다.”
희준이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알잖아. 나 체인점 음식 안 좋아하는 거. 체인점을 하게 되면 지금의 요리 하나도 맛이 나지 않을 거야.”
“거듭 말하지만 별로 맛 없다니까.”
“하여간 망할 자식.”
희준은 직접 선재의 잔을 치우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너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여유가 있냐? 소설 새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번 드라마 끝나자마자 나오게 할 거라고, 매니저가 엄청나게 열을 올리고 있던데 말이야. 정작 그 주인공은 여기서 이렇게 천하태평하게 여자 하나 퇴근을 하기를 기다리기만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하겠냐?”
선재가 카우치에 길게 누우면서 하품을 했다.
“그 여자가 너무나도 좋은데 말이야.”
“너 진심이야?”
“진심이라니까.”
“이해가 안 가네.”
희준은 신기한 눈으로 선재를 바라봤다. 은비는 확실히 선재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취향과 멀었다. 그 동안 선재가 사귀어온 여자들은 연예계나 패션계에서 알아준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대단한 여자들이 아닌 조은비라는 평범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히 신선했다.
“너희 어머니가 아시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우리 엄마? 신경 안 쓰실 걸.”
“그래도 아닐 걸.”
“괜찮아.”
선재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집에 아들 나 하나다. 이 아들내미가 엄마 옆에 안 있으면? 우리 어머니 그냥 시무룩해지실 걸? 우리 엄마 나 너무나도 좋아해서 내쫓거나 그럴 위인 못 되는 거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누가 너한테 그런데? 너 일일 드라마도 안 보냐? 그 뭐더라, 그래 굿바이 크리스마스. 거기서 보니까 시어머니 될 사람이 며느리가 될 사람을 얼마나 독하게 괴롭히던지. 그 사람 가족도 괴롭힌다니까?”
“그래서?”
선재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희준을 바라봤다.
“우리 어머니가 그럴 것 같다고?”
“아. 아니지.”
희준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선재의 친구라는 이유로 달마다 반찬을 해서 보내주시고, 선재 가족의 생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일까지도 본인이 초대를 해서 직접 상을 차려주시는 고마운 분이셨다.
“그래도 네가 아는 너희 어머니와,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알게 될 시어머니의 모습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거야. 모든 사람들은 아무래도 약간의 다른 모습도 있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안 그래?”
“뭐.”
선재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네 일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니야?”
“아직 디너 끝나지도 않았다. 설거지 하는 애는 디너 끝나고도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는 거라고.”
“마음에 안 들어.”
선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최저임금인가 그거는 지키고 하는 거냐?”
“최저임금? 그거보다 훨씬 많이 주니까 걱정을 하지 마세요. 시간당 10달러 주는 곳은 우리 밖에 없다고.”
“그게 많은 건가?”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한 5불이 안 될 걸? 그러니까 한화로 한 50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거야?”
“한 시간에?”
“어.”
“말도 안 돼.”
선재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많은 양의 접시를 닦고 있는데 한 시간에 10달러를 겨우 벌다니. 그리고 그나마 그것이 형편이 좋은 것이라니, 선재는 한숨을 내쉬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러고도 양심에 안 찔리냐?”
“뭐가?”
“너희 가게 메인 디시가 130000원이잖아? 디저트만 하더라도 가장 싼 것이 12000원부터 시작하는 주제에, 여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밥 한 번 제대로 먹을 수도 없게 생겼네.”
“수준에 따른 거지.”
“수준?”
선재가 코웃음을 치면서 희준을 바라봤다.
“말 했잖아. 이 레스토랑 그냥 살 돈 있다고. 그런데도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수준 이야기를 하는 거냐?”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구냐?”
희준은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친구인 자신에게까지 날을 세우다니.
“아무튼 너무 다르다.”
“뭐가?”
“사는 게 말이야.”
선재는 순간 기분이 울쩍해졌다. 로맨스 소설을 쓰다보니 그러한 것에 대해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위에서 보게 되는 경우도 그랬고, 차이가 나면 차이가 나는 만큼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나는 다를 거야.”
“정말?”
“응.”
선재가 눈을 반짝였다.
“진심으로 다가갈 거니까.”
“권선재 씨가 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며?”
“응.”
옷을 갈아 입으면서 은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이 돼서 큰일이야.”
“무슨 부담?”
“아니, 그런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를 모르겠어. 정말로 내가 좋아서 저렇게 행동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것인지 말이야.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영 가늠을 할 수가 없잖아.”
“복에 겨운 소리 하기는.”
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비에게 저 남자가 다가왔다는 말은 믿지 않았지만 정작 보니 은비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저 사람 우리나라 최고라고. 그런데 너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거 보면, 한 번은 그냥 저 남자가 어떻게 하는 지 봐도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뭔가 색다른 일이 생길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몰라.”
은비가 마지막으로 거울을 살피며 무기력하게 답했다.
“혹시 나 가지고 노는 거면 어떻게 하니?”
“그러면 처음부터 돈을 내밀지 않았을까?”
“그거야 모르지.”
은비는 깊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가늠을 할 수가 없는 사내였다. 도대체 자신이 왜 좋은 것일까?
“그 사람 진짜 권선재 맞겠지?”
“맞을 걸? 우리 사장이 권선재랑 친하거든. 그리고 지금도 뭐라고 안 하는 거 보면 맞을 거야. 왜 그냥 닮은 사람일까봐?”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은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채연의 옆에 앉았다.
“인간 조은비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니? 이건 말 그대로 반전이라니까. 반전.”
“좋은 반전이지.”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그래서 지금 1000만원짜리 수석 쉐프를 퇴근 못 시키게 하라고?”
“응.”
선재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여기 밥 한 번 제대로 못 먹을 형편이라며?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그 여자에게 이 정도 밥은 사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대단하시네.”
희준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레스토랑은 단순히 돈만 있다고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아니라니까? 단순히 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품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가 다 챙겨져야 가능한, 그러한 식당이라는 거 모르냐?”
“내가 스트리퍼 데리고 왔을 때도 몰랐으면서.”
“그건 네가 데이트 상대라고 했으니까 그러지!”
희준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선재를 노려봤다.
“아무튼 너 때문에 우리 레스토랑 수준이 팍팍 떨어지는 거라니까? 너만 아니었어 봐. 대한민국, 아니 세계 일류 레스토랑으로 우뚝 설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권선재 네가 항상 거기에 초를 치지요.”
“야, 밥 먹는데 수준을 왜 따지냐?”
“너는? 그럼 길 가는 거지랑 같이 밥 먹을 수 있냐? 노숙자랑 겸상을 할 수 있어? 지도 못 하면서.”
“그건 경우가 다르지.”
“똑같아.”
“달라.”
선재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희준의 어깨를 주물렀다.
“희준아. 내가 이런 부탁 여러 번 하냐? 어쩌다가 한 번, 정말로 어쩌다가 한 번 겨우 부탁을 하는 거잖아. 응?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들어주라.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는데. 그 여자 밥을 한 번 사준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냐? 돈도 낸다니까?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야?”
“퇴근 시간 지났다고. 그 사람도 이제 퇴근을 하는 거라니까. 지난 번에 전 대통령이 먹자고 했는데도 퇴근했다고.”
“나는 다르잖아.”
선재가 눈을 찡긋하면서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요리사도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않으려나? 요즘 어디를 봐도 내 얼굴 없는 곳이 없는데.”
“그런 거랑 상관 없다니까.”
희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녀석 말이 안 통해도 너무나도 안 통하고 있었다. 그냥 갑갑하다고 해야 할까?
“부탁이다. 응?”
“아, 몰라. 네가 직접 부탁해.”
“오케이.”
선재가 씩 웃으면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Buona notte! Shef." (좋은 저녁이에요. 셰프)
“Oh, Mr.Kwon. Piacere!" (오, 권선재 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Dammi una mano?" (저녁 식사 준비 좀 도와줄 수 있나요?)
“Naturalmente!" (그 정도야 쉽죠!)
선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차희준. 이 자식, 이렇게 사람 좋은 사람을 그 동안 무시를 한 거였어? 이렇게 친절한데.
“Molte grazie!" (정말 고맙습니다.)
“Prego!" (천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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