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낯선 곳에서의 시작
“미쳤나봐.”
한나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붙들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했어야 헀던 건데 도대체 왜 그랬던 건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경표를 잡고 싶었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었다는 것.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표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
“김한나 너 정말 어떻게 할래?”
이대로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에 머물 수도 없는 거였다.
“정말 울고 싶다. 울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휴가라고?”
“응.”
한나는 하수의 방 침대에 벌러덩 누우며 입을 내밀었다.
“세상이 전부 다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 같다고.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했다고 이러는 건데?”
“세상이 너에게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데? 그냥 조금만 견뎌. 그러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말이야.”
“너는 세상이 편하니?”
“어?”
“은하수 네가 부럽다.”
한나의 말에 하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부러워?”
“너는 아무 걱정도 없잖아.”
“어?”
“세상 사는데 아무런 걱정도 없고. 늘 미소만 지을 수 있고. 나는 하수 너처럼 언제 살아보는 거니?”
“너 나 놀리는 거야?”
“내가 뭐?”
“나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아.”
하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나 네가 그렇게 화려한 곳에 있는데 나라고 뭐 마음이 늘 편하기만 한 줄 알아? 너랑 가장 친한 친구인 나는 이렇게 우울한 상황인데. 너는 늘 그렇게 네 고민만 이야기를 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하수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한나는 입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내가 친구가 또 어디에 있니?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으니 너에게 와서 투정을 하는 거지. 너는 친구가 너한테 와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런 게 아니잖아. 네가 그냥 투정만 부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진도 다 빼고 가니까 그러는 거지. 나는 네 투정 다 받아주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없어. 너로 인해서 지치고 막 그런다고.”
“됐다. 됐어.”
한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련다.”
“어디를 가?”
“너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싫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
“지금 그런 이야기 아니야?”
한나는 하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동안 재수 하나도 없는 나 받아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니? 너 그 동안 고생하는 거 내가 하나도 몰랐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네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내 입장도 조금 이해하라는 거야.”
“됐어.”
“김한나.”
“나 원래 이래.”
한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선글라스를 썼다.
“나 인간 쓰레기인 거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러면서 굳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뭔데? 내가 혼자서 자책감이라도 느끼고 너에게 미안하게 생각을 하면 좋겠어?”
“그런 말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러는 건데? 김한나. 너 정말로 사람 질리게 하는데 뭐가 있는 거 알아?”
“뭐라고?”
하수의 말에 한나는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지금 너 혼자서 잘난 줄 알고 있지. 하지만 너 그거 아니라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오버하는 거 아니야? 네가 뭔가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다 사라지니 말이야.”
“뭐라는 거야?”
한나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은하수. 너야 말로 나에게 자격지심 가지지 마.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지금 누구한테 설교를 하려고 하는 건데! 내 도움이 없었으면 지금 그 회사에 취직도 할 수 없었다는 거. 그거 지금 인정도 안 하는 거니? 그거 사실인데. 지금 그냥 모른 척 하면서 그렇게 도망을 가려고 하는 거야?”
“뭐라고?”
하수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한나는 아차 싶었지만 더 이상 물러날 이유도, 물러날 곳도 없었다.
“가진 것도 하나 없는 것들이 꼭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요. 네가 못 가진 거 네가 가지니 부럽니?”
“됐어. 그만 둬. 너에게 이런 식으로까지 내가 모멸감 느끼면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네가 먼저 나를 건드린 거잖아. 그래놓고 지금 나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너 정말 잘났네.”
하수의 말에 한나의 가슴에 콕 박혔다.
“그렇게 엄청나게 잘 나셔서 친구도 하나 없어서 결국 나처럼 모자란 것에게 와서 위로나 받고. 너 그래서 정말로 행복하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 같은 애에게 위로를 받아서 즐거울 것 같아.”
“그래. 즐거워.”
한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자존심이었다. 분명 후회할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자존심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연락하지 마.”
“늘 네가 먼저였어.”
하수의 말은 너무나도 아팠다.
“늘 네가 먼저 연락한 거라고.”
깊은 생채기를 낼 정도로. 한나는 하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방을 챙겨들고 그대로 그녀의 방을 나섰다.
“너 그나마 그거 많이 봐준 거야.”
“그거 말하려고 부르신 거예요?”
송아는 자신에게 투덜거리는 한나를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가볍게 머리를 검지로 밀었다.
“너 정신 안 차릴래?”
“선배님.”
“너 나가게 해야 한다고 난리였어.”
“뭐라고요?”
한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아니 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회사를 나가기까지 해야 한다고 그러는 건데요? 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건데요? 자기들에게 피해 간 거 하나도 없으면서 다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네요?”
“다물어.”
송아는 황급히 한나의 입을 막았다.
“너 도대체 사람이 왜 이러니?”
“뭐가요?”
“너 그렇게 안하무인 이기적이야?”
“네?”
한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끄러미 송아를 응시했다.
“선배님이야 말로 저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내가 뭐?”
“제가 선배님 대신에 뛰어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기 싫은 프로그램도 다하고. 그런데 지금 저 혼자 나쁜 사람이다. 지금 뭐 그런 말이라도 하려고 하시는 거에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언제 그렇대?”
송아는 한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그나마 너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그러니까 뭐 감사라도 하라 그건가요?”
“김한나.”
“아이구. 감사합니다.”
한나가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이자 송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정말 질린다.”
“뭐라고요?”
“내가 도대체 네가 뭐라고 네 편에 들어서 그 사람들하고 싸웠던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나만 나쁜 년 모자란 년이 되면서 말이야. 너는 원래 인성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었던 건데. 그냥 내려가라.”
“그게 무슨?”
“됐어.”
송아가 그대로 한나에게 등을 돌렸다. 한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주먹을 세게 쥐고 고개를 숙였다.
“누가 부탁이라도 했나?”
괜한 자존심에 한나는 반대로 나가버렸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여?’
“그래.”
‘나가 하나밖에 없는 조카 탓에 걱정이 이로코롬 된다. 니가 조금이라도 잘 살아야 나가 언니한티 면이 설틴디.’
“또 그 소리.”
한나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이모에게 그런 거 책임지라고 했어? 자기 혼자서 편할 때 전화하고 다 쏘아부치고 뭐라는 거야?”
‘어머. 이 년이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겨? 나가 너한테 뭐 못한 것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씨부리는 거냐?’
“아 됐어.”
‘되기는 뭐가 되야?’
“나 짐싸야 하니 끊어.”
‘이 년아! 이 년아!’
한나는 복녀의 전화를 끊고 한숨을 토해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심각한 일은 심각한 일인 모양이었다. 한나가 늘 이런 식으로 전화 통화를 하기에 잘 걸고자 하지 않는 이모가 전화를 했다는 이유는 분명 심각한 거니까. 더군다나 복녀의 잔소리는 그리 잦은 편도 아니었다.
“아니 다들 자기에게 한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나에게 난리인 거냐고? 이런 실수 다들 안 하는 거야?”
일단 가방을 쌌다. 여행이라도 좀 가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저 여자 그 여자 아니야?”
“누구?”
“그 미친년.”
한나는 술을 들이켰다.
“뚱뚱한 사람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뭐 그런 말 한 그 막말 아나운서 말이야. 그 사람 아니야?”
“설마?”
“왜?”
“이런 데 와서 뻔뻔하게 술 마시겠냐?”
“그런가?”
한나는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켜고 손을 들어 큰 소리로 주문을 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모 여기 소주 안 줘요?”
소주가 나오고 한나는 연거푸 넉 잔을 들이켰다. 소주가 쓰지 않고 너무나도 달아서 더욱 속이 상했다.
“그 여자 맞네?”
“미친. 뻔뻔하네.”
“그러게.”
“그래도 몸매는 죽이네.”
“한 번 꼬실까?”
“네가 하면 넘어오겠냐?”
“지금 한 물 간 거잖아?”
한나는 남은 소주를 모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폐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사내들에게 비틀비틀 걸어갔다.
“너네 지금 뭐라고 했냐?”
“네?”
“너네 지금 뭐라고 한 거냐고!”
한나의 고함에 방금 전까지 그녀에 대해서 온갖 더러운 말을 지껄이던 사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되게 우습지. 그래. 내가 말실수를 조금 했어. 그렇다고 내가 너희한테 이따위 말을 들어야 하는 거냐? 그러는 너는 지금 나랑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하는 건데? 내가 술자리에서 한 소리랑 지금 너희가 나에게 지껄이는 소리랑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건데!”
“죄송합니다.”
사내들 중 하나가 황급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미친.”
한나는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들었다.
“이 개자식아!”
그리고 가장 심한 말을 한 사내의 머리에 그것을 내리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김한나 씨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고 난 이후 자신은 경찰서였다. 그 이후 정신없이 조사를 받고 있었지만 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요.”
“그렇다고 이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합의하시죠.”
경찰의 말에 한나는 고개를 숙였다.
“싫다면요?”
“네?”
“싫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법정 다툼을 다루게 될 겁니다. 이 사건 같은 경우에는 민사 사건입니다. 그러니 넘어가시기 전에 그냥 합의하시는 것이 유리할 겁니다. 게다가 김한나 씨가 피해자를 때렸다는 목격자도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한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미쳤어. 미쳤어. 김한나.”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도 벌어지지 않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세까지 급하게 빼주고 합의까지 하고 나니 정말 몇 푼 남지 않았다.
“이 상황에 무슨 여행이냐.”
다행히 기사가 나지 않았지만 일단 근신이 옳았다. 가능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 더 유리할 거였다.
“그래. 가자. 가자 김한나. 정말 제대로 잘 해서 다시 서울로 오는 거야. 그래서 다들 후회하게 하는 거야.”
한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증언 하나 하러 왔습니다.”
“네?”
경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까만 얼굴에 남루한 옷차림의 젊은 사내에 경찰은 미간을 모았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나간 저 여자분과 관련해서 관련 일에 대해서 증언할 일이 있습니다.”
“네?”
경찰은 미간을 모으며 사내를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 바로 내려간다고?”
“그래.”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아니.”
하수는 물끄러미 한나를 응시했다.
“너 내가 너랑 얼마나 오래 친구였던 건지 잊었어? 너 지금 그 표정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는 표정이잖아.”
“사람을 쳤어.”
“어?”
“소주병으로.”
“미친.”
“그러게.”
한나는 테이블에 녹은 버터처럼 축 늘어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하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그냥 아나운서 그만 둘까?”
“왜?”
“그 촌에 다시 어떻게 가?”
“거기에서 조금만 고생을 하면 다시 서울로 올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럼 거기에 그냥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한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시골은 싫어. 냄새도 나고. 불편하고.”
“너 그렇게 자꾸 투정만 부릴래?”
“내가 뭐?”
“그곳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좋게 생각을 하면 달라지는 거 아니야? 나쁘다고 생각을 하면 계속 나빠지는 거고. 네가 좋게 생각을 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구석을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안 그래?”
“그런 데서 좋은 걸 어떻게 찾니?”
“김한나.”
“알았어. 알았다고.”
하수가 또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수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너 나니까 참는 거야.”
“또 그 소리 할래?”
“김한나.”
“됐다. 나 집이나 알아보러 내려갈래.”
“어?”
“당장 가라며?”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래도 내려가야 하는 것 같아.”
“숙소 구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숙소?”
한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내밀었다.
“그런데서 사람이 살 수나 있겠니?”
“그래도 일단 가보고 나서 말이나 하셔.”
한나는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묵으면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충헌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한나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한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무 좁은 거 아니에요?”
“뭐라고요?”
“아니 사람을 불렀으면.”
“내가 누구라고 보입니까?”
“네?”
“여기 엔지니어입니다. 엔지니어. 혹시라도 방송할 일이 있으면 내가 다 담당하고 그래야 하는 사람이라고요. 내가 지금 김한나 씨 집이나 알아봐주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는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여기 싫으면 집 알아서 구하십시오.”
충헌이 혼자서 내려가는 것을 보며 한나는 입을 쭉 내밀었다.
“사람 되게 예민하네.”
한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집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간단한 가구 몇 가지만 놓여있는 집은 너무나도 썰렁했다.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뭐 하나 들어있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물도 없는 집에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누구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천하의 김한나라고. 내가 지금 잠시 이런 꼴로 산다고 해서 사람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정말 여기 사람들은 내가 상종을 할 수가 없겠네.”
한나는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가게는 어디에 있는 거야?”
무슨 동네에 슈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도 어플을 켜봤지만 변변한 건물도 하나 잡히지 않는 동네였다.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
심지어 방송국도 위치 저장이 되어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나는 어이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택시도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때려 칠 거야. 무조건 그만 둘 거라고.”
씩씩하게 걸음을 몇 발자국 떼다가 다시 욕을 내뱉었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왠 자동차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차도로 나가서 미친 듯 손을 흔들었다.
“저기요! 이봐요!”
차는 한나 앞에 딱 서더니 경적도 울리지 않았다. 한나는 차로 가서 당당히 문을 열고 앉아 손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멍하니 있는 사내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살짝 뒤로 눕혔다.
“뭐해요? 출발 안 하고?”
“누구십니까?”
“나 몰라요?”
“네?”
“김한나에요.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김한나.”
사내는 물끄러미 한나를 응시했다.
“그래서요?”
“네?”
“내려요.”
“아니 무슨?”
“저를 아십니까?”
“아니 그거야.”
“모르죠?”
한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촌놈이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한나는 일단 콜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나 이제 이 동네 살게 된 사람인데 무슨 동네에 슈퍼 하나 없어요. 지금 콜라 마시고 싶으니 슈퍼 좀 데려다 줘요.”
“그러니까 그걸 제가 왜?”
“이 동네 주민이잖아요?”
한나는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시골 인심 아닌가?”
“뭐라고요?”
“당장 가라고요.”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의점 앞에 서고 한나를 응시했다.
“내리시죠.”
“기다려요. 콜라만 사서 올게요.”
한나는 사내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편의점에 들어간 사이 그대로 차는 멀어졌다.
“뭘 마실까?”
한나는 냉장고 앞에 서서 이것저것 음료수들을 살폈다. 그리고 물 몇 병과 음료수 몇 캔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사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음료수 하나를 더 꺼내 가져왔다.
“계산해주세요.”
산나는 마음으로 편의점을 나선 한나의 얼굴이 굳었다.
“이 사람 지금 어디에 간 거야?”
설마 그냥 간 건가? 한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거기 어딘지도 모르는데. 지금. 그러니까 그 망할 자식이 나를 두고 그냥 자기 갈 길을 그냥 간 거야?”
한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리 늦었나?”
“미친 년 하나 있더라?”
“뭐라카노?”
“치아라.”
득수는 물끄러미 복규를 응시했다.
“니 무슨 일 있제?”
“뭐라고 하는 기고? 내가 이 촌구석에서 뭔 일이 날 것이 있겠나? 그냥 오다 놓고 온 게 있어가 다시 다녀온 기라.”
“천하의 오복규가 물건을 놓고 댕긴다고? 세상에 귀신을 속이라. 어디 속일 사람이 없어 내를 속일라카나?”
복규는 묵묵히 작업을 시작했다. 참외를 분류하던 복규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햄. 내 잠깐 어데 좀 다녀올게.”
“어데?”
“잠시만 기다리라. 알았제?”
복규는 황급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아까 그 편의점 앞으로 향했다. 아까 그 여자가 허탈한 표정으로 편의점 앞에 주저앉아있었다. 복규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련한 여자였다.
“택시라도 타고 가야지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왔어요?”
환하게 웃는 미소에 복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른 타요.”
“사람이 약속을 하고 가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그냥 가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 아니요.”
여자는 황급히 차에 올랐다. 복규는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집으로 차를 운전했다. 출하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이 여자가 자꾸만 밟혔다.
“이거 드세요.”
“거기 그냥 두시죠.”
복규의 무뚝뚝한 대답에 한나는 앞에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고 복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나를 다시 둔 채로 작업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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